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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엄마 Jun 19. 2020

아무튼 가오리

다정한 일기  by 은결

혜진님:) 에쿠니 가오리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한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보다는 문장이 얼마나 삶을 맛깔나게 표현하느냐에 중점을 두고 책을 많이 읽는 스타일인 내게 에쿠니 가오리의 글들은 내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죠. 이름을 이야기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네요.




에쿠니 가오리를 알게 된 건 대학교 때였어요.

한 사람을 많이 좋아했는데, 왜인지 저에게 각인되어 있는 사랑의 속성이 슬픔이어서, 좋아하는 만큼 그 사람과의 마지막 이별을 생각하고 괜히 가슴 아파지곤 했었어요. 딱 그 맘때 도서관에서 <낙하하는 저녁>이란 책을 발견했답니다. 아직도 책의 첫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떠올라요. 가슴이 먹먹해지죠. 오랜 세월 연인으로 지내온 리카와 다케오가 이별하는 장면이거든요. 자신이 버려지는 것보다 마음 아파할 다케오가 더 신경이 쓰이는 리카. 제 안엔 그런 리카가 살고 있었나 봐요.


그 후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들은 모조리 읽은 듯해요. 사기도 하고 빌려 읽기도 하고. 신간이 나오면 바로 주문 1순위였지요. 일본 소설들이 제가 추구하는 정서에 좀 맞았아요. 흔히 제가 가지고 있던 잘하지 못하면서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ㅡ예를 들면 많은 친구들, 좋은 인간관계, 헌신, 등 ㅡ이 일본 소설 안엔 거의 들어 있지 않았죠.


<낙하하는 저녁>만 보더라도 리카와 다케오, 하나코의 중심으로 이어지는 스토리에는 그들 셋의 문제뿐이지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없거든요. 가령 리카와 다케오가 8년을 함께하고 동거까지 했는데 헤어진다고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왈가왈부하지 않거든요. 리카 자신의 감정만 추스르면 되죠. 그런 관계의 단순함이 부러웠나 봐요.


게다가 가오리님은 내가 느낀 감성을 언어로 어떻게 그렇게 잘 풀어내시는지, 매번 감탄하곤 했답니다. 특히 냄새에 대한 것인데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 밖에서는 눅눅한 밤기운과 겨울 거리의 냄새가 났다.(소란한 보통날 p.32) 나는 그렇게 말하고, 공기를 가슴 깊이 머금었다. 낮고 묵직한 쥐색 하늘, 나는 거리에서 맡는 바다 냄새를 좋아한다.(소란한 보통날 p.33) 냄새는 신기하다. 코로 들어와 온 몸으로 퍼져서, 사람을 기운 나게 한다.(소란한 보통날 p.89)"


문장을 읽으면 그대로 내 경험이 떠올라요. 이런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옮겨 적었는지 모른답니다. 이런 표현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걸 속상해하며, 여전히 감탄하며.




최근에 에쿠니 가오리님의 새 책이 나왔어요. 역시나 믿고 보는 김난주 님의 번역.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라는 책인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녀가 어떻게 그런 글들을 써낼 수 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이 책의 내용 중 <투명한 상자,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는 부제가 달린 챕터엔 쓰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는데 '글자에 질량이 있어 글자를 쓰면 내게 그 잘량만큼의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로 시작되는데 아 정말 맞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글자에는 질량이 있어, 글자를 스면 내게 그 질량만큼의 조그만 구멍이 뚫린다. 가령 내가 안녕이라고 쓰면, 안녕이라는 두 글자만큼의 구멍이 내게 뚫려서, 그때껏 닫혀 있던 나의 안쪽이 바깥과 이어진다. 가령 이 계절이면 나는, 겨울이 되었네요 하고 편지에 쓸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그때껏 나의 안쪽에만 존재하던 나의 겨울이 바깥의 겨울과 이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조금 밖으로 흘리는 것이다. 글자가 뚫은 조그만 구멍으로.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p.52

아 정말 그렇지 않나요? :)


"쓴다는 것은 시간을 약간 멈추게 하는 것이고, 멈춰진 시간은 거기에 계속 머문다. 편지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나는 내 머리가 투명한 상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어가 없으면 텅 빈 공간인데 , 겨울이라고 쓰면 바로 눈 내린 경치가 되기도 하고, 미역이라고 쓰면 바로 싱그럽고 반투명한 녹색 해초로 가득해진다. 그러니 글자가 뚫는 구멍은 필요하고, 아마 사람들은 예로부터 날마다 그 상자를 오가는 많은 것들을, 글자를 통해 바깥과 이어왔던 것이리라. 아주 조금 시간을 멈춰놓고,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을 머물게 하려고.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 <한동안 머물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 p.53~54)"


이번에도 저는 이 책을 통해 한동안 행복한 마음으로 그녀의 곁에 있다가 왔답니다.


혜진님은 어떤 작가를 좋아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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