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딜레마:
너와 나의 건강한 거리

(feat. 문요한 <관계를 읽는 시간>)

by 지음


"타인과 나 사이에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은은한 사랑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
타인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는 내가 된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자유롭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모여 읽는다는 것> p.139


고슴도치 딜레마. 인간이란 평생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싶고, 멀어지면 가까워지고 싶은' 딜레마를 가지고 살아간다. '접근'과 '회피'라는 두 축이 인간관계의 핵심 갈등을 이룬다.


몇 년 전 상담에서 '접근'과 '회피'에 대한 나의 경향성을 몸으로 경험한 적이 있다.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나와 3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나는 가만히 있는 채로 선생님이 먼저 한 걸음 다가오셨다. 그리곤 "어때요? " 어색한 상황이었지만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한 걸음 더 다가오셔서는 "이 정도는 어때요? 불편하면 얘기해요." 나는 그 정도 거리도 괜찮았다. 한 걸음 더 다가오시니 거의 내 코앞에 닿을 거리가 되었다. 그때는 불편했다. 이제 반대로 선생님은 가만히 있고 내가 다가갈 차례였다. 선생님께 한 걸음 다가가니 "어때요?"라고 물으신다.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두 걸음, 세 걸음을 다가가 코앞에 섰는데도 내가 접근할 때는 불편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나는 누가 먼저 너무 가깝게 다가올 때는 회피하고 싶은 경향성이 높지만, 내가 타인에게 접근하는 것에는 큰 불편함이 없이다. 몸이 나의 관계 패턴을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가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면서도 은은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건강한 거리일까. 관계에 놓인 누구나 생각해 본 주제일 듯하다. 그럼에도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 주제에 대하여 정신과 의사인 문요한 작가는 깊고 넓게 분석한다. 깊은 이유는 여러 심리학적 이론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 넓은 이유는 문화적 관점과 작가 나름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운더리: 경계 & 교류


작가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를 '바운더리'라는 개념으로 풀어내고 있다. 바운더리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자아와 대상과의 경계이자 통로"를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나와 타인 사이의 "심리적 경계"라고 볼 수 있다. "경계"라고만 말하면 자신을 보호하는 측면만 강조하고 타인과 교류하는 측면이 소홀하게 취급될 수 있으므로 "바운더리"라고 번역했다고 밝히고 있다.


"바운더리는 자신을 보호할 만큼 충분히 튼튼하되,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게 교류할 수 있을 만큼 개방적이어야 한다. 세포막처럼 유연해야 한다."

<관계를 읽는 시간>


나를 보호할 만큼 튼튼하면서도, 타인과 교류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선선한 바람이 드나들면서도 은은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으려면 이런 바운더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바운더리가 문제가 생기면, '희미한 바운더리 vague boundary' 또는 '경직된 바운더리 rigid boundary' 가 될 수 있다. 자아의 바운더리가 희미하면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남들 의견에 늘 휩쓸리기 쉽다. 식당에서 "뭐 먹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늘 "난 아무거나 먹어도 돼. 너 먹고 싶은 거 먹어."라고 일관한다면 희미한 바운더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바운더리가 경직되어 있으면 상대에게 공감하지 못하고 자기주장만 강하게 피력하는 경향이 높다. "뭐 먹고 싶어"라고 물었을 때 "난 이거랑 저거 먹고 싶은데 괜찮지? 여기 주문이요~" 하는 스타일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바운더리는 자아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인간은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보낸다. 엄마의 몸에서 한 몸으로 생활하다가 출산의 순간 엄마의 탯줄에서 분리된다. 이때부터 바운더리의 문제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엄마는 모성이 아기에게 집중적으로 몰입되는 경험을 한다. 마치 엄마와 아기가 한 몸인 것처럼 아기의 표정, 울음, 몸짓에 반응한다. 이때 아기는 자폐적인 심리 상태에 놓여 있다.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다 엄마의 표정, 말, 몸짓을 통해 자신과 엄마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한다. 아기의 몸이 자라며 엄마로부터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을 때쯤엔 아기는 더 이상 엄마의 껌딱지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른 세상이 궁금해진다. 용감하게 탐색을 하러 나가지만 아직 유약한 어린아이는 불안함을 견디지 못해 엄마라는 안전 기지로 되돌아온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는 관계를 반복한다. 밀당의 시작이다.


엄마와 아이는 평생을 통해 의존과 독립, 접근과 회피의 주제를 반복한다. 그리고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맺는 대인관계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애착이 안정적으로 형성된 아이들은 엄마와 '연결된 분리'를 경험한다고 하는데, 이를 심리학적으로 '대상항상성'이라 말한다. 엄마와의 안정 애착이 내재화되어 그는 스스로의 엄마가 되어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간다. 건강한 바운더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말이다. 아이와 엄마와의 관계를 "실(Threads)"로 표현하며 '연결된 분리'가 어떤 모습인지 잘 느낄 수 있는 영상을 소개하고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f16-TIBmcMg


어린 시절 형성된 애착은 바운더리의 기초를 만든다. 학대받은 자녀가 희미하거나 경직된 바운더리를 초기에 형성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후에 초기 경험을 극복하게 해 줄 정도로 좋은 대상(선생님, 친구들, 연인, 배우자 등)을 경험한다면 바운더리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애착 손상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손안에 깊이 박힌 가시 같은 느낌이랄까. 평소에는 아프지 않은데 어린 시절 부모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대상을 만나면 그 가시에 다시 찔려 비슷한 아픔을 느끼게 된다. 대상관계이론에서는 이를 '내적 대상관계가 재연된다'라고 말한다. 관계의 비밀을 이해하는 첫 시작은 초기에 형성된 나의 대상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나의 첫 대상이었던 부모(주 양육자)와의 관계.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현재 내 관계를 이해하는 전부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중요한 첫 시작이 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작가는 애착, 발달, 대상관계이론과 작가만의 고유한 관점을 더해 '심리적 미숙아'와 '심리적 과숙아'가 있다고 말하며, 이들을 다시 순응형/ 돌봄형/ 방어형/ 지배형 4개의 관계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다음 포스팅에서 얘기해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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