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제목에서부터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요. 어린이의 세계가 아닌, 어린이라는 '세계'를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좋은 어른의 마음이랄까요? 이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빨리 읽기 아까워서 되새김질(?)하며 읽는 중이어서요. 한 단어, 한 문장마다 작가가 어린이라는 세계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자꾸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니 읽는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네요. 제가 자녀를 대하는 속도가 빨라질 때, 그리고 무례해질 때 두고 두고 읽고 싶은, 그런 책입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어린이의 품위>에 대해 리뷰하며, 미국의 유명 정신분석학자 하인츠 코헛이 얘기한 '건강한 자기애'를 연결하는 서평을 작성해 볼께요. ^^
작가는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한다. 대상은 대부분 초등학생. 그녀가 독서교실을 운영하며 좋아하는 서비스를 소개한다. 그 서비스는 바로 어린이의 '겉옷 시중'을 드는 일. 어린이가 독서교실에 들어오면 일단 가방을 받아 정리하고, 외투 벗는 것을 돕는다. 외투 벗는 것을 도울 때도 그녀의 섬세함은 빛을 발한다. 외투 자락 말고 다른 데는 선생님 손이 닿지 않게, 너무 빨라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수업이 끝나고도 외투를 입는 시중을 드는 작가는 왜 이런 시중을 좋아하게 된 걸까?
"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건 네가 언젠가 좋은 곳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해서야. 어쩌면 네가 다른 사람한테 선생님처럼 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 이거 연습해 보자."<어린이라는 세계> p.39
이런 선생님을 한번이라도 만나본 아이는 어른에 대한 느낌이 다를 것 같다. 그리고 마음에 오래도록 담아두고 싶은 작가의 말도 소개하고 싶다.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어린이라는 세계> p.41
몬테소리의 <코풀기 수업> 내용을 인용하며 작가는 어린이도 사회 생활을 하고 있고,'품위'를 지키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과자 부스러기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어린이, "화장실 좀 빌릴께요."라고 말하는 어린이, 딸기를 대접하면 "요즘 딸기 비싸지 않아요?"라며 사양하는 어린이 등등. 작가는 어린이의 모습을 세심히 관찰한 후 그들이 품위를 지키고 싶어하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어린이라는 한 인격체에 대한, 좋은 어른의 품위 있는 태도가 무엇인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건강한 자기애를 위하여
프로이드가 자기애를 미숙한 상태로 간주했다면, 미국 정신분석학자 하인츠 코헛(Heintz Kohut)은 자기애를 성장 과정에서 필수적이며 평생 지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아기들은 엄마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엄마를 통제하는 것도 자신을 통제하는 것처럼 느끼는데, 이렇게 매우 행복한 자기(self)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곧 자기애다(출처: <쉽게 쓴 자기심리학> by 최영민). 따라서 코헛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의 행위나 성공을 즐길 수 있으며 좋은 대상과 관계를 가지고 싶은 욕구는 전 생애를 통해 잘 발전시켜 나가야하는 건강한 욕구로 보았다.
코헛은 자기애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며 전 생애를 통해 건강한 방법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며, 이를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발전되면 '병리적 자기애',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르시스트' 처럼 변질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아기는 아직 '자기(self)'를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기는 성장한 자기가 스스로 담당해야 하는 기능을 지금 대신 제공해 주는 '자기대상(self-object)'를 필요로 한다. 자기대상은 보통 유아의 '엄마'가 되는데, 자기대상이 아이의 욕구에 공감적으로 반응해 줌으로써 건강한 자기애를 발전시켜 나가며, 아이의 자기(self)는 단단하게 성장한다.
코헛은 아이의 자기애적 욕구를 3가지로 나누며, 아이는 자신의 자기애적 욕구에 적절히 반응해 줄 수 있는 3가지의 자기대상을 필요로 한다고 설명한다. 과대자기대상, 쌍둥이자기대상, 이상화자기대상.
출처: <쉽게 쓴 자기심리학> p.63
3가지 다 설명하기엔 너무 길어질 듯 하여 본문과 관련있는 과대자기대상만 설명하면, 과대자기대상은 아이의 과시감을 즐겁게 수용해주는 대상을 말한다. <쉽게 쓴 자기심리학>에 나온 예를 들자면, 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아빠의 손바닥 위를 낑낑 거리며 기어오르고 있다. 이 아이는 균형을 맞추며 손을 번쩍 들었는데 아빠도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최고!!"라고 소리 지른다(아빠의 살짜쿵 도움을 받아 성공할 수 있었음에도). 아이는 아빠의 손바닥 위에서 조각상처럼 서서 마치 승리자처럼 환호하는데 아빠와 아이는 그 승리의 도취감을 함께 만끽한다. 이 아빠는 아이의 과대자기대상이 기꺼이 되어준 것이다.
"과대 자기의 특징적 양상은 전능감과 과대감, 그리고 과시적 자기애다. 아이의 초보적인 과대감이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부모가 즐거워할 때, 이러한 초기 과대 자기의 특징적인 양상들은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완화되고 변형된다." <쉽게 쓴 자기심리학> p.88
작가는 어린이들에게 아낌없이 좋은 과대자기대상이 되어주었다. 특히 <어린이의 품위> 파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제공한 정중한 대접은 아이들의 과대 자기의 자기애적 욕구를 건강하게 채워주었을 것이다. 또한 <선생님은 공이 무서워요?> 파트에서도 아이들의 '허세'를 신박하게 받아주는 작가의 모습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해리 포터' 시리즈 덕분에 영국으로 유학 가고 싶은 소망을 말하는 어린이가 큰 걱정이 2개나 생겼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하나는 제가 옥스퍼드에 갈지, 선생님 옥스퍼드 아시죠? 옥스퍼드에 갈지, 케임브리지에 갈지 아직 못 정한 거예요. 또 하나는 나중에 저 다니는 대학교에 엄마 아빠 형아가 놀러 오면요, 저는 한국말을 잊어버리고
영어로만 말할 수도 있어서 그게 걱정이예요. 선생님 만났을 때도 제가 영어로만 말할 지 몰라요...(중략)
어린이의 허세는 진지하고 낙관적이다. 그래서 멋있다. 결정적으로 그 허세 때문에 하윤이가 옥스퍼드(또는 케임브리지)에 갈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다 건너까지 유학을 가겠는가.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어린이라는 세계> p.27~28
초4인 딸은 차암 자존감이 높다. 감사한 일이다. 예전에는 허세 같은 느낌이 있어 '버릇이 없어질까봐', '친구들에게 혹여 잘난 척 하는 친구로 보이지 않을까'하는 염려로 잘 받아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심리학 공부를 하며 이 허세부림이 얼마나 중요한 자기애적 욕구를 채우려는 시도인 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우와~~~대단한 걸?! 어떻게 이런 대단한 생각을 다했어?", "옴마나~~ 이런 멋진 걸 뚝딱 만들었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등등. 나는 어린 시절 들어보지 못한 감탄을 늘어놓는다. ㅎㅎ (어떨 때는 딸이 부럽다).
다만 어떻게 아이의 자기애적 욕구를 '건강한' 방법으로 충족할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면 아이를 나르시스트로 키울 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은 중요하다. 답은 또 '공감'이다. <애착과 심리치료>를 공부하며 거울뉴런체계에서 공명의 활성은 '의도된 행동'에 의해서만 이루어짐을 깨달았다. 그러니 아이의 과대자기애적 욕구를 받아줄 때도 내 의도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 그 아이의 자기애는 건강하게 발전할 수도, 병든 채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나의 의도가 건강한 의도이면 좋겠다. 다른 아이들보다 내 아이가 잘나기 위해서가 아닌, 내 욕망을 투사해 아이를 통해 이루어보려는 심리적 통제가 아닌, 그저 아이가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믿어주면서 용감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단단한 아이가 되길 바라는 그 의도면 어떨까? 그렇다면 아이는 내 건강한 의도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건강한 자기애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라는 세계>는 부모와 자녀 관계를 다루고 있진 않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꼭 필요한좋은 어른 상(image)을 제시하고 있다. 부모이든 선생님이든 우리 사회에는 이런 좋은 어른이 꼭 필요하다. 아직 우리 딸이 "어린이"로 남아 있는 지금, 나도 그 세계를 작가와 같은 세심한 마음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