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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Apr 18. 2021

전교 1등한 거, 엄마에게 축하받고 싶었어요. 뜨겁게

(feat. 브레네브라운 <수치심 권하는 사회>)

블로그 이웃 님의 소개로 읽게 된 책. 대학원에서 수치심에 대한 심리학적, 신학적 의미를 배웠지만, 수치심 자체에 집중하지는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핵심 감정이 수치심과 연결된 것을 깨닫고 적잖이 놀랐다. 2년 동안 매주 성찰일지를 썼음에도 내 중요 감정을 수치심으로 명명하지 못한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다시 공부하러 들어가야 되나? ^^;;)



어쨌든 브레네 브라운은 TED 나 Netflix 강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매우 유쾌한 사람이다. 아니, 유쾌한 사람처럼 보인다.https://youtu.be/H7Wd_6mFrjk


편안한 외모에, 스토레텔링 능력이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수치심이라는 주제를 연구할 생각을 했을지 신기하다. 책을 읽고 나니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녀가 수치심이 적어서가 아니라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구이지 않았을까?


** 제가 이 책을 yes24 전자북으로 봤기 때문에 명확한 페이지 표시를 하지 못한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수치심이란?

수치심(Shame)을 단순히 창피한 감정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초등 1학년 영이와 순이는 받아쓰기 시험에서 둘 다 70점을 받았다. 영이와 순이는 70점 맞은 걸 창피하게 생각한다. 누군가 "너, 70점 맞았어?" 물어봐도 영이는 "응, 이번엔 70점이네. 으~쪽팔려." 순이는 "너, 70점 맞았어?"라는 물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그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화장실로 뛰어가 남몰래 눈물을 훔친다. 영이는 70점이 창피했지만 순이는 수치스러웠다. 이렇듯 수치심은 순간적인 창피한 감정만 뜻하지 않는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수치심을 정의한다.


"수치심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몹시 고통스러운 경험 또는 느낌이다. 여성들은 모순되고 경쟁적인 사회공동체의 기대 속에서 수치심을 느낄 때가 많다. 수치심은 두려움, 비난 그리고 단절감을 유발한다."


두려움, 비난, 단절감을 유발하는 감정. 하지만 이런 학술적 정의보다 이 책에 인용된 시가 수치심이 무엇인지 더 잘 설명하는 듯하다.


수치심 Shame


자신이 사는 곳을 부끄러워하고

보잘 것 없는 아버지의 월급으로

먹고 입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뚱뚱한 몸, 대머리, 불긋불긋 흉측하게 난 여드름

점심 먹을 돈이 없는데도 배고프지 않은 척하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치료비가 없어서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데도

아프다는 걸 숨기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싸구려 술을 마시는 자신을 혐오하고

무기력함에 쓰레기가 쌓여가고

달리 살 길이 있지만 자신이 어리석어

그 길을 찾지 못한다는 부끄러움,

이것이 수치심이다.

성경에 가득한 '영광'이라는 단어가

내 사전에는 없다는 걸 아는 것,

이것이 빌어먹을 수치심, 울부짖는 수치심,

범죄와도 같은 진짜 수치심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르면서도

읽을 줄 아는 척 하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렵고

슈퍼 계산대에서 눈치 보며

공짜 쿠폰 찾느라 꾸물거리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더러운 속옷을 입고,

너무나 당연한 듯 내 아버지도

사무직이라고 거짓말하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친구들한테 자기 집이라며

멋진 집 앞에 내려달라고 하고는

차가 떠나면 초라한 자기 집으로 걸어가는 것,

이것이 수치심이다.

-번 러살라 Vern Rutsala-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신체의 반응을 느꼈다. 내가 공감 가는 대목에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은 감정 뿐만 아니라 육체적 감각으로 찾아온다.




나의 수치심을 덮은 축하


나는 언제 수치심을 느낄까? 나는 모성과 육아, 일의 분야에서 자주 느끼는 편이다. 특히 자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 못하는 엄마라고 느낄 때 수치심을 느낀다.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으면 여지 없이 내 안의 수치감이 작동된다. 눈과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 문제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바로 해결해야 하는 모드로 전환된다. 이어서 아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만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이 못 견디게 수치스럽다. 심리상담과 신학을 공부하고 상담 수련을 하면서 소리 지르는 빈도나 강도는 정말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는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인 수치심 스위치가 탁! 하고 켜진다.


내가 '자녀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라는 수치심 거미줄에 자주 걸리는 이유가 있다. 나 역시도 수치심 거미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엄마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인정에 늘 목이 말랐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그토록 엄마의 인정에 목마른지도 잘 몰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원하는 만큼 세상의 인정이 오지 않을 때 마치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한 어린 아이가 되살아나, 깊은 우울로 빠져들 때가 많았다. 그 정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중학교 2학년 때 생각이 난다. 중간고사를 보다가 가채점을 해보고 내가 기대한 성적이 아님을 확인했을 때,

나는 교실에서 엉엉 울었다. 친구들이 왜 우냐고 물었을 때 "엄마가 실망할 까봐"라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왕따를 당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다. 온 몸으로 내 교육을 위해 희생, 헌신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우리 엄마의 인생은 무가치해질 거라고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엄마를 위해 공부했던 거다.


중2 중간고사에서 오징어 다리 성적표를 받아보니 전교 1등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성적표를 내밀며 "엄마, 나 전교 1등 했어!" 라고 말했다. 그 때 설겆이 하던 엄마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했다. 다음에도 그렇게 해라."

"......"


나는 그 때 엄마의 칭찬이 듣고 싶었다. 나는 그 때 엄마의 축하를 받고 싶었다. 나는 그 때 엄마의 인정이 필요했다. 근데 이 중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받아서 마땅한 축하였는데...


5년 전 다른 이슈로 상담을 받으면서 나는 갑자기 이 에피소드를 꺼냈다. 상담 선생님은 그 때 마땅히 받아야 했던 축하를 받지 못한 그 경험에 대해 애도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현재 가족들에게 그 때 받고 싶었던 축하를 받아보라고 권하셨다. 선생님은 나에게 "그 때 어떤 축하를 받고 싶으셨어요?" 라고 물었다. 나는 대뜸

"케익에 불을 켜고 축하 받고 싶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 새벽.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위해 파리바게뜨에 가서 케익을 샀다. 그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기억난다. 집에 돌아와서 영문을 1도 모르는 아들과 딸, 남편을 깨웠다. 무슨 일 있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말했다.


"있잖아. 엄마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1등을 한 적이 있어. 근데 그 때 할머니가 엄마한테 별로 칭찬을 안해주셨거든. 그게 아직도 섭섭하더라구. 그래서 그 때 못 받은 축하를 너희들이랑 아빠한테 받고 싶은데 엄마 축하해 줄 수 있니?".


이 쌩뚱 맞은 아내의 말에 눈치 빠른 남편이 초를 켜고 노래를 불렀다.


"전교 1등 축하합니다~전교 1등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엄마의 전교 1등 축하합니다!!".


아들과 딸도 아빠를 따라 노래를 불렀다. 그 축하를 받으며...주책 맞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들 앞에서 펑펑... 아들도 갑자기 자기도 독서골든벨을 울렸던 일에 대해 지금 축하 받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독서 골든벨 축하합니다~~독서 골든벨 축하합니다~~". 남편도, 딸도 이전에 받지 못했던 축하를 받았다.


그 때 나는 알았다. 과거에 받지 못한 축하를, 지금 받아도 유효하다는 것을. 그리고 영원히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할 것만 같아 나는 내 존재 자체를 수치스러워했다는 것을. 나의 수치는 남편과 아이들의 사랑으로 덮였다. 그 때의 가슴 뜨거운 축하는 과거의 그 상처에서 나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아들이 그 때의 나와 똑같은 중2의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다. 아들에게는 나의 수치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내 깊은 곳의 수치감이 작동해서 아들에게 수치감을 주려할 때, 아들이 나에게 준 뜨거운 축하를 기억하고 싶다.


이 리뷰를 쓰며 이 공간에서 독자님들에게 나의 수치심을 드러내는 용기를 냈다. 올릴까 말까 망설이게 되지만 누군가 한 명에게라도 울림이 있길 바라며 용기를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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