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음 Jul 25. 2022

엄마의 자기애에 대하여

feat. 엄마의 해방일지


날 추앙해요.
나는 한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돼.
날 추앙해요.


저는 한동안 <나의 해방일지>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날 추앙하라는 미정의 말이 어떻게 들리시나요? 애정 결핍으로 사랑에 구걸하는 이상한 여자의 헛소리 정도로 들리시나요?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정은 타인을 깊이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하고 의젓한 캐릭터입니다. 이런 대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죠. 그런 미정이 왜 알콜중독인 구씨에게 사랑도 아닌, 추앙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걸까요. 여러 심리학 이론이 있지만 저는 하인츠 코헛의 <자기심리학>의 시선으로 미정을 이해해 보려 합니다. 그 관점으로 본다면 미정의 추앙 요구는 인간의 깊은 ‘자기애’적 요구라 볼 수 있습니다.


‘자기애’ 란...


그러면 미정이 나르시스트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자기애(narcissism)에 대한 유래부터 살펴볼께요. 자기애는 고대의 나르수스 신화에서 유래합니다. 물에 비친 자신과 사랑에 빠진 나르수스.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 채 오직 자신과만 사랑에 빠진 나르수스는 물 속에 비친 자신만 쳐다보다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자기애(나르시즘)"은 나르수스 신화에서 유래되긴 했지만 심리학 이론에 따라 해석과 처방이 다릅니다.


출처: '나르수스' 신화. 위키백과


정신분석이론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sexual instinct)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에너지라 생각했어요. 그 에너지를 ‘리비도(libido)’라 불렀는데 인간의 리비도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향하다가 성장하면서 타인을 향한다고 봤죠. 이 때 타인을 향해야 할 리비도가 외부 환경에서 좌절이나 상처를 받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에게 향해야 할 리비도를 철수하여 다시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된다고 해석했어요. 이런 사람은 자기애적인 사람이 된다고 봤습니다. 즉 프로이트는 자기애를 미숙하고 심리적 퇴보, 병리적 현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자라면서는 포기해야 할 욕구로 바라본 것이죠.


그러나 프로이트의 자기애에 대한 관점을 비판하며 자기애를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한 정신과의사가 있었습니다.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자기애에 대한 관점을 프로이트와 다르게 해석했어요. '인간은 언제 가장 행복할까요?' 라는 질문에 코헛은 유아가 엄마와 하나를 이루었던 그 시기가 완벽하게 행복한 상태였을 것이라 가정했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깊은 무의식에서는 성인이 되더라도 완벽한 ‘나’, 완벽한 ‘엄마’와의 하나됨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죠. 코헛은 엄마와 하나로 연결된, 완벽하게 행복한 '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욕구를 ‘자기애’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평생 지속된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애적 욕구는 포기되거나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건강한 형태로 변형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라 봤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발전한 심리학이 하인츠 코헛의 <자기심리학>입니다.




자기애적인 시대, 자기애적인 부모와 아이들


현대는 자기애적 시대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애적 욕구가 정당화되며 오히려 잘 활용하는 자가 살아남는, 어쩌면 자기애가 과잉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많은 분들이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을 ‘나르’라고 호칭하며 이들에 대한 콘텐츠도 지속적으로 쏟아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나르시스트를 구별하는 법, 나르시스트에게 대응하는 법, 나르시스트 다루는 법... 그런데 일부 콘텐츠들은 나르시스트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취급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자기애성 성격장애에 해당될 정도로 자기애가 병리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자기애적 욕구가 있다는 차원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애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코헛에 따르면 자기애는 평생 건강하게 발달시켜야 하는 욕구이지 배제되어야 할 욕구는 더더욱 아니지요. 철저하게 나르시스트를 구별시키는 콘텐츠야말로 오히려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질 수 있는 자기애적 콘텐츠는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리적 자기애의 대표적 특징은 자신이 자기애적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니까요.


미정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볼까요? 미정은 경기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3남매 중 막내로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부모님의 농사일도 돕고, 언니, 오빠에게도 늘 양보하고 배려하며 살아왔던 착한 미정. 부모님의 무뚝뚝한 성정으로 보아 미정은 유아의 자연스러운 자기애적 욕구마저도 충족되지 못한 채 성숙함을 요구받고 자랐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뭘 해도 예쁘고 최고라 여김 받는 어린 시절을 보내진 못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다보니 미정은 자기애적 욕구를 꼭꼭 숨기고 억압해야 했을 겁니다. 성인이 되어 만난 남자친구들은 모두 개새끼. 왜 개새끼였을까요? 미정은 그들에게도 부모님을 대하듯 자신의 욕구는 외면한 채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랑을 했습니다. 사랑도 주고, 돈도 주고. 그러다 더 이상은 자신을 이렇게 대우하는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오게 됩니다. 알콜 중독으로 겨우 겨우 삶을 이어가는 구씨는 미정이나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요구도 기대도 없습니다. 미정은 그런 그에게 꼭꼭 억압해 두었던 자기애적 욕구를 처음으로 드러냅니다. 추앙해 달라고, 사랑으로는 부족하다고, 나도 사실은 가득 채워지고 싶다고 말입니다. 다른 이들을 채워주는 삶을 살았던 미정이 한 말이기에 추앙해달라는 그녀의 요구는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우리의 자기애적 욕구와도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추앙 열풍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자기애적 욕구에 대한 방증 아니었을까요.


p.s: 하인츠 코헛의 <자기심리학>과 대상관계이론의 관점에서 엄마들이 '나'를 마주볼 수 있는 콘텐츠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엄마들의 '자기애'에 대해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드시는지 댓글로 들려 주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 마주봄은 길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