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일

흔적 지우기

by 영s

그림도 그리고 미드도 보고. 영화도 계속 틀어두고 보냈다.

수술 이후 상태는 계속 날로 호전됐고. 날로 좋아졌다.


밖에 나갈 때는 보조기를 꼭 차지만, 목발은 어느 정도 들고만 다니고. 집 안에서는 간단한 무릎 보호대만 차고 걸어 다녔다.


방 청소를 오랜만에 했다.

숙이는 게 어렵다 보니 구석구석을 정리하는 것은 힘들어도 보이는 곳은 얼추 정리해두니, 여러모로 뇌에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수술 한지, 2주 하고도 며칠이 지난 이 시점. 오늘은 실밥을 풀러 간다.


오래간만에 아침 일찍 일어났다.

씻는 것부터 입는 것 까지 평소보다 확실히 더디고 오래 걸렸다.

여차 여차 준비를 마치고 다행히 운전이 가능해, 운전을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내 무릎이 다시 태어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병원에 들어섰다.

며칠이나 있었다고 병원에 들어서는데 낯이 익더라니, 진짜 꼭 고향에 온 것 같았다.

내가 태어난 산부인과에서도 못 느낄 느낌을 느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목발은 대충 짚으면서 엑스레이와 피검사를 하고 의사 선생님을 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의 미션은 '걸어도 돼요?'였다.


사실 남 모를 불안감도 며칠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실밥에 대한 것이었다.

아플 것 같았다. 더 정밀히 말하자면 많이 따가울 것 같았다. 아픈 것 보다 따가운게 싫었다.

수술 후 선생님이 처음 드레싱 하실 때, 눈앞에서 스테이플러를 수술 자국에 찍으셨을 때의 그 파퀴아오의 펀치 같은 따가움이 아직 현존해 있었다.


석고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안에 간호사 분 께서 들어와 앉아 계시라 했다.

수술 부위를 다 까고 누워있었다.

평소보다 진료 인원이 있던 탓에, 대기가 길어졌다.

천장을 보는데. 올드보이의 대사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오달수 배우가 맡았던 역이 했던 대사다. '상상을 하지 말아 봐, 존나게 강해질 수 있어~'

나긋나긋하고 특유의 재치 있는 대사 처리로 인상에 남은 대사 인지, 내 상황에 너무나 맞아떨어져서 뇌리에 맴도는지 모르겠지만. 자꾸 실밥, 아니 사실은 스테이플러에 대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상상력은 인간을 공포감과 위기감으로 몰고 갔다.

물론 상상이 발달된 덕에 인류가 원시 시대 때부터 온갖 외부의 적의 공격으로부터 예측하고 벗어났겠지만, 요즘 같이 다양한 공포감으로 조성된 시대에 이런 개인적인 공포감이 더해지니, 꽤나 위축되는 시점이었다.


천장을 보고 있는 내 모습에서 그 상상들이 보였나.

문득 석고실 간호사 분 께서 내게 말을 거시는데


'아플 까 봐 걱정돼요?'

'예 바짝 쫄아서 왔습니다.'

'에이, 하나도 안 아파요. 진짜로'


내 표정에서 드러난 건지, 아님 내 머리 위로 형상들이 떠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알고 먼저 말을 해주셨다. 이미 상상에 도취된 나는 '정말 안 아플까' 싶다가 이렇게 바짝 긴장하고 졸아줘야 막상 닥쳤을 때, 하나도 안 아프니 그대로 두자고 혼자 합의를 해버렸다. 그리고 오신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며 일어나서 경과를 들었다.


'수술 너무 잘 됐고 자리도 잘 잡고 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재활이 정말 중요하고, 허벅지 근육이 빠진 것을 다 채워야 다시 운동도 하고 평소처럼 지낼 수 있다. 각도는 다음 주부터 굽히는 연습을 해서 90도까지만 만들어와라. 나는 천천히 재활하는 것을 추천하기에, 천천히 해라.'

온갖 긍정적인 말들을 사이사이에, '예, 아이고, 감사합니다.'만 연발하다 선생님 말씀 끝에

'근데 걸어지는데 걸어도 될까요?'

미션을 꺼내 들었다.


잠시의 고민도 없이 '그럼요. 걸어요. 연골 다친 게 아니니까, 세게 딛고 발 끌고 다니지 말고 목발도 사실 서는데 도움이 되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조심하게끔 한쪽만 관상용으로 들고 다니고 자주 걸어라, 대신 보조기는 차고. 힘이 빠지면 무릎이 주저 않기 때문에 보조기만 잘 차면 된다.' 하셨다.



나는 이제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언제 언제 다시 보자고 하고 퇴장하신 선생님 뒤로, 드디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점이 왔다.


'그래도 안 보는 게 낫겠죠?'


참 겁쟁이 같은 말을 또 건넸다.

십자인대가 빠져도 안 아프다고 돌아다니고 발목이 돌아가도 그냥 축구하고 다니고 평소에 고통이란 고통은 너무 잘 참아서 문제였지만 이상하게 그 스테이플러에 대한 공포심을 계속 나를 따갑게 억눌렀다.


'아 진짜 안 아프다니까요' 하고 웃으시면서 '자 제거할게요'

'여기만 살짝 따끔해요'


그냥 샤프로 다리를 한 두 번 누르는 느낌?

진짜 안 아팠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안 아팠다.

십자인대 카페 어디에서, '벌에 쏘이는 거 같아요.' '소리 안 치니까 선생님이 정신력이 되게 좋다고 하셨어요' 등의 문장들이 참 덧없이 느껴졌다.

역시. 인간이 사실 상상력이 없으면 아주 많이 강해질 수 있었다.


'정말 안 아프네요. 잘 떼주셔서 그런가. 여하튼 감사합니다.'


걸어 나온 병원에서부터

이제 수술의 흔적들을 하나 씩 지우러 간다.

다시 일상으로, 그리고 운동장으로.


다음 주부터는 재활병원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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