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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ler Nov 29. 2021

내 허영의 변천사

 

나는 예쁘고 무용한 것을 좋아하는 부류다. 패셔너블한 외모가 아니지만 패션에도 관심이 많다. 아마도 모계 유전인 듯한데 멋쟁이 친정엄마는 세일 기간에 달려가도 세일에 해당되지 않는 신상만 쏙쏙 골라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시즌 유행 포인트를 절묘하게 집어냈다. (패션 잡지 하나 보지 않는데도!) 그러나 사실 우리 집안 형편은 백화점 VIP급은 아니었기에 엄마는 타고난 눈썰미와 적당히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구매 판단으로 딸들이 그냥 강남 한 복판에서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고 그냥 묻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센스와 딱 월급쟁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로의 씀씀이를 물려주셨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독립하고 나서도 가끔 부모님 찬스도 쓰고, 출장도 다니면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라며(훗!) 소위 명품 브랜드도 하나씩 사보기도 했다. 국내 일반 유통경로로 수입되지 않거나 흔하지 않은 해외 브랜드를 아는 척하는 허세가 가끔 끼어있기도 했고, 회사 동료들이 새로 산 가방이나 코트에 감탄이나 칭찬 한 마디씩 하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잠시 음악이나 문학에 빠져 지식의 허영에도 빠져본다.  남들은 몰라보는 천재 뮤지션을 발굴한 양 신인 가수를 혼자 좋아하다가 그/그녀가 뜨면 다시 시들해지기도 하고, 혹은 내가 키운 양 무명시절 이야기를 하기도 

내용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들고 다닌 책은 또 몇 권인가.  


결혼과 출산준비 이야기도 들은 것은 많지만 당시 나에겐 공주 드레스와 가구, 이불과 기저귀는 관심 밖이었던지라 지금의 내 또래였던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함께 성의껏 준비해 주신 것은 비밀도 아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너무 무덤덤하게 보낸 것 같긴 하지만 두 분 덕분에 후회 없이 감사하다. 서투른 내가 나서봤자 더 잘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면 미혼들은 모르는 또 다른 명품 브랜드와 딱히 없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예쁜 아이템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출산과 육아로 지친 엄마에게 유모차와 기저귀 가방은 중요한 액세서리가 된다. 카시트부터 침투성이일 뿐인 치발기까지, 하늘의 달이라도 따주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안전과 건강에 필요하다는 명분이 더해지면 젊은 부모는 돈 쓸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다. 하지만 그 이켠에는 내가 끌고 들고 안고 다니는 아이템을 고르는 마음이 병행된다. 잠시나마 퍼와 실크, 반지와 미니백을 포기했지 않은가. 내 몸과 마음을 위로해줄 아이템들이 필요했다. 식탁의자가 유럽산 오크로 만든 건지, 굿 디자인을 획득했는지, MDF인지 아이야 알게 뭐람, 밥만 맛있으면 되지. 하지만 내 사진첩에는 남는다구. 


인형놀이 못지않은 시절이 지나 유치원을 보낼 때가 되면 이제 조금 다른 허영의 경쟁이 시작된다. 주변에서 어느 집 아이가 엄청 똘똘한데 어디 다닌다더라 어디가 좋다더라는 말이 귀에 와서 꽂힌다. 이젠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오감 발달을 위한 예체능도 필요하고, 한글과 영어를 깨치고, 셈 정도는 척척 해내는 아이들이 왜 이리 많은가. 내 아이도 보내고 싶은 유치원이 생긴다. 

그러고 나서 사립초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한차례 열병처럼 앓고 나면, 이제 학원 쇼핑에 뛰어들 차례다. 유치원과 달리 고만고만한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달라 보이는 것은 결국 어느 학원을 다니는 가였다.   


고백한다. 나는 이 시기에 초심을 잃었다. 수많은 유아 사교육 아이템과 유아 명품들에도 혹하지 않았는데, 학원을 선택하면서 주변의 분위기와 말에 휩쓸려 버렸다. 엄마가 옛날부터 뭘 하든 뭘 사든 안목은 유지하되 탐내지 말고, 무리하지 말랬는데...

워킹맘 주제에 1) 사전 준비를 해서 시험 잘 본 아이들만 갈 수 있다는 2) 셔틀버스도 없는 학원에 발을 들였다. 


아이는 레벨테스트를 통과했고 나는 좀 우쭐해졌다. 크고 무거운 원서 교재를 보고도 아이가 그 정도 실력인가 보다며 뿌듯해했고, 밤 시간 수업도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다들 그렇게 보낸다고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는 왜 학원을 다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키지 않는다는 사인을 보내는데도 남들은 여기 테스트 통과하려 과외도 한다는데 아깝다며 꾸역꾸역 보냈다. 


무언가 개운하지 않고 찜찜하던 차에 그 학원을 끊은 계기는, 아니 핑계는 두 가지였다. 

짧은 저녁 시간에 주로 하는 대화가 학원 숙제 독촉과 확인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과 한국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가 미국 인디언의 역사와 틴에이저용 소설을 읽는 이유를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영어는 유창했지만 감성은 없었다.  나는 또다시 내 마음대로 그만 다니자고 아이에게 제안했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행복한 웃음을 지었지만 사실 나는 좀 아쉬운 기분도 들었고, 이래도 되나 하는 불안감도 들었다. 특히 동네 엄마에게 학원 쉰다고 이야기할 때, 그러면 안된다고 무슨 일이냐고 호들갑 떠는 그녀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을 때 더더욱. 그렇다면 나는 여기를 왜 보낸 것이었을까. 


여전히 유명한 그 영어학원을 끊으면 무슨 큰일이 날 것만 같았던 엄마의 조바심을 뒤로하고, 아이는 무탈하게 크는 중이다. 학원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우리 애 어디 다녀요 라는 말을 하기 위한 선택이 아닌, 아이가 필요로 하는 선택을 하고자 한다. 


그런데 또다시 나의 허영심을 들쑤시는 주변의 조언(?)에 아이에게 바람을 잡으며 여기저기 뒤적여보는 중이다.


얘, 특목고나 자사고 생각 없니? 


재능 있는 아이를 무심하고 게으른 엄마가 - 특히 워킹맘은 이런 자학이 과하다 -  방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다시 조바심이 난다. 아이의 성향에 맞을 것 같기도 하고,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하면 될 것도 같은데 (대부분의 엄마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이자 착각이다), 대학입시에 대한 방향도 잡을 수 있도록 엄마가 이끌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또다시, 거기에 조금은 '내' 아이가 좋은 학교 다니면 좋겠다 라는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오롯이 아이만을 위한 최선을 찾는 겸손한 마음은 안 되는 것일까. 


아참, 내 출근룩은 예전 같지 않다. 젊은 후배들의 부러움 섞인 관심을 받은 지도 이미 오래이고, 20년 전 보았던 중년 선배 워킹맘들이 그랬듯이, 핫한 브랜드보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스타일로 유지 중이다.  

그리고 이제... 아이에게 작아진 김밥 패딩에 슬쩍 팔을 끼워본다. 백화점 오픈런은 안 가고 못가도 학원 등록 오픈런에  줄 설 때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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