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용선생, 사회과부도와 마법천자문

by Abler

모든 아들 딸을 정의하는 글은 아닙니다.

그냥 어느 한 집의 엄마와 아들 이야기 사례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대단히 여성스러운 성격은 아니지만 남자아이를 키우는 것은 이게 맞나? 왜 이러지? 등등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크게 번잡하거나 목소리가 크지 않고 유순한 아이긴 했지만 엄마가 '상식으로만 알고 있던' 남자아이의 속성을 그대로 따라가는 아들. 역시 책과 미디어에서 알게 되는 지식과 현장은 다르다. 가능한 한 아이를 내 기준에 가두기는 싫어서 맞춰보려 했지만 정말 모든 것은 엄마의 취향과 관심에 맞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엄마는 예쁜 그림책들을 사서 같이 읽고 싶었지만

아들은 글자놀이 장난감을 가지고 조합하길 좋아했다.


엄마는 다양한 색의 플레이도우를 사서 오밀조밀 과일을 만들어보려 했지만

아들은 은하계 행성들을 만들어 줄을 세웠다.


엄마는 하교 때마다 바지주머니에서 쏟아지는 모래에 질겁을 했지만

아들은 운동장 모래 파는 것을 좋아했다.


모든 자동차와 중장비를 섭렵한 후, 아들은 레고의 세계에 눈을 떴다.

선물하기는 편했지만 (개인의 컬렉션 취향이 생긴 후로는 더 어려워진 부분도 있다) 부모들의 애증을 먹고 자라난 레고.


그리고 책이라고는 용선생 한국사와 세계사.

중학교 내내 끼고 살던 책은 사회과부도와 야밤의 공대생 만화, 그리고 완결은 되었는지 아직도 모를 끝없는 마법 천자문이 다였다.


문학전집은 네버네버네버!

아니 소설이 훨씬 재미있구만!


하지만 초기 학습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이가 집에서 자연스럽게 한글도 떼고 알파벳도 익힌 데에다, 역사와 지도를 좋아하기에 문과성향이라고 착각을 단단히 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지나면서 그냥 내가 인정하고 마음을 바꿨다. 점점 수과학에 관심을 보임과 동시에 언어 과목으로부터는 도망 다니는 게 너무나 선명했으므로.



이렇게 성장한 아이는 고3을 앞두고 기다렸다는 듯 선포했다.

난 언어와 매체, 기하, 과학탐구2 과목 2개 선택할 거야


언어와 매체는 이과 대다수가 선택하는 과목이니 그렇다 치자. (사실 대세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기하? 과탐2 2개?


이미 언매+미적은 기본, 한 해가 다르게 사탐런도 거의 필수가 되다시피 하는 상황에 이 아이는 왜 이러는 걸까 싶었지만 사실 아이는 지속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제야 경험의 조각들이 맞물려 돌아갔다.

레고, 우주, 자동차 모두 기하와 물리가 중요했고

사회과 부도, 모래파기, 역사들도 빅히스토리를 이해하는 근간이었고

한글, 영어, 한자 모두 언어의 구조와 조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 뿐이었다.

그래, 네가 이과라는 건 알았어.

하지만 입시는 현실이고, 원하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선 입시의 관문을 지나야 할 것 아닌가.

남들이 다 말하는 전략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가야 할까?

불안한 마음에 재차 물어도, 아이는 점수와 상관없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대치동 설명회에서는 현역이 아직 쓴 맛을 못 봐서 그렇다며 급하면 다 바꾸게 되어있다는데.


여기서 나는 아들의 중요한 3대 요소

자존심, 재미, 폼(이라고 쓰고 가오라고 읽는다)


이 세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과 반박을 하더라도 먹히지 않는 사춘기 소년들의 필수품.


'입시에 유리한' 선택과목은 필요 없었다.

'재미있고 폼나는' 과목이 중요했고 원하는 학교 진학을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존심과 자신감으로 직진하기를 택한 아들.

이번에도 엄마의 기준과 다른 선택을 믿어줄 수 밖에.

1년 동안 모의고사 볼 때마다 마음이 오락가락하면서 수능결과를 받을 때까지 조마조마했던 건 어쩔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잘 마무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아들을 포함하여 2026년 수능 기하 선택자 비율은 전국 3.1%이었다.

2026년 수능 총 응시자 약 50명 중 과탐2의 4과목 선택자들은 각 과목당 5천 명 전후였다. 탐구선택 2과목을 모두 과탐2를 선택한 응시자는 수치조차 없다.



입시를 경험해 보니 - 선택자가 적은 과목이 불리한 이유

기하는 과목 성격상 암기학습으로 넘기 어려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호불호를 많이 탄다. 태생적으로 공간감각 같은 것이 좋거나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 길러진 경우엔 의외로 수월하게 풀리기도 하는데 단순히 한번 해보겠다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에는 입시에 도움이 되는 과목은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기하는 1. 개설된 사교육이 거의 없어서 도움받기가 어렵고 2. 응시 인원이 적으니 상대평가에 유리하지 않다. 3. 그리고 수능 기하를 준비하면 미적분이 중심인 논술대비는 매우 불리해진다. 4. 게다가 현역의 경우 상대평가인 미적내신과 수능기하 준비를 병행하는 건 자충수가 될 수 있다.


과학탐구 투과목들은 다들 알다시피 어렵고 시간과 노력투입도 많이 필요하한데 대체과목 (과학탐구1 혹은 사회탐구 과목들)이 많으니 서울대나 일부 메디컬 지원자가 아니라면 굳이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도 사실이라 점점 응시인원이 줄어들고 있었다. 너무 외면당하는 것이 불쌍해서인지, 내년엔 좀 지원하라는 격려인지 (이 선택과목들은 내년이 마지막인데 굳이) 2026년 난이도를 쉽게 조정했는데 결국 표준점수는 급하락 하고 사회탐구보다 더 표준점수가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2026년 수능 예를 들면, 물리2를 다 맞은 학생이 생활과 윤리 다 맞은 학생보다 수능 성적표 점수(=표준 점수)가 낮다.



알고 계셨나요? - 수능 성적표에는 내 점수가 없어요!

모의고사들과 달리 수능성적표를 받아보면 당황스러운 것이 원점수는 없고, 과목별 표준점수, 백분위, 등급만 표기되어 있다.

원점수 : 100점 만점으로 (혹은 50점 만점에) 채점해서 내가 받는 원래 점수 - 정시지원에 필요 없고 성적표에 표기되지도 않음.

표준점수 : 전체 원점수의 평균을 100으로 두고 내 점수와의 차이를 계산해서 내는 점수 - 이제 외워야 하는 중요한 내 수능 점수

백분위 : 내 표준점수보다 낮은 수험생 수의 비율 - 정시지원에 반영

정시지원 시에는 표준점수와 백분위를 기반으로 각 대학이 요구하는 가산점 및 변환점수 등을 반영하여 계산한 환산점수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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