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종로(4)
종각역에 갈 일이 있으면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내린다. 종로에 머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어서 시작한 꼼수가 어느새 나의 루틴이 되어버렸다. 역에서 나와서 하는 일이라곤, 새로 오픈한 가게가 있는지, 어느 가게에 사람이 붐비고, 어디가 비는지 살피며 덤으로 인테리어는 어떤지, 메뉴 구성은 괜찮은지, 가격대는 적당한지 훈수를 두는 맛으로 거리는 누비는 것은 나의 취미다. 그렇다 난 자칭 '거리 평론가'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은 의견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난 취미생활에 몰두하며 길을 걷고 있었다.
"아! 이 자리에 이게 들어왔구나, 전보단 낫다"
"와, 여기는 아직 살아있어? 볼 때마다 안 망하는 게 신기하다니까."
"이 메뉴면 1층이 아니라 2층이 나을 텐데.."
나만의 주관적인 평가 시트에 맞춰 평가질(?)을 하던 중, 마침 그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제 여기도 재개발되나 보네. 예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뀌는구나..."
그곳은 종각역 YMCA옆 '민들레 영토'가 위치한 골목이었다. 그 골목에는 원래 3층짜리 건물이 있었는데, 재개발로 몇 년 전부터 공사 중이긴 했었다. 새삼 이렇게 높은 건물이 올라가는 것을 보니, 정말 바뀌긴 바뀌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 기억 속 그 골목의 풍경이 더 이상 나를 반겨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시원섭섭하기도 했다. 사실 이 골목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이곳이 종로에서의 나의 모든 여정이 시작된 지점이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골목은 내게 의미가 있었다.
2007년은 한국 취업 역사에 있어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삼성, LG, 현대 등 대기업들이 일제히 토익 점수를 채용 필수 조건으로 내걸기 시작한 것이다. 전국의 취준생들에게 토익은 이제 선택이 아닌 취업 경쟁에서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되었고, 그 결과 2010년 기준 한국 토익 응시자 수는 약 220만 명으로 전 세계 1위 토익 소비 국가가 되고 만다.
그런데 왜 하필 토익이었을까? 토플이나 텝스는 유학이나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시험으로 영어 좀 친다는 실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응시료도 비쌌고, 말하기, 듣기, 쓰기 등 다양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준비 시간도 길고 웬만한 실력으로는 만족할 만한 점수를 낼 수 없었다.
반면 토익은 달랐다. 문법과 리스닝에 치중된 객관식 시험이라 영어를 못해도 패턴과 스킬만 익히면 어느 정도 점수를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응시료도 저렴하고 매달 응시할 수 있어서, 방학 때 점수가 필요한 취준생에게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를 노린 학원가에서는 '2개월이면 700점 달성 보장'이라는 매력적인 광고를 내걸며 학생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실제로 영어로 한 문장도 말하지 못하는 학생도 문법 공식을 외우고 리스닝 패턴을 연습했더니 2달 만에 700점을 넘겼다는 성공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들리기 시작했고, 영어를 포기한 취준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토익학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2007년 대학교 1학년 첫여름방학, 나 역시 토익 열풍에 합류했다. 물론 취업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방학 동안 놀기만 하면 돈만 많이 쓸 테니, 돈도 아끼면서 시간을 보낼 적당한 방법을 찾다, 토익학원이 딱 맞아떨어졌다. 게다가 학원비는 엄마 카드를 당당하게 쓸 수 있었기에, 부모님께도 당당하고 시간도 의미 있게 때울 수 있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내 첫 토익학원은 종각역 YMCA 근처 골목 안쪽에 위치했다. 학원 이름과 위치가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YMCA의 옆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던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원래 학원이 아닌데, 토익 열풍에 편승해 급조된 간이 학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교실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쓰지 않았을 법한 작은 책상에 50여 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양쪽 벽의 선풍기 두 대와 맨 뒤 에어컨 한 대로는 토익에 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학생들의 열기를 식히기에 역부족이었다. 얼마나 가까이 앉았던지, 채점할 때 옆 사람이 틀린 문제에도 은근슬쩍 동그라미 치는 손놀림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 답답하고 찜통 같은 곳에서 RC와 LC 수업을 2시간 가까이 들었다. 학원은 수업 후에도 학생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저녁에만 장사하는 호프집을 낮 시간대에 임대해 조별 스터디를 운영했다. 조교가 관리했는데, 그 조교 역시 지방에서 높은 토익 점수를 위해 서울로 상경해 학원 근처에서 자취하며 약간의 월급을 받고 있다고 했다. 토익이 얼마나 과열되었는지 보여주는, 그 시대의 기이한 사회적 현상이었다.
스터디는 단순한 공부 모임 이상이었다.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단어를 외우며 문제 풀이를 함께하는 동시에, 각자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방학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목표 점수를 달성하려면 필수 코스였다. 더군다나 남녀 성비를 반반으로 편성한 스터디는 자연스럽게 끝나고 함께 밥을 먹기도 하고 가끔 맥주 한잔 하면서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서, 폭력적인 성비에 지친 나와 같은 공대생들에게는 여기는 그야말로 '삭막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그 결과 수업은 빠져도 스터디는 반드시 참석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난 아니고, 내 친구가 그랬다고 들었다)
스터디는 벌금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전날 외워온 단어를 테스트해서 몇 개 이상 틀리면 개당 100원씩, 숙제를 안 해오면 벌금 5백원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학교 1학년인 나에게 차비를 제외하면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기에, 덕분에 숙제를 안 해갈 수도, 단어를 안 외워갈 수도 없었다. 스터디에서 내가 가장 어렸고, 점수가 급하지도 않았지만 의도치 않게 가장 성실했던 이유도 바로 그 벌금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첫 회식은 함께 공부한 지 2주 정도 지나서였다. 간단히 치맥이나 하자는 큰 형님의 제안에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챙겨 나갔다. 맥주 한잔 하면서 본인 소개, 전공, 이성 친구 유무 등등 조금 더 심도 깊은 개인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스터디의 가장 맏형은 당시 스물여섯이었는데, 여자친구가 중국인 유학생이라고 했다. 인상적인 건 한쪽에만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저 나이에 아직도 귀걸이를 하네'라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지나고 나니 스물여섯이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은 나이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둘째는 인상 좋은 누님이었다. 전공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데, 영어 점수가 급한 것 같긴 한데 공부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부모 입장에서는 속은 터지는데 항상 밝고 긍정적이라서 뭐라고 못 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셋째는 스물한 살 누님이었다. 미모가 매우 출중한 누님이었는데,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안 됐고 아직 못 잊은 것 같았다. 전 남자 친구가 키가 매우 컸다며, 본인은 키 큰 남자가 좋다고 했다.
그리고 막내가 스무 인 나였다(뿌잉뿌잉). 시간 때우려 왔다고 하면 혼날 것 같아서, 카투사에 지원하려고 왔다고 얼버무렸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목표를 응원하며 기분 좋게 술잔을 모았다.
1차가 끝나고 2차로 바로 앞에 보이는 노래방에 갔다. 당시 난 얼떨결에 따라갔고, 심지어 큰 누님의 지시로 작은 누님과 듀엣까지 불렀다. 학교를 제외하면 처음 겪어보는 사회생활이었다. 백지였던 도화지에 사회생활이라는 청사진이 처음 그려진 경험이었다. 비교할 선택지가 없었기에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그 순간이 온전히 완벽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스터디 모임이란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우연히 같은 버스를 타게 된 개인들의 모임이다. 언제든지 내릴 수 있고, '스탑' 버튼을 누르고 중도 하차도 가능한, 소속감도 동료의식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엉성한 모임말이다. 저마다 버스에 몸을 싣고, 계속되는 출발과 정지 속에서 낙오되지 않고 스스로의 중심을 잡기 위해선 손잡이를 있는 힘껏 쥐고 가는 것 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인 연약한 존재들. 당시의 우리가 바로 그랬다. 그런 우리들이 모인 스터디는 단어 그대로, '각자도생'이었기에, 서로의 목적지까지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다만 나의 목적 달성이 중요한 만큼 다른 이들의 그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다 같이 함께하는 그 순간을 충실하게 참여하며, 틀린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각자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막연하기만 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려 앞이 보이지 않고, 취업의 불확실성에 방황하며 헤매었던 시절, 그러한 시련이 오롯이 나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나에게만 유독 고통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바로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령 그것이 일시적인 관계일지라도, 스터디는 그 자체로 충만해져 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나의 추억은 무더운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뜨겁고 진실해졌다.
당시 우리들의 표정에는 미래의 암울함보다는 희망이, 좌절보다는 해보겠다는 의지가 더 끓어올랐다. 누구 하나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었음에도, 누구도 부정적이거나 열정적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체… 무엇이 당시의 우리를 그리 밝게 만든 것일까?
희망...이었을까?
본인의 결정을 신뢰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미래를 꿈꾸며 꾸준히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든든한 동력.
비록 벌금 100원이 아까운 빈털일지라도 언젠가는 가격 신경 안 쓰고 점심 메뉴를 고를 수 있는 날이 올 거라는 설레는 기대.
찜통 같이 덥고 좁은 토익 교실에서 벗어나 언젠가 종로에 있는 멋진 회사에 취업하여 내 전용 책상에서 해외 업체와 멋지게 영어로 대화하는 기분 좋은 상상.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앞으로의 미래가 막연하고 불안으로 가득했기에 비로소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희망만큼은 당시 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꿈꿀 수 있고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 그것은 '희망'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5년도 넘게 흘렀다. 빨리 감기를 해보자.
난 첫 토익 시험에서 원하는 70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았지만 카투사에는 가지 못했다.
난 공대생치고는 높은 토익 점수를 어필하여 첫 직장으로 종로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였고, 이제는 점심 메뉴 정도는 가격 생각하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난 직무 특성상 해외 업체와 연락할 기회가 많아서 메일이나 비디오를 통해 안건을 협의하고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하는 일을 맡고 있다.
지금의 나는 과거 내가 꿈꿔왔던 나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지만, 많은 부분 실현해 낸 것 같기도 하다.
표면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30대 후반이 된 현실의 나의 일상은 조금 다르다
퇴근 후 집에 가서 딸과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것으로 나의 모든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자기 전까지 유튜브만 하면서 삶의 목적을 망각하고 수단에 취해 본연의 나를 외면하고 있다.
괜찮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옆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보면 이미 내 10년, 20년 뒤의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 것 같아 숨이 막혀온다. 직장인이면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이내 순응하면서 말이다.
긍정적인 마음만 있으면 상처 따위는 언제든지 털어버리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시절을 되려 '철없다'라고 치부하며, 지금의 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능력치를 가늠하고 리스크가 적은 쪽에, 좀 더 안전한 쪽에 패를 던지는 삶에 익숙해졌다.
퍼즐을 시작하기 전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퍼즐이 하나씩 완성되어 갈수록, 남은 퍼즐이 점점 줄어들수록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가는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
종각역 YMCA 옆 골목길을 지나갈 때면 스무 살의 나를 마주한다.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겁 없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며, 네가 상상했던 모습과 달라 실망할 수도 있으니 외면하려다가도 이내 고개를 들고 마주해 본다. 머쓱하기도 부끄럽기도 하다.
'지금에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
"나, 열심히 해왔는데... 최선을 다 했는데…. 네가 상상했던 모습과 다를 수도 있어. 근데 뭐 어쩌겠어. 이게 나인데!!
'20대의 내'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거봐, 역시 넌 잘할 줄 알았다니까. 난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
재개발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
내 추억 속 토익학원도 4층 건물도 호프집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스무 살, 희망에 가득 찬 뜨거웠던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
30대 후반의 오늘의 난 다시금 희망을 얻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