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정상(頂上) 일기 (My Abnormal Diary)
최근에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책장에서 그 책이 내 눈에 띄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책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다.
'이 사진을 보고 과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난 아직 만 3살인 우리 집에서 가장 순수한 딸에게 묻는다.
"딸, 이 사진이 뭔 거 같아?"
딸이 대답했다. "모자!"
살짝 당황한 나는 질문을 이어 나간다. "다른 거 보이는 건 없어? 코끼리라던지....."
딸이 답한다. "없어. 아~! 달걀이 보여 히히."
그동안 저 사진을 보면서 '난 왜 저게 보아뱀으로 보이지 않을까' 자책하며, 나도 이제 영락없이 '때 묻은 어른'이 되었구나 싶어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 딸도 이것이 보아뱀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딸과 같은 나이였을 때, 저 그림을 봤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가만있자~~ 내가 3살이었으면… 어디 보자~~
.....!!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당시의 기억이라고는 늘어난 비디오테이프 마냥, 희미한 잔상만 어른거릴 뿐, 그게 언제, 어디였는지 명확하지가 않다.
왜일까?
이유를 찾아보니, 기억 저장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는 4세 이전에는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 기억을 온전히 저장하기 어렵고, 해마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전의 기억을 제거하고 새 기억을 저장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유아기 기억상실증'의 주된 생물학적 원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로는, 언어발달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는 영유아의 경우, 발달 기억을 언어로 구조화할 능력이 부족하여, 기억 저장 및 인출이 어렵다는 것이다.
설명이 조금 길어졌는데, 원인을 종합해 보면, '인간은 원래 그렇게 설계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유아기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은 그렇게 설계된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겠.으.나...
궁금하다. '굳이 이렇게 설계된 의도가 뭐였을까?'
누군가 그 시절의 기억과 다시 접촉하는 걸 의도적으로 차단했을 수도 있다. 왜지? 또는 어딘가에 숨겨놓고 특정 조건에서 일정 기억만을 볼 수 있게끔 트릭을 부려놨을 수도 있다. 여튼간에, 왜 우리는 나의 기억을 간직하지 못하는 것일까? 내에겐 없는 나의 기억이라면 그 기억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우리 딸은 천방지축이다.
밥을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추고,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밤새도록 흥얼거린다. 어느 날은 옷을 홀랑 벗더니 "나는 아프리카인이다!"를 외치며 거실을 활보한다. 군것질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오늘도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대방 맛있다!' '무지무지 맛있는 아이스크림이다!'를 연신 외친다. 요즘 놀이터에 가면 그네 타기가 1순위다. 아빠가 손잡이를 잡고 하늘 높이까지 올려 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요즘 딸을 보고 있으면 잊혔던 기억들이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동네를 발가벗고 뛰어다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집까지 데려다주셨던 때의 아쉬운 흥분, 아빠가 밤에 놀이터에서 그네를 하늘 높이까지 밀어주던 순간의 즐거움, 엄마가 사과를 수저로 살살 긁어서 입에 넣어줬을 때의 시원 달콤함까지, 그동안 내 안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퍼즐 조각 맞춰지듯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순간, 나 역시 딸과 비슷한 시절의 '잊혀진 나'와 마주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유아기의 기억이 없는 건, 내 분신인 아이들을 통해 잊혀진 기억을 떠올려보라는 의도 아닐까? 부모는 아이를 통해 잊혀진 자신을 기억하고, 아이는 부모를 통해 언젠가 잊힐 자신을 보존한다. 이로써 생애 전 구간의 기억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도록 말이다.
잊혀진 기억은 사실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나를 낳아준 부모님의 기억 파편이고, 잊혀진 내 안의 순수이며, 나의 아이를 통해 비로소 발견되는 기억의 퍼즐인 것이다. 나로 인해 비롯되었으나 그것의 소유도, 접근도, 사용도 내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다면 그 기억은 본래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왠지,
'해마'나 '언어 체계'의 미성숙이라는 '합리적인 사실'로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놓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거 같다. 합리적 지식은 실재의 은유일 뿐 그것이 실재의 총체적 의미를 드러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난 이렇게 믿고 싶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남들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신경을 썼지,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이 정말 중요한 건지 모를 때가 많았다.
'계량화된 숫자'로 세상을 해석하고 '합리적 지식'으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어른들의 껍데기뿐인 대화엔 알맹이가 빠져있음을 느낀다.
진심을 숨기고 사회가 인정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자기 천성을 버리고 남이 원하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사는 삶에 지치고, 소비될 즈음,
그러나 인간의 마음 어딘가에 어린 왕자로 상징되는 순수성과 영혼이 깃들여 있다는 진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기 위해 가장 순수했던 그 시절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희미하게 설계한 것은 아닐까?
딸아이가 그네를 타며 웃을 때, 나는 딸을 통해 그동안 '닫혀있어 보지 못한 문'을 통해 나의 어린 왕자를 마주 한다. 어릴 적 아빠가 밤 놀이터에서 그네를 밀어주던 그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함박웃음을 짓던 그 시절의 나를.
딸이 밥을 먹다 일어나 춤을 출 때, 나는 사회화된 가면으로 억눌렀던 나의 숨은 자아를 발견한다. 딸이 발가벗고 거실을 누빌 때, 나는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던 철없던 그러나 자유로웠던 본연의 나와 마주한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감동하여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딸과는 반대로, 제조사와 성분, 가격을 먼저 확인하는 나를 발견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난,
기억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을 생각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한 어린 왕자의 말처럼, 우리 안 어딘가에 있을 유아기 시절의 기억은 그것을 발견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우리 인생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체 '원피스'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엔 숨겨져 있다는 사실 만으로 '대해적의 시대'는 그 자체로 낭만적이지 않는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기다림이었기에 그 여정이 설레었던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사막의 우물처럼 투명한 무엇인가가 내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어른이 되어 고통받는 나'에게 안식과 위로가 되어 준다.
다시, 그림을 본다.
애초에 보아뱀인지 모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어른이들이 만들어 놓는 강요된 정답일 테니. 무엇이든 내게 정말 중요한 무엇가를 찾았으면 한다. 물론 그것은 각자 다를 것이다.
난 우리 딸의 똥배가 보인다. 나에게 가장 소중해서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