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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나 Feb 24. 2024

김신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시간을 내서 행복해지기

- 어렸을 땐 방학이 시작될 때마다 생활계획표를 짰다. 어린 마음에도 나름 어느 정도의 '균형'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이만큼 놀고, 이만큼 공부, 틈틈이 심부름, 다시 이만큼 놀고⋯ 나의 즐거움을 챙기는 것과 생활을 돌보는 적당한 의무를 잊지 않던 나날. 그때처럼 시간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려면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언젠가부터 시간이 사라졌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다시 시간을 사길 반복했다. 내 역할의 책임감으로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시간을 바치기도 했다. 열심히 사는 삶은 좋은 것이라 배웠는데, 왜 그럴수록 내 삶은 소홀해지는 기분이 드는 걸까. 나를 이루었던 수많은 다정을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나중으로 밀어두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것들로 채워나갈 수 있을 텐데⋯'.


이 세상에서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건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한번 뿐인 삶을 더 기쁘게 사는 일일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는 '자율', 배워가며 더 나아진다 믿는 '성취', 마음 맞는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 '연결'을 토대로 기꺼이 삶의 여백을 선언한 이가 있다. 글은 김신지 작가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에 대한 독서 기록이다.



책에는 '직장을 그만두고 내 시간으로 삶을 채우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한 작가의 일상이 담겨있다. 엄마 아빠, 이사, 플랜 B, 밥솥, 산책 같은 일상을 소재로 작가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들려준다. 딱히 외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평범한 주변에 대한 경험과 기록. 삶의 여백에 앉은 작가는 이내 사소한 주변들이 '지금'을 살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인상깊었던 주제는 대단한 삶이 아니라도 쓰게 하는 순간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문학이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우리는 쓰고 싶어 지게 만드는 장면들을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니까. 그때마다 허둥대며 적당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더라도, 이 일을 기억하고 싶어 또는 어제보다 더 나아지고 싶어 기꺼이 책상 앞에 앉는다. 가끔이지만 용기와 열망을 주는 순간이 일상 속에 분명히 존재함을 알기에, 시간을 내고 정성을 들여 하루를 돌보고 싶은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도 쓰는 사람이라 더 공감 갔던 것 같다.


작가의 글을 읽을수록 우리의 일상은 흙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은 금세 바스러질 정도로 연약해 보이지만 쌓고 쌓다 보면 우리가 딛고 서있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다. 반복되고 당연한 것 같은 하루를 잘 음미하면 이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 믿는다. 하루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고 주변을 잊지 않는 일. 한줌 치의 여유를 준비해 둔다면, 꼭 직장을 그만두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할머니는 다시 보행 차 손잡이에 몸을 기댄 채 노을 지는 시골길을 걸어가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생각한다. 내가 배우고 싶은 삶이 이곳에 있다고. 강의실이나 도서관이나 방송국 조명 아래가 아니라 이 들판에, 산자락에 있다고. 어떤 마음이 너무 귀해서 미안해지는 건 그 속에서 내가 잊고 살던 '더 나은 것'을 보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내가 끝끝내 어떤 낙관을 향해 몸을 돌린다면 '믿게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란 걸 이제는 안다. 세상이 어때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보고 싶은 그 세상을 먼저 살아내면 된다는 것도.


- 빈 시간을 어떻게든 메우려고 하던 때를 지나, 이제 시간에 일부러라도 동그란 웅덩이를 만드는 시절에 접어든 게 좋다. 비로소 그런 걸 아는 나이가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다 문득 어떤 뒷모습을 떠올린다. 마당에서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을 곰곰이 바라보는 뒷모습. 소나기가 그친 이후, 거미줄에 맺힌 쌀알만 한 빗방울들을 세고 있는 뒷모습. 자주 멈춰 서서 자주 골똘해졌던 그 뒷모습이, 어린 시절의 나라는 걸 알아본다. (중략) 어제와 달라진 점을 찾고, 바라보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풍경을 느낀다. 이상하다. 멍의 시간을 갖는 것뿐인데 왜 다시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기분이 들까?


- 그걸 느낀 후로는 집안일이 더 이상 예전처럼 힘들거나 귀찮지 않다(물론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확실히 나아지는 세계가 그 안에 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고, 내가 하는 만큼 분명하게 나아지는 결과를 보는 것. 내 생활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데서 오는 자기 효능감도 느낀다. 돌보는 손길이 닿으면 집안의 어느 구석도 시들지 않는다.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그것만은 바뀌지 않는 진실이라는 게 다행스럽다.


- 그런 나에게도 알고보니 오랜 덕질 대상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을 붙잡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발에 쉽게 채는 것 같지만 실은 보거나 듣다 보면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야기잖아, 싶어지는 그런 이야기. 왜 누가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우리 삶이 닮았다는 걸, 거기의 당신이 무사한 걸 확인하려고 책을 펼치기라도 한 것처럼.



신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딱 두 문장이다. 하루치의 삶에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할 것. 동시에 결코 오늘의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말 것. 정착이란 단어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치열하게 살 수도 있는데 미지근하게 살까봐 겁나는 사람도 읽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퇴사를 하면 어떤 여유가 생길까 궁금해하는 사람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떠나는 행위가 도망이 되지 않을 때만이 눈앞의 풍경을 온전히 껴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퇴사 후 일상에 대한 글이지만 타인에게 미움을 뭍히지 않고, 스스로의 아픔에 취하지 않고, 느끼는 불안과 기쁨에 고민하는 솔직한 글이어서 너무 좋았다. 원래도 믿고 보는 작가기도 했지만 삶의 여백을 가진 작가의 새로운 글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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