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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나 Mar 03. 2024

임진아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나만 아는 쉬운 행복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을 뜻한다. 나는 언제나 그 방향을 내 힘으로 만들어 나름의 확신만을 지닌 채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 길의 끝에는 정답 따위 없고, 가는 길에 보이는 내 표정만이 의미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수집하다 보면 취향 비슷한 것이 생긴다. 이런 얕지가 취향이라고? 싶은 부끄러움도 있지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좋은 것들이 쌓이니 사소한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가끔가다 난 왜 이런가 싶은 멍청한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싶은 답답한 순간에도, 적어도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아이'라는 사실은 내가 괜찮게 살고 있다는 확신을 주니까.


더 나아가 취향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알고 있으면 행복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취향의 가치는 멋진 것을 나열할 때가 아니라, 스스로 좋았다 느낀 마음과 그 속에서 마주한 경험이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때 빛이 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취향을 동사로 바꿀 수 있다면 나만 아는 쉬운 행복에 언제든지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여기 자신의 취향을 동사로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글은 임진아 작가 <나 심은 데 나 자란다>에 대한 독서 기록이다. 


책은 소화 불량의 작가가 팥에게 바치는 복잡한 러브레터다. 팥이 든 다양한 음식을 두고 이건 좋고 이건 싫고를 얘기하고, 팥을 으깨는 정도에 대해서도 말한다. 특히 팥을 곁에 두며 자연스럽게 묻어 나온 그녀의 단상과 경험은 책의 메시지를 관통하기도 한다. 취향이 아니었다면 경험하지 못했을 소중한 이야기가 있으며,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떤 마음을 세상을 바라보았는지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글을 꼽자면 '둘리 호빵'과 '국화빵', '딸기 모찌'였다. 국화빵은 여동생과 어릴 적 우리만의 규칙으로 놀이를 했던, 서로를 생각했던 애틋함을 떠올리기 충분한 뭉클함을 주었다. 딸기 모찌는 '난 천재야!' 하는 들뜬 마음으로 준비물을 챙겨 집으로 뛰어가는 작가의 설렘이 너무 공감 가서 쿡쿡대며 읽었다. 나와 다름없는 누군가의 행복이 거기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안도감을 준다. (그리고 정말 작가가 천재라고 느낀 글이기도 했다!) 둘리 호빵은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감정 묘사가 디테일해서 방금 호빵을 먹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작가의 취향 소개로만 끝나는 글도 몇몇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하나의 메시지가 담겨 있어 좋았다. 


겨울에 펑펑 내리는 눈도, 그걸로 만든 눈사람도, 투박한 듯 무심한 모습이 가만한 마음들을 닮았다. 길에 서서 호빵을 먹을 때면 오늘의 일들은 아무렇지 않아 진다. 둘리 호빵의 맛이란 아무렇지 않은 맛, 그래서 내 마음도 잠시나마 아무렇지 않아 져서 먹은 것 마저 까먹을 정도로 안정되는 맛일지도 모르겠다.
이전에는 하나도 어렵지 않던 것들이 전부 낯설게 다가왔다. 그래서 더욱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외부적으로 만들어진 이 공백을 스스로 채울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빵을 그렇게 좋아해도 내 손으로 빵 만들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본 나의 작은 빵 그릇이 그렇게 드러났다. 해보는 게 많을수록 보이는 것도 알게 되는 것도 많은 건 당연했다.
연말에는 내가 아는 쉬운 행복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의 쉬운 미소를 마주하고 싶다. 쉬운 수고로 맛있는 한입을 나누고 싶다. 앙꼬절편에 혹은 찹쌀떡에 손수 딸기를 넣어 먹기. 대단히 만만한 방법으로 내 입이 원하는 한입을 만들어내기. 나의 연말 행사이자, 한 해를 보내는 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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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이 <나 심은 데 나 자란다>라고 하길래 조금은 성찰이나 마음가짐에 대한 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팥에 열정적인 책인 줄 몰랐다. 실망할 뻔했는데 책을 엮은 김지향 편집자님이 이 지점을 엮어줬다. 나를 일으키는 힘은 결국 내가 보내온 시간 안에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나 심은 데 내가 자라듯, 아무리 어두운 날에도 내가 보내온 단단한 시간 앞에 옹골찬 마음으로 우리는 한 뼘씩 자라날 수 있다.


연한 아메리카노 같은 옅은 메시지들이 팥의 단어로 들어오는 책이다 보니,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읽는 것을 권한다. 한 번에 다 읽어야지라는 마음으로 읽다 보면 시시할 수 있으니 꼭 주의하자!


스노우 볼을 흔들면 곧바로 겨울밤을 볼 수 있듯, 살짝만 흔들어도 눈을 감아도 보이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동사가 되는 이야기.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팥 같은 음식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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