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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아나 Apr 11. 2024

존 맥스웰 쿠체 <야만인을 기다리며>

정의는 각자의 시선으로 생겨난다

"저들에게 말을 해. 왜 우리가 여기에 왔는지 얘기하라고. 저들에게 네 얘기를 해 진실을 얘기해"
그녀는 나를 옆눈으로 바라보면서 엷은 미소를 짓는다.
"제가 정말 진실을 얘기하기 바라세요?"
"진실을 얘기해. 그것 말고 달리 얘기할 게 뭐 있어?"
미소가 그녀의 입술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고 침묵을 지킨다.


어느 시대든 공동의 적이 생기면 집단은 힘을 얻었다. 제국주의 시대도 그랬고 현대에는 팀장을 욕하는 팀원들도 그렇다. 집단은 공동의 적을 매개로 끈끈해졌으며, 어떨 때는 이방인이 집단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했다. 사실 적이 얼마나 악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악하든 아니 실제로 악한 존재가 아니어도 이방인은 존재해야 한다. 집단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저널리즘에서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를 색출하고, '명분이 없다 아닙니까'라는 대사가 히트를 친 건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방인은 소수를 대표한다. 우리는 다수가 되기도 하고 또 언제든 소수가 되어 이방인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구분은 다수와 소수라는 입장도 흥미롭지만, '두 가지 입장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집단 간의 입장 차이가 있다면 진실이 의미가 있을까? 또는 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글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 대한 독서 기록이다.



소설은 제국 변경의 치안판사를 맡고 있는 주인공이 마을로 잡혀온 한 야만인을 만나며 자신의 정의를 취하는 여정이 담겨있다. 고문 후유증을 앓게 된 야만인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낀 주인공은 매일밤 그녀를 위로하며 원래 고향으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 과정이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누명으로 번져 제국군으로부터 사형에 처할 위기에 놓인다. 집형은 제국이 야만인과의 전쟁을 치른 후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전쟁에 참패하자 제국군은 변경에서 철수하게 된다. 누더기가 된 주인공은 치안판사로서 다시 변경을 다스리게 된다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작품이다. 소설은 치안판사의 자기 독백 형태로 진행된다. 겉으로 쓰인 이 문장들은 치안판사의 입장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실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가 위치한 집단, 환경, 이해관계에 따라 복합적으로 삶을 바라본다. 치안판사는 제국군을 군인의 명분을 위해 무자비한 고문을 행하는 자로 보았고, 고문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야만인 여성을 무고하게 상처 입은 자로 보며 그녀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내어줬다. 야만인들은 자연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일뿐 절대 침략자가 아니라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스스로의 정의를 행했을 뿐이다. 당연하지만 제국군이 생각하는 정의, 야만인 여자가 생각하는 진실은 그와는 달랐고 결국 서로 어긋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도입부 인용문처럼 치안판사는 본인이 본 것이 전부이자 모든 것을 이해했다 생각했다. 그는 "진실을 말하라"라고 그녀에게 얘기했으나 여자는 정말 그것을 원하냐고 묻고 이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진실은 치안판사에게 결코 유리한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전부를 보지도 헤아리지도 못한 채, 한정적으로 경험한 부분 부분을 토대로 각자만의 진실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치안판사, 제국, 야만인 여자처럼 말이다. 소설에서는 아무런 진실도 나오지 않는다. 개인이 전체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며, 각자의 입장이 있을 뿐 세상에 진실이라는 건 없는지도 모른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야만인'은 문명인과 구분된 이방인을 뜻하는 단어이자 권력자들이 만들어 낸 허상의 적이기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라 볼 수도 있지만, 넓게 보면 '사회 속에서 다수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배척하는 수많은 집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눠 노골적으로 싸우는 모습은 어느 뉴스, 커뮤니티, 게임을 하든 쉽게 보이니 말이다. 선동에 필요한 것은 땔감이다. 대중이 중립적인 판단 없이 불나방처럼 달려들 수 있도록, 공동의 적으로부터 다수를 수호하는 집단이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제국은 야만인들을 더 철저하게 매장시킬 명분과 공포 요소를 찾아낸다. 예전에는 이방인이 특정 대상이라 여겼으나, 누군가의 필요와 기준에 따라 언제든지 생겨나는 것 그리고 그 누구나 그 대상이 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야만인(이방인)은 스스로에게 느끼는 이중성이라는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제국의 고문은 회의적으로 보면서도 제대로 야만인들의 편에도 서지 못하는 상황, 야만인 여자에게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면서도 일방적으로 그녀의 몸을 씻기며 본인만을 위한 참회를 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치안판사라는 권력은 누리고 싶어 하는 주인공의 독백 속에서 이질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스스로 보기에도 본인이 야만인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아무런 불평 없이 새로운 생활 방식에 적응한다. 나는 그녀가 야만인의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순종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야만인의 교육에 대해서 아는 게 뭐지? 내가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관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중략) 내가 줄곧 그녀를 상처받고 손상된 몸을 가진 불구자로 본 반면, 그녀는 지금쯤 자신의 불완전한 몸에 익숙해져 불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겐 새로운 야만이 있는 것 같군. 당신은 자신의 원칙을 위하여 개인적인 자유를 희생할 용의가 있는, '단 한 명의 의로운 사람'으로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거 같소. (중략) 하지만 누가 당신을 역사책에 기록해 주겠소? 변경은 이후 이십 년 동안 다시 평화로워질 거요. 사람들은 먼 과거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지"
병사 하나가 나를 밀치고 두텁게 몸을 싼 세 여자를 호위하여 마지막 수레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들은 수레에 올라 자리를 잡고, 얼굴 위로 베일을 치켜올린다. (중략) 나의 뇌리에는 이 부질없는 공격행위 중 한 가지 모습만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어떤 남자가 맨 뒤의 수레에 탄 여자들 중 하나를 잡고 그녀의 옷을 찢는 모습을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있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러고 나서 광장은 다시 텅 비고 어두워진다. 마지막 수레가 덜컹덜컹 문을 통과하고 수비대는 사라져 버렸다.



개인적으로 제국과 주인공을 대치시키기 위해서 배경을 설명하는 1장이 제일 지루했는데, 그 부분만 참으면 뒤부터는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초반이 고비이니 책을 읽으실 분은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쿳시는 인터뷰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정의를 타고난다고 얘기했는데, 작가의 생각이 특히 작품에 잘 반영된 것 같다. 옳고 그름의 정의 없이 정의는 각자의 시선 속에서 태어난다는 생각이 책을 읽고도 계속 맴돌았던 것 같다. 아주 단순하게는 제국이라는 문명인이 더 야만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고, 그 외에도 앞서 소개했던 생각거리가 많아서 사색하는 독서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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