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을 세운 사랑, 성벽을 넘는 용기

뮤지컬 <모차르트>의 '황금별'

by 옫아

*어느 날 바람결에 실려 온 넘버가 마음을 흔들 때가 있다.

* 황금별의 "어느 날 바람결게 실려 온 그리움" 가사 인용


신영숙 배우의 목소리로 듣는 뮤지컬 <모차르트!>의 ‘황금별’이 그랬다. 예전에는 이 넘버를 들으면 성벽 뒤에 갇혀 바깥세상을 꿈꾸던 어린 왕자의 간절함이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엄마가 된 지금, 내 귀를 파고드는 건 왕자를 가둔 왕의 불안한 그림자, 그리고 그 손을 놓아야만 하는 아픈 결단이, 자꾸만 보인다.


언제나 나는 이 넘버를 들으면,

대학교 1학년 때 신동흔 교수님의 시선으로 읽게 된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흔히 호랑이는 오누이를 위협하는 잔인한 괴물로 묘사되지만, 교수님의 해석에 따르면 그 호랑이는 다름 아닌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아이들을 잡아먹을 듯 옥죄는 '지친 부모'의 투영이다. 떡 하나를 주어도 끝없이 따라붙는 삶의 허기는 결국 가장 소중한 존재인 아이들마저 삼키려 든다. 이때 오누이가 하늘에 빌며 붙잡은 동아줄은 단순한 동화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라는 비좁은 울타리, 나를 구속하는 '썩은 동아줄' 같은 애착을 끊어내고 스스로 해와 달, 즉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이 지점은 동화 속 오누이의 도약은 뮤지컬 <모차르트!>의 ‘황금별’이 건네는 속삭임과 같은 궤도 위에 놓여있다. 넘버 속 왕은 아들을 사랑하기에 성벽을 높이고 문을 굳게 닫는다. 하지만 그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은 아들을 보호하는 성소(聖所)인 동시에, 아들의 영혼을 질식시키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세상은 파멸로 가득 찼다"며 자식의 눈과 귀를 가리는 아버지의 사랑은 안온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안온함 속에서 아들의 '황금별'은 결코 빛을 낼 수 없다. 별은 칠흑 같은 밤하늘로 뛰어드는 모험 없이는 제 빛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동화 속 오누이가 호랑이 엄마를 피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해와 달이 되어 세상을 비출 수 있었듯, 모차르트 역시 아버지가 만든 '사랑의 성벽'을 허물고 나와야만 불멸의 음악가가 될 수 있었다. "사랑이란 구속하지 않는 것, 사랑은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이라는 황금별의 가사는, 어쩌면 자식을 향해 입을 벌린 호랑이가 된 이 시대의 부모들에게 건네는 가장 아픈 처방전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아이를 지키려는 부모의 손길이 아이의 날개를 꺾는 법이다. 오누이가 썩은 동아줄을 과감히 놓고 하늘로 솟구쳤을 때 비로소 해와 달이라는 정체성을 얻었듯이, 우리 삶의 황금별 또한 누군가가 정해준 성벽 안이 아니라 아무도 가보지 못한 거친 들판에서 떨어진다. 인생이라는 배움터에서 겪게 될 상처와 눈물마저 성장의 자양분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형태의 사랑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나 역시 내 안의 호랑이를 다독이며, 아이가 저 성벽을 넘어 자신만의 황금별을 향해 날아오를 때 기꺼이 그 뒷모습을 눈물로, 그러나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배웅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


그래서 이제 나는 왕자가 아닌, 왕의 시선으로 이 노래를 듣는다. 내 아이를 향한 나의 사랑이 한치라도 아이의 앞길을 막는 성벽이 되지 않기를, 아이가 자신의 황금별을 찾으러 떠날 때 기꺼이 그 손을 놓아줄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기를 기도한다. 눈물은 곧 사랑이라는 그 아픈 진리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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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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