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Suddenly

by 옫아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웅장한 합창과 혁명의 불꽃으로 광장을 가득 채우는 서사라면, 영화에서 새롭게 삽입된 넘버 ‘Suddenly’는 그 거대한 역사의 파도 아래 숨겨진 가장 고요하고도 위대한 ‘개인의 혁명’을 조명합니다. 톰 후퍼 감독과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가 이 곡을 삽입하며 강조했듯, 장발장이 코제트의 손을 잡는 순간은 단순히 한 아이를 구출하는 사건을 넘어 그의 영혼이 비로소 완성되는 결정적인 변곡점이기 때문입니다.

Les Misérables - Craft Featurette: Original New Song: "Suddenly"


사실 그전까지 장발장의 삶은 늘 ‘부채’와 ‘의무’라는 무거운 이름들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은촛대를 훔친 뒤 자비라는 빚을 졌고, 시장이 되어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졌으며, 판틴의 죽음 앞에서는 코제트를 구해야 한다는 비장한 약속을 남겼습니다. 그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속죄하는 법은 배웠을지언정,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24601이라는 번호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그에게 타인은 경계의 대상이거나 혹은 지켜내야 할 도덕적 과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Suddenly’는 이 모든 관계의 문법을 뒤바꿔 놓습니다. 톰 후퍼 감독이 언급한 ‘굉장한 순간’은 화려한 연출이 아닌,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어깨에 기대어 잠든 아이의 무게를 느끼는 찰나에 찾아옵니다. 평생을 도망자로 살며 심장을 꽁꽁 얼려두었던 남자는, 이 작고 가녀린 생명의 온기를 통해 자신이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의무’가 비로소 살아갈 이유가 되는 ‘기쁨’으로 전이되는 마법 같은 순간입니다.


카메론 매킨토시의 설명처럼, 이는 사랑받아 본 적 없는 두 결핍이 만나 서로의 빈틈을 채우는 기적과도 같습니다. 테나르디에 부부 밑에서 온기를 잊고 살았던 코제트와, 증오와 분노만이 유일한 생존 동력이었던 장발장. 이들은 서로를 만남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애정을 주고받는 법을 배웁니다. 노래의 제목처럼 이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왔지만, 그 울림은 장발장의 남은 생애 전체를 지탱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결국 ‘Suddenly’는 장발장을 단순한 도망자나 성자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 거듭나게 하는 세례와도 같습니다. 이 넘버가 있었기에 훗날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하수구의 오물 속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는 그의 희생은 거창한 종교적 신념을 넘어, 그날 밤 마차 안에서 마주했던 소중한 온기를 지키기 위한 절박한 사랑의 실천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광장의 붉은 깃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 속에 깃든 이 ‘갑작스러운 사랑’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이 아름다운 선율을 통해 증명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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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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