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위키드>의 'One Short Day'
길었던 겨울은 생각보다 끈질겼습니다. 외투 깃을 여미게 하던 차가운 바람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어느 아침, 문득 공기 속에 섞여든 낯선 온기를 느낍니다. 여전히 코끝은 찡하지만, 피부에 닿는 햇살의 무게가 이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가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춘분(春分)'입니다.
겨울 내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무채색의 풍경들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그 빈자리에 선명한 초록빛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마치 먼지 쌓인 캔버스 위에 누군가 싱그러운 초록 물감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린 것만 같습니다. 그 색깔은 아주 작게 시작되었지만, 머지않아 온 세상을 점령할 준비를 마친 생명력의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이맘때면 귓가에 자동재생되는 넘버가 있습니다. 뮤지컬 <위키드>의 'One Short Day'입니다.
[뮤지컬 위키드] 박혜나, 아이비 One Short Day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에메랄드 시티의 거대한 성문 앞에 선 엘파바와 글린다. 그들이 마주한 세상은 온통 초록빛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Everything is Green!"이라고 외치며 눈을 반짝이던 그들의 설렘은, 바로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봄의 첫인상과 닮아 있습니다.
"단 하루뿐인 오늘(One Short Day), 이 눈부신 도시를 마음껏 누비자"
가사 속 외침처럼, 춘분은 우리에게 이제 그만 무거운 외투를 벗고 밖으로 나가라고 손짓합니다. 낮과 밤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이 짧은 찰나의 날은, 마치 우리 인생의 새로운 막이 올랐음을 알리는 화려한 오프닝 무대와도 같습니다.
워킹맘으로 다시 시작된 일상 속에서도 '에메랄드 시티'는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쁜 출근길,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문득 마주친 환한 아침 햇살이 건물 유리창에 반사될 때, 평범했던 도시는 순식간에 눈부신 마법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기록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 찰나의 빛조차 놓칠 수 없는 소중한 문장이 됩니다.
무엇보다 저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은 아이의 요즘입니다. 뒤뚱뒤뚱 걸음마가 낯설던 아기가, 저와 아이 아빠 외에 많은 이들을 어색해하던 그 아기가, 이제는 어린이집 적응을 훌륭히 마치고 본인만의 사회생활을 시작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One Short Day'의 경쾌한 앙상블 리듬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서툴지만 씩씩한 그 발걸음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탐험하기 시작한 어린 여행자의 행진곡입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에메랄드 시티를 꿈꿉니다.
춘분의 따스한 기운을 빌려, 오늘 하루만큼은 우리 마음속의 초록빛 조명을 환하게 켜보았으면 합니다.
이제 막 시작된 이 눈부신 계절을 마음껏 누빌 준비 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