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옫아 Mar 16. 2022

아직도 시를 읽니

SH와 언어

2017. 11. 8.에 작성한 글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



SH는 대학 입학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

고등학생 때 백일장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였고,

그 친구의 어머니가 사주를 보신 결과 그가 대학교 이름에 나라 국이 들어가는 학교에 갈 것이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가 당연히 문학으로 유명한 D로 시작하는 대학교에 입학하겠지, 생각했었는데.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우리 학교도 나라 국이 들어갔구나.


면접 날, 우리가 같은 전형으로 면접자로서 만났을 때의 아찔함이란.

스펙이 워낙 좋고 글이 훌륭한 친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쟁자로 인식이 되었다.

내가 오늘 떨어지더라도 필사 쟤는 붙겠다 싶은 어린 마음으로 가득했던 19살 겨울이었다.


함께 합격을 했고, 우리가 이 학교로 올 수 있었던 입학 전형인 입학사정관제 동아리에 나란히 가입했다.

우리 학과에서 10명으로 그 전형이 붙었는데 이 친구와 나만 그 동아리에 관심이 있구나 신기했고,

중앙동아리다보니 많이 낯설었지만 SH가 있어서 함께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SH와 있었던 지난 20대 초반을 기록하자면 한 권의 책까지는 아니어도 몇 편의 단편소설 정도는 쉽게 써질 것 같다. 치열하고 잦았던 싸움과 결코 극적이지 않았던 단조롭고 평화적이었던 화해와 관계의 연속성. 그러다 또 마주한 분절, 이내 결합 등 안 맞는 지점이 정말 많았다고만 이야기하기엔 그 친구를 대하는 내 마음이 늘 문제였던 것 같기도.


남다르다고만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그 친구의 유발난 특수함.

어떠한 단면이든 모두 예리하게 포착하고 과감없이 표현하는 그 친구의 뾰족함을 포용하기 어려웠다.

그 친구의 속도를 따라가기에 나는 그때 많이 어려웠고, 그 친구도 어쩌면 서툴렀던 한 20대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하는 말들이 당최 무슨 말인지 해석이 안 될 때도 종종 있었다. 해석이 안 되더라도 어쩌면 들어줄 순 있을 텐데, 내 오만함과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자존감의 영역으로 '에베베 안 들리는데' 식으로 대꾸했던 나의 퍽 귀여운 20대.


SH는 이제 와 표현해 보자면, 나를 예언하는 사람.

나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그 말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서야 비로소 내가 그 뜻을 알게 되는, 그때서야 고개가 끄덕여질 언어를 다루는 사람.

지금의 나를 보면서 언젠가 내가 머물 그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가도 끝내 믿게 되는 사람이 되고, 그의 예언 같은 말들을 믿지 않으려 했다가 결국엔 이에 기대어 사는 사람이 된다.

* 그런 SH가 해준 소개팅이 생각난다. 같은 문과대 복학생 오빠와의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는데, 나를 보석처럼 대해줄 사람이라고 했다. 나와 그의 관계성을 보석과 보석함 개념에 비유했다. 보석처럼 아껴줄 사람이랬나.. 뭐랬나.. 물론 전혀 맞지 않았던 비유와 언어는, 그의 언어가 갖는 몇 개의 오류성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다. 그가 한 말이 전부 맞는 말은 아님을 들기 위한 예시였다.


SH는 '때론' 절친이었기에, 당시에 내가 놓아버리고 싶어도 놓아지지 않는, 끈적이처럼 붙어 있는 상처들에 대해 종종 털어 놓았다. 그때의 내가 바란 건 내가 푹 빠진 자기연민놀이에 동참해주는 것이었다. 아 정말 힘들었구나, 아팠겠어, 어쩜 좋니 식의 반응들. 그러나 친구는 언제나 내 기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었고. 내가 가진 슬픔이 지닌 아름다움, 가치, 이야기, 차별성 등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틈틈이 짚어주었다.


그의 언어들이 나는 결코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그의 말들이, 그 언어들이 미웠고, 싫었다. 나에게 또다른 상처를 주는 게 분명하다고 믿었다으니까.

SH도 스스로를 매정하고 어려운 친구라 인정할 정도로, 우리의 간극은 꽤 멀었고 깊었기에 누구 하나 양보하지 않았던 그러나 손을 놓아버리진 않았던 관계가 지금까지도 잘 연결되고 있다는 게 퍽 재밌다.


우리는 20대의 마지막 역에 서 있고, 지난 역들의 잔상들은 충분히 포용할 수 있는 시점이 되었다.

그 친구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나는 이제 모든 것들의 이유를 더이상 묻지 않고 받아 들일 수 있다.  

네가 날 생각해주지 않는다고 땡깡 부렸던 그 시절의 내 모습에 아직도 신경을 쓰는 SH를 볼 때면, 더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충분히 진심을 담아 이야기할 수 있다.


얼마 전 연락한 SH는 내게 '요즘 네가 제일 잘 지내는 것 같아 좋다'는 이야길 들었다.

SH의 언어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언제나 정직하고 정확하다는 거, 그래서 그 말을 의심 없이 품을 수 있다는 것.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큰 의문 없이 살아가는 지금이야말로 나 정말 그의 말처럼 잘 지내는 걸지도 모른다. 봐, 어쩌면 나는 너의 언어를 가장 맹신하고 있을 지도. 맹신과 불신 사이에 서있던 나였다고.


SH는 카피라이터로서의 새로운 막을 시작했다.

그의 언어를 약 10년 넘게 봐온 입장으로서 이야기하자면, 그 역할을 충분히 잘해낼 것이라, 그의 표현들이 많은 이들이 매료될 것이며 문장은 한 치 오차 없이 훌륭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뺏을 그런 문구쯤이야 너에겐 너무도 쉬운 일일 거라 이야기할 수 있을 거고,

그 중 몇 개는 오래 남아 머무리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바로 그랬으니까.


20대를 돌아볼 때, 결코 빼놓을 수 없을 그와 그 언어들은 마치 바다의 물결이 새겨진 물고기의 비늘 같다.

지금의 내 어딘가에 잘 새겨져 있겠지. 몇 년이 흐른 뒤에 그 흔적을 또 확인하겠지, 오늘처럼. 그렇게 지워지지 않을 SH의 언어들이 머무는 나의 20대. 그래서 더 완벽했을 지도 몰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