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옫아 Jul 14. 2022

푸르른 하늘, 건영이에게

나의 무해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로스쿨 다닐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너는 나한테 강의실의 위치와 휴강 정보와 바뀐 시험 범위를 알려주고

동기들이 날 놀리거나 속이거나 따돌리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해. 

지금도 너는 내 물병을 열어주고 다음에 구내식당에 또 김밥이 나오면 나한테 알려주겠다고 해.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봄날의 햇살, 최수연이야. 


[이상한변호사우영우 | EP5 | 하이라이트] [SYSTEM] 별명을 붙여달라는 수연에게 영우가 "봄날의 햇살" 주문을 시전했습니다�☀️ - YouTube




건영아, 위 영상 봤어?

나도 열심히 보고 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5화, 그러니까 어제 방영되었던 대사 중 하나래. 

극 중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앓고 있는 변호사 우영우에게 그녀의 로스쿨 동기이자 같은 로펌에 다니는 최수연이라는 변호사가 자신의 별명을 지어달라고 했을 때 나왔던 장면이래. 

있는 그대로를 담백하게 전하는 우영우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 늦기 전에 너에 대한 내 마음을 이 글에 담아보려고 해. 


나는 사실 예민하면서도 무딘 사람이야. 

그렇게도 많이 예뻐하는 동생이 대전에 몇 번 놀러왔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그 친구가 매운 걸 좋아하는 것만 기억하지, 할라피뇨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해서 접시에 할라피뇨를 담아주기도 해. 이뿐만이 아니지. 친구들이 알려주는 본인들의 MBTI 유형도 매번 기억 못해. 까먹고 틀리고, 뭐였더라 하면서 머쓱하게 웃곤 하지. 하지만 그런 나라도 너의 MBTI 유형 하나는 정확히 기억해. 나의 유형에게 최고로 잘 맞는 유형인 ISFP니까. 


우리가 정말 MBTI적으로 잘 맞는 유형이어서 이토록 가까워진 걸까? 나는 너를 떠올리면-너도 이제는 곧 외워버린지도 모르는-내가 종종 너에게 쓰는 편지에 나오는 문구. 네가 있어서 덜 외롭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정말로, 나는 그래. 나의 예민한 기질,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내어주었다가 크게 상처 받고, 또 이내 기대하게 되어버리는. 그런 나의 마음을 네가 온전히 공감해주고 알아주는 걸 알았을 때, 기쁘고 감사했지. 나의 작은 능력도 늘 대단하게 생각해 주고, 내가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네가 있어서 나는 정말 좋아. 마음이 담긴 선물에 유독 녹아버리는 나의 습성을 너무도 잘 아는 너는 매번 다양한 선물들로 나를 기쁘게 해주고 내가 외롭지 않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곤 해. 


우리의 우정 역사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으나, 오히려 돌아보면 정말 재밌는 거 너도 알지? 같은 대학교 다른 학과였던 우리는 중앙동아리에서 처음으로 만났어. 1박 2일 MT를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나는 네 어깨에 기대서 정신없이 졸았지. 아예 안 친한 사이였는데도 말이야. 그 후로 각각 교직 이수를 밟게 되면서 교직 관련 수업에서 몇 번 마주치게 되고, 같은 학교 그것도 같은 학급에서 교육 봉사를 다른 날로 하게 됨을 알았을 때는 정말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었어.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힌 인연은 우리가 같은 학교로 드디어 같은 시기에 교생실습을 나갔다는 거였어. 그동안 같은 공간을 공유했어도 같은 시간 속에 있진 않았는데, 드디어 시계 바늘이 정확히 맞춰지듯 우리가 똑같은 시공간 안에 서 있게 되었어! 


우연은 거기서만 끝나지 않았지. 자리 배치도 바로 앞으로 맞춰져 더욱 가까워졌어. 교생 실습 동안 우정과 추억을 쌓아갔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래서 언제나 암기하고 있는 소중한 구절과도 같아. 교생실습을 마치고 같이 이마트에서 장도 보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하지만 내가 대전으로 내려가게 되었을 때, 나는 너무도 아쉬웠지만 한때의 시절을 마음에 묻어두겠구나 싶었지. 그땐 그랬어. 내가 서울에서 쌓아온 모든 것들과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마음을 굳게 먹게 되던 때였지. 


하지만 네 연락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대전에서 만나게 되고 당시 내가 앓고 있던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때, 우린 그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오히려 서울에 있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어. 그게 아마도2018년 여름이었을 거야. 그 뒤로 우리는 물리적 거리와 한계를 극복하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이어가고 종종 만나면서 우정은 더 깊어졌고, 너에게 기대는 내 마음도 더더 커져갔어. 그럼에도 너는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키거나 상처를 주지 않았어. 조심스럽고 배려 있으면서도 긴밀하게 다가오는 너의 촘촘하게 다정한 마음 덕분에 나는 외롭지도 않았고, 너라는 존재 하나로 마음은 더 풍요로워져 갔지. 마음이 다친 날에는 너를 찾아 많은 위안을 받았어. 그건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이어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야. 너로 인하여 위로 받았던 나날들을 논하자면 끝도 없이 나열해야 할 거야. 또 정반대로 너로 인하여 더 커다란 기쁨을 마주했던 순간들은 얼마나 많은지. 너에게도 내가 슬픔을 나누고 기쁨은 키우는 존재이길 간절히 바라. 그리고 언젠간 너로 인해 상처 받을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그럴 친구가 아니야. 마음이 깊어지고 기대감이 높아졌을 때 그제서야 찾아오는 실망감으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유해한 사람이 되곤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이야기는 아닐 거라 나는 확신해. 너는 내게 무해하고 다정하고 기댈 수 있는 특별하고 고마운 존재야. 그리고 혹여 너로 인해 상처 받을지라도 나는 조금도 겁나지 않아.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최수연이 봄날의 햇살 같다면, 너는 푸르른 하늘 같아.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마주할 수 있고, 존재의 이유도 물을 것 없이 당연하게 내 곁에 있으니까. 마음이 울적해도 하늘을 보고, 너무 기뻐도 하늘을 보듯이 나의 모든 감정들을 과감없이 나눌 수 있는 네가 좋아. 하지만 그 당연함에 기대어 너를 힘들게 하지 않을게. 네가 내게 주는 풍요로운 마음을 언제나 기억하고, 감사해 하며 우리를 만들어준 고마운 인연에 매번 경이로움을 표하며 신나게 지낼 것을 약속해. 그리고 네가 푸르른 하늘이 아니어도 괜찮아. 먹구름이 낄 때도, 성숙한 노을로 변할 때도 나는 그 하늘을 언제나 예의 주시하여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는 친구가 될게.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

푸르른 하늘, 박건영이야.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도 시를 읽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