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보다 20대의 시간이 1년 더 많은, HJ에게
HJ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2017년 초 1~2월의 겨울이 생각난다.
나는 졸업 전인 2016년 12월 중순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HJ은 그 시점 즈음에 교내 방송국 국장 임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남들보다 늦은 입대로 적응하느라 고생했던 HJ. 낯선 남자들 동기 사이에서 혼자 여자였으며 대학교와 너무도 다른 회사 문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나.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의 공통점을 찾았다. 그 공통점의 이름은 '2017년 초는 너무 힘들어'.
사실 HJ와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친구를 같은 입학사정관제로 학교에 입학한 후 사학과 13이었고 꽤 적극적이었던 볼드모트(한때 그와 나는 꽤 친하고 마음을 나누었던 사이였으나, 현재는 완전히 손절한 관계로 이름을 말할 수 없어 볼드모트로 언급하겠다)의 친구로만 알고 있었다. 앞서 SH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아직도 시를 읽니 (brunch.co.kr)) SH와 나 역시 같은 전형 같은 학과여서 친했고. 볼드모트와 HJ의 관계도 우리와 유사한 관계였다. 같은 학교 같은 전형. 그러다 보니 SH, HJ, 볼드모트와 나 이렇게 넷이서 함께 아는 사이 정도였지, 초반에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관계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16년 5월. 교생실습을 마치고 학교 축제 시즌에 맞추어 4명이서 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꽤 마음이 잘 맞고 아직 가슴에 낭만을 간직한 국어국문학과와 사학과의 만남이 그저 좋았다. 그렇게 종종 청계천에서 막걸리를 먹고, 한강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대학생활 막바지 우정을 키워갔다. 여름방학에는 공주에 놀러오기도 했고, 후에도 충주호도 가고 여기저기 함께 다니며 20대 초반에 못다한 우리의 역사를 써내려갔더라지.
마음이 꽤 잘 맞고 통하는 게 많았던 볼드모트,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던 SH. 두 사람을 대할 때와 다르게 나는 HJ가 조금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학교 방송국 국장이었고, 삼전공을 하는 인재였으면서 동시에 두루두루 교우관계가 원만한 그야말로 인싸 중의 인싸 느낌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낭만도 찾는 그 친구를 보면, 오직 학점에만 매달리고 보여지는 것에만 치중하는 나의 얄팍한 면모가 더욱 잘 보이는 듯 했다. 쟤는 나와 달리 모든 것에 진심으로 임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 친구와 있을 때 나는 그 친구의 장점만 부각시키면서 칭송(!)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추후에 들었을 때 그 친구는 그게 참 부담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잘난 점만 있는 사람이 아닌데, 나의 다른 모습을 보면 실망하겠다'고 생각했다고. 2017년 초의 겨울은 그 친구의 완벽함 대신 참된 인간성을 잠시 만날 수 있었다.
남자 동기들은 대부분 영업직으로 입사했고 나는 마케팅 관련 업무였기에 확실한 간극이 있었고, 무엇보다 대학생 친구가 아닌 훨씬 오빠들 나이의 사람들과 지내는 것은 내게 너무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 여직원들과의 관계가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회사 자체의 문제이긴 했으나 나는 다른 여직원들과 다른 체계 속에 들어왔고, 그로 인해 회사에서는 내게 '여직원이지만 여직원 같지 않은 정체성'을 강요했다. 그로 인해 나는 남직원들과도, 여직원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한 마리의 미운 오리 새끼였다. 나 그래도 대학시절에는 여기저기서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라왔는데, 여기서는 그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주말 지나고 드러나는 헤어스타일의 변화를 알아주는 이도 없었고, 어떤 생각과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봐주는 이도 없었다. 그저 나는 일개의 직원 한 명으로 이름 없는 신입사원이었다.
그런 내게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는 HJ이었다. 약 3박 4일 정도의 그룹의 신입사원 교육일정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한 학부 졸업식에서 내 이름이 써진 졸업 축하 현수막을 만들어준 건 HJ이었다. 나는 그곳에 없었으나 그곳에 있었던 거다. 내 이름이 적힌 00랜드 현수막을 사진으로 보며, '그래 나는 분명 지나간 시간 속에서만큼은 충분히 행복했었지. 비록 지금 아니더라도'를 실감했다. 2017년 시작을 군대에서 보내는 HJ과 회사에서 맞이하는 나는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어색한 점심식사를 동기들과 함께하고 나면, 나는 서둘러 자리에 앉아 노트북으로 HJ에게 인터넷 편지를 썼다. 주로 내 하소연이자 일기였다. 어떤 일이 있었고 이래서 속상했지만 힘내보겠다의 자기한탄. 왜 사람들은 나를 안 좋아해주지 싶은 고백들을 이어갔다. 아, 지금 생각해 보면 꿀밤 한 대 때리고 싶은 자기 중심적 사고의 끝판왕이었다. 그렇게 거의 매일을 HJ에게 내 이야기를 했고. 인터넷 편지를 쓸 수 있는 기간이 끝나고 나서는 손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운전면허학원에 가기 전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가던 주말이 그렇게 소중했다. HJ와 편지를 할 때면, 그래도 내가 어딘가에 속했던 사람이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졌고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외로웠던 시기를 HJ과 공유하면서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다. 일방적인 관계였음이 부끄러워질 때 HJ에게 살며시 그때를 이야기하면, 아니라고 나도 그때 좋았다고 이야기해주는 다정함이 고마웠다.
물론 입사동기들은 그들의 최선을 다해서 점심시간에 나와 놀아주기도, 벚꽃이 피면 인생샷을 찍어주기도, 스타벅스 신메뉴가 나오면 같이 가서 먹어주기도 할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낯선 회사 직원들, 특히 여직원들의 경우도 2017년 봄이 지나고 나서 조금씩 그리고 꽤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나에게는 주변의 변화를 얼마든지 눈치채고 나아갈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으나, 나는 울적하고 작아졌던 마음을 오직 HJ와의 소통에서 달랬다. 그러나 마음 놓고 충분히 나를 달랬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 다음이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HJ와의 소통이 없었다면 지금도 없었으리라 생각해보며, 얼마나 내가 그 시간 HJ에게 기대고 의지했는지 느껴본다. 본인도 충분히 힘들었을 텐데 어떤 불평이나 불만 없이 그저 다 들어주었던 HJ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때의 감사한 기억으로 우리는 연락을 이어가며 29살이 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볼드모트, HJ, SH 이 넷과의 관계도 몇 번 틀어지고 이어지기를 반복해 왔지만, HJ하고는 한 번도 틀어졌던 적이 없었다. 어젯밤 술자리에서 HJ은 이야기했다. 너에게 그렇게 큰 실망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그의 말에 건영푸르른 하늘, 건영이에게 (brunch.co.kr)도 동의했다. 나는 지나친 쌈닭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나에게 실망한 적이 없고 나도 둘에게 실망한 적이 없다니, 이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 관계인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너희들도 마음껏 내게 기대주었으면.
HJ의 현재 직업은 PD이다. 대학생 때 모습 그대로 자라서 지금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본인만의 콘텐츠 세계를 만들어 간다. 대학원에도 진학해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고, 주말에는 독서모임에 나가고 있다. 바쁜 업무 중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언제나 주고 있으며, 본인 역시 지속적으로 영화나 뮤지컬, 책 등의 문화 콘텐츠를 수시로 마주하고자 노력한다. 그의 깊이는 그의 일상에서 나옴을 실감한다. HJ은 내가 본인을 높이 치켜세움에 조금의 어려움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나는 HJ가 얼마나 본인이 대단한 사람이고 주변에게 좋은 영향력을 펼치는 사람인지 확실하게 인지해주었으면 좋겠다. 능력만이 잘난 게 아니라 인성 또한 훌륭해서 너는 다른 사람들의 저마다 시기에 분명한 변곡점을 그려준 사람이라고, 너로 인하여 네 주변 사람들은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힘주어 전하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어줘서 고맙다고. 외로웠던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음에는 사람들이 자리함을 깊게 느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너였으므로.
빠른 94인 HJ은 올해부터 29살이 아닌 28살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20대가 남들보다 1년 더 있는 셈이다. 그 누구에게라도 충분히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가 20대를 1년 더 살겠다는 것은 두루 좋은 일이라 확신하며, 부러움과 함께 또 하나의 기대를 보내며, 이만 글을 마친다.
* 한편 나는 HJ에 대한 글을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을 본다.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