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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Apr 29. 2022

인정 욕구가 나에게 선물한 3가지

순차적으로 만났던, 인정욕구와의 공생 과정 혹은 여정 

지난 글에서도 한 번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나는 학부를 '문학치료'로 유명한 광진구 K대학교의 국어국문학과에서 졸업했다. 높은 학점을 유지해 좋은 기회로 교직이수를 통해 국어과 정교사 2급 자격증도 소지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어법과 문학사 등 굉장히 형편 없는 전공 지식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런 내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기 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딱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문학에 대해 열린 시선으로 다가설 때, 그리고 문학치료를 통해 적어도 내가 어느 서사 안에 머물고 있는지 종종 확인할 때다. 


후자의 경우를 논해 보건대, 문학치료 관련 한 교수님께 내 서사 진단을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인정 욕구'가 굉장히 강하게 나온다고 서사진단을 해주셨다. 이를 테면 충신이 공을 인정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할 때(마치 드라마 <도깨비>의 김신의 처형 장면 같은 것)와 할머니가 본인이 가족들에게 베푼 사랑을 인정 받지 못하고 외로이 죽어갈 때(할미꽃 설화) 내가 정서적으로 크게 반응하고 몰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정 받지 못할 때 격하게 반응하는 것을 미루어보아 나는 인정 욕구가 상당히 높은 사람이라는 것. 정확한 진단이었다. 평생을 인정 욕구를 갈구하면서 살아온 삶이 내 삶이었기에. 


인정 욕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수많은 논문들과 이와 관련한 학자들마다의 정리된 바가 다르겠지만, 본 글에서는 인정 욕구를 간단히 위키백과를 빌려,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자 한다.


남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자기의 어떠한 종류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는 일은, 자기가 생존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일로서,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 다시 말해 자신감이나 자부심을 갖게함으로써 살아갈 맛을 느끼게 하고 삶의 목표까지 생기게 만드는 기제이다.


즉 나는 내 가치를 지속적으로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굉장히 높다. 그럼 대체 왜 그럴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오드아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에 따른 내 존재에 따른 어떠한 증명 욕구? 맏딸이자 맏손녀로서의 책임감? 혹은 순수하게 타인과 나에게 인정 받는 게 재밌고 좋다는 욕망? 등 나의 인정 욕구를 둘러싼 원인들이 굉장히 다양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인정 욕구에 대한 왜(Why)의 질문이 아닌, 인정 욕구가 내게 무엇을(What) 어떻게(How) 주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풀어낼 예정이라 관련된 탐구 및 단상은 여기서 생략하도록 한다. 


그러면 지금부터 인정 욕구가 내게 순차적으로 선물한 3가지의 가치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3가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별 가치들이 아니라, 언급한 바와 같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2번은 1번에서 기인한 것이고, 3번은 2번에서 기인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3번이 다시 1번의 기인 요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추후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1. 자기 PR 능력


 인정 욕구를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인정 받을 사람임을 어필하는 것이다. 내게는 내가 갖고 있는 가치들에 대해 과감 없이(어쩌면 조금의 포장을 더해) 보여줄 자신감과 그 준비가 상시 되어 있다. 예전에 읽은 글에서 여자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잘 드러내지 못한다는 성향으로 인해 회사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글쎄, 내게는 턱도 없는 소리이다. 나에겐 기회만 와준다면 언제든 자기 어필을 할 준비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스토리텔링과 PT를 통한 자기 어필 능력이 자연스럽게 쌓여갔고 회사에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 있게 앞장서게 되었다. 

 이를 테면, 우연히 생긴 임원들 앞에서의 도서 교육. 책을 요약해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는 나의 직속 상사 임원이 주신 기회였기에 감사히 생각하고 즐겁게 준비했다. 하지만 발표를 마쳤을 때, 내가 내 예상보다 훨씬 못한 것 같아 많이 좌절했었다. 그러나 당시 회의 주최했던 동기가 전해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내가 회의 자리를 떠난 이후, 쉬는 시간에 사장님께서 한 임원에게 "0대리(=나)는 자기가 많은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하는 똑똑한 애"라고 표현하셨다고 한다. 이 얘기를 자랑스럽게 친한 동생에게 전하니, 친한 동생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언니(=나)는 언니를 잘 표현할 수 있고, 언니 자신을 강하게 어필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멋져 보인다고. 

 어떻게 보면 잘난 척,이라고도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맞다. 잘나지 않았음에도 자기를 잘나가는 모습으로 포장하는 것도 자기 PR 능력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잘난 사람으로 인정할 줄 아는 것. 그리고 이러한 내 모습을 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더 크게 보여주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 이로 인해 나는 다각도로 나를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꽤 즐겁고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또 자기 PR이 적성에 맞다보니, 저절로 PR 직무인 홍보기획팀에서 2년차 대리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적극 알리고 홍보하는 일이 재밌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사랑하게 되고..ㅎㅎ 



2. 우수한 성과와 만족스러운 결과물

 

 1번과 이어지는 결과물이다. 자기 PR의 대가는 결국 우수한 성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크게 우수한 성과 혹은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해보자.. 

 우수한 학점과 교직이수는 기본이었다. 장학금을 받아 나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은 인정 욕구 충만한 나에게는 어렵지만 할 만한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그리고  학술대회에서 석사 부문 최우수상을 탄 작년 일이 문득 생각난다. 이것이 왜 자기 PR이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애정을 갖는 나의 연구 주제에 대한 어필이기에 나는 자기 PR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어필하고 설득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한 진심 어린 PT 끝에서 만난 최우수상 1등이라는 결과물은 언제나 짜릿하지. 

 나는 회사에서 글 쓰는 애로 통하고 있다. 실제로 쓰는 일을 좋아하고, 회사에서 이 직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현재로서는 없기에 보도자료를 포함한 회사 관련 텍스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언제나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누군가는 나를 찾을 테니. 그리고 그 누군가는 사장님이 되었다. 회사의 절대 보스인 사장님의 언어를 텍스트로 쓰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가장 짜릿한 모험과도 같다. 그러다 보니 신년사, 성과급편지 등을 비롯해 CEO 메세지를 거의 전담하고 있다. 눈에 드러나는 성과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뿌듯한 성과물이며 자랑스러운 업무들이다.

 그 외에도 서평단 신청, 자격증 취득, 공모전 등 언제라도 내가 나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싶을 때, 과감 없이 나를 힘껏 드러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편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 내가 나를 비롯한 누군가로부터 인정 받고 싶을 때에는 원하는 것에 기꺼이 문을 두드리고 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그 다음의 문제이고. 하지만 대다수 진정으로 문을 두드리면 꽤 열리는 것 같다. 감사한 일이지. 



3. '나다움'에 대한 고찰 


 그러나 1번과 2번은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한 인정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의 기준이라는 게 작용하곤 했다. 그 흔한 휴학 없이 한 번에 졸업, 3전공을 했지만 4년 안에 졸업, 졸업 전에 취업,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 입학 및 졸업, 사원에서 대리로 한 번에 승진 성공 등. 꽤 손꼽아 이야기할 수 있는 인정 욕구가 준 선물들 많다. 하지만 이 모두 내가 원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성공한 사람의 단면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와 함께 사회가 바라는 인재상에 나를 맞추고자 안간힘을 써왔었다. 물론 후회되진 않는다. 그 무엇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중간에서 내가 많이 피로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인정 욕구를 주는 주체는 사회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한데, 인정의 기준이 너무도 사회 쪽에 치우쳤음을 느낀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한테 자랑스러운 내가 되고 싶은 거지, 수없이 많은 다수에게 좋은 내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즉 나다운 나로서 나에게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훨씬 크다는 걸 알았다. 뭐가 되어도 상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나. 어쩌면 그게 사회가 원하는 기준보다 더 촘촘하고 세밀한 어려운 과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로부터 끊임 없이 인정을 받고 싶다. 그게 내 욕망이자 나이니까. 그러다 보니 자주 생각한다. 나다운 게 뭔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이렇게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반응하다 보면 차츰 내가 원하는 나의 길로 이동하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면 나는 나에게 인정을 받고 쉽게 또 행복해지고 마는 것이다. 나의 가치를 내가 인정해 주는 것. 얼마나 짜릿한 기쁨인지! 

 


 물론 인정 욕구가 주는 선물들이 언제나 긍정적인 면만 있지 않다. 내가 나에게 실망했을 때 오는 우울감, 사회로부터 맛보는 좌절감 등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의 받는 스트레스에 나를 '잠시'만 가둘 수 있으리라 믿고 싶고 믿고 있다. 애초에 인정을 받으며 내 가치에 행복을 느끼고자 인정 욕구를 원하는 것이지, 좌절하고 실망하려고 인정 욕구를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을 나는 내 가치를 느끼는 데 시간을 쓰고 싶다. 내가 지금 여기 살아있음을,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힘껏 사랑하고 인정하며 조금씩 성장하는 나를 만나고 싶다. 인정 욕구가 주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면, 나는 빛 안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 부족한 모습에 쉽게 좌절하지 않고 개선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오히려 큰 기쁨을 알고 싶다. 

 그러니, 인정 욕구가 주는 선물들을 하나씩 행복하게 뜯고 다음 퀘스트가 뭔지 기꺼이 받아 들이며 살아가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김초엽의 <방금 떠나온 세계>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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