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누가 가장 나쁘다고 생각하시나요?
1.
최근 직장 동료를 통해 재미있는 심리테스트([#비밀의정원] 심리 테스트로 알아보는 나의 가치관은? 재미로 해보다가 어느새 과몰입 중! | #샷추가 - YouTube)를 해봤다. 어떠한 상황을 두고 누가 가장 나쁜 놈(!)인지 찾는 테스트였는데, 나는 듣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은 캐릭터가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왜 잘못했는지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 심지어 같이 테스트 결과를 공유한 동료들 역시, 그 사람이 왜 나쁜 놈의 범주에 올라가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역시 나는 나만의 포인트가 있구나, 싶었던 때에 남자친구에게도 같은 심리테스트를 공유해 주었고 내 결과를 예측해 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단 한 번에 맞추는 그. 선택에 대한 이유 역시 "너라면 그랬을 것 같아서"로 깔끔하게 답변하더이다. 관련된 테스트를 진행하신 분들이라면 아래 캡쳐 이미지들에 주목해주시길. 나는 가장 잘못한 사람을 뱃사공으로 선택했다.
* 스포 방지를 위해 테스트 진행 후에 이미지 보시길 권장!
열심히 토론 중인 댓글들 가운데 가장 와닿았던 말은 "뱃사공이 나쁘다 한 사람은 냉정한 실리적 선택이 남에게 피해를 줬으므로, 좀 더 더불어 사는 따뜻한 마음, 인간성을 제일 중요하다 생각한다"는 것. 맞다. 뱃사공에게 기대했을 호의는 선택이지 강제나 강요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 하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선 뱃사공의 작은 친절이 분명 결과를 아예 바꾸어놓았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작은 친절을 충분히 베풀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 그러니까 나는 타인의 작은 친절을 중요시 생각하고, 매정함에 대해 나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겠지.
2.
사람들은 다 잘못 없다고 주장하는 그 뱃사공. 나는 뱃사공한 행동에 대해 왜 나쁘게 생각할까? 그건 바로 우리에겐 타인에 대한 작은호의나 친절함과 관련한 어느 정도의 기대감과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생각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내 삶의 몇 가지 변곡점들 가운데 아프고 시린 변곡점을 하나 꼽아보라면, 주저없이 이야기할 중학교 3학년 봄날, 나는 초등학생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를 잃었던 기억을 말할 수 있다. 그 친구는 나랑 같은 초등학교 출신으로, 당시 교복 입고 다니던 초등학교(흔한 동네 초등학교는 아니었다!)에서 유일하게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조금은 특별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각기 다른 중학교로 진학하면서부터 소식이 뜸해졌고, 중학교 1학년 때 정도 서로 소식 주고 받은 정도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중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집에 오는데, 아파트 단지에 119 차들이 와 있었다. 크게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지만 다음날, 학교에 가니 인근 중학교 남학생이 성적 비관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퍼져있었다. 설마 우리 아파트에서 본 119가 그 119인가? 싶었지만 단정짓진 않았었다. 그렇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벌써 성적 비관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가슴 아픈 이야기였지만 크게 와닿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눈물샘에 이상이 생긴 느낌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내 몸은 뭔갈 느꼈던 것 같다, 자살한 남학생의 정체를. 하교 후에 그 진실을 알게 된 후 처음 느낀 감정은 그저 충격이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그 친구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진짜 충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동네 안경원에서 안경을 맞추러 나 혼자 갔었다. 그때 안경원에 있던 동네 아주머니들 중 한 명(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뇌에서 기억을 삭제해 버린 듯)이 나에게 "어, 너 00(죽은 그 친구 이름)이랑 친하게 지내던 애 아니니? 어쩜, 너도 너무 슬펐겠다. 그런데 둘이 꽤 가깝지 않았어? 네가 좀 더 그 애랑 연락 좀 하고 지내보지. 그러면 안 죽었을 수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글쎄, 악의는 없(다고 믿고 싶었)지만 몸을 곳곳이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찔할 정도로, 그 친구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았고, 나는 나를 탓하기 시작했다. 내가 좀 더 먼저 연락을 해 볼걸. 나는 왜 그렇게 못했지?하며 스스로를 원망하고 비난하며 그 모든 일의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만 같은 좌절감 속에 있게 되었다. 단지 그 아줌마의 말 때문에.
그렇게 꽤 오랜 밤을 자책감 속에 스스로를 내던졌던 어느 날. 한 여자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떨어져 자살하는 꿈을 꾸었다. 너무 놀랐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뒤돌아 도망치려던 그때, 죽은 내 친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놀란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편안해 보였고 조금의 미소를 입가에 올린 채 나를 토닥이며, 내 잘못이 아니라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나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은 아니었을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 보지만. 그때는 정말 친구가 내 꿈에 나타나준 것이라 믿었다. 죄책감 속에서 발버둥치던 나를 해방시켜주었던 고마운 꿈. 그 꿈을 계기로 나는 조금씩 다시 일상적인 나날들을 살아갔다.
하지만 1년도 채 되지 않은 날, 비슷한 비극이 내게 찾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고 야자가 끝나면 같이 집을 가곤 했던, 그렇게 친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름의 마음 한 켠을 내주었던 친구가 자살했다. 처음에는 자살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날 조회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여름방학 때 친구가 갑작스럽게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고 알려주셨고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다른 친구가 자기네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 또래 여학생이 투신 자살했다고 떠들고 다녀도 절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텅 빈 복도의 정수기 뒤에서 혼자 웅크리시고 우시는 걸 보고 나서야 아 그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구나, 실감했다. 한 번의 상실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존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죽은 친구의 절친이자 나와 같은 독서실을 다녔던 친구였다.
얼마나 상실감이 클까? 혹시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라는 심정으로 먼저 다가가 말도 걸고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시험 공부도 같이 하고, 낮잠 자면 깨워주고 맛있는 음료 마시러 가고 그렇게 그 친구랑 가까워졌고 후에는 그 친구가 나를 닮은 오드아이 인형을 직접 만들어 내게 선물도 해주었다. 밝아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때론 죽은 친구 생각이 나서 힘들지만 그래도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암시를 건내는 친구를 위로하며 나는 작년에 내가 받은 상처까지 함께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떠난 사람의 빈 자리를 내가 온전히 채워줄 수는 없었겠지만 나의 작은 행동들이 그 친구를 조금은 밝게 해주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 가져올 조금의 변화 혹은 기존과는 다른 엔딩을 기대하게 되었다. 가장 아픈 기억이 지금의 날 만들었다니. 20살 대학교 호수에서 엉엉 울며 두 친구의 상실에 슬퍼했던 모습으로부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괜스레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3.
여전히 나는 타임슬립 콘텐츠, 그 중에서도 지금은 없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을 논하는 콘텐츠에 하염없이 마음을 주게 된다. 아마도 '나'를 이입해서 그런 거겠지. 돌아간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라는 확신은 있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정녕 결과가 바뀔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친절과 호의를 충분히 베푸는 일을 결코 멈추고 싶지 않다. 지금 여기야말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고, 내일을 바꿀 수 있는 것도 결국 오늘로부터 시작하니까. 그래서인지 영화 <너의 이름은>과 정세랑의 단편 소설 <11분의 1>(은 타임슬립물은 아니지만 아팠던 오빠를 살리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을 볼 때면 눈물이 났다가도 위안을 받고 그러다가도 오늘의 나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 오늘의 나는 무얼 바꿀 수 있는지. 나를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유해하지 않기. 작은 마음과 호의와 따뜻함을 주고 싶고 그 행동과 마음이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있어 크게 어렵거나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다. 기꺼이 내가 그러고 싶은 마음에서 온전히 비롯되는 거니까.
나도 잘 안다. 내 이런 친절이 그 사람들의 삶과 죽음까지 영향까지 절대 미칠 수도 없고, 그런 걸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걸. 하지만 적어도 조금의 무언가는 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 한 것과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의 차이만큼이나 결과물도 달라지길. 그런 마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친절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갖추고 사람들을 마주하고자 노력한다. 혹시 이런 행동들이 이기적인 건 아닐까?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의문들도 종종 나를 찾아오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처음 마음 먹은 그대로, 현재 '내가 마주하는, 나를 만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작은 호의와 친절을 보여줄 것이다.
4.
뱃사공은 연인을 만나게 해주지 못했음을 후회할까?
5.
나는 내가 친절을 베푸니까, 남들도 나처럼 친절하다고 믿을까? 아니면 나만 친절하다고 생각할까? 지난 글(아무도 아기 오리를 보살피지 않아. (brunch.co.kr))에서는 나 빼고 그 누구도 친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뱃사공을 제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작은 호의를 베풀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