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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Jun 09. 2022

영화 <브로커> 속 메타포 찾기 (리뷰, 해석)

단추, 어둠, 차의 창문, 화장 그리고 세차 

영화 <브로커>가 6월 8일 개봉했다. 

영화를 오래 기다린 것은 아니나, 회사 동아리 사람들이랑 개봉일에 맞춰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스러운 영화였고, 영화 면면히 흐르는 감독의 색채나 정체성이 눈에 들어왔었다.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이나 리뷰 대신, 내가 눈여겨 본 영화 <브로커> 속 메타포에 대한 해석을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 단추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먼저 생각난 키워드는 '단추'였다. 소영의 카디건에 달린 단추가 떨어질랑말랑 하는 것을 미리 캐치한 상현이 미리 손수 단추를 꿰매어 소영에게 넘겨주는 씬. 수진이 본인 옷에 단추가 떨어진 걸 확인하고, 남편에게 전화해 옷을 가져다 달라고 이야기하는 씬. 두 씬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는 바로 단추다. 단추가 떨어졌거나 떨어지려고 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아닌 타인에게 그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혹은 이미 해결해주거나. 단추가 뭐라고, 싶을 수도 있으나 내게 단추는 가족 혹은 가족 만큼 가까운 존재에 대한 기댐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 상현으로부터 단추 수선이 된 카디건을 받고 나서, 본인에 대한 허물을 한 겹을 푸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상현으로부터 받은 작은 호의. 상현이 채워주는 무언가. 그리고 수진이 남편에게 먼저 전화를 걸게 하는 매체. 그 모두는 단추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점에서 단추라는 포인트가 재밌게 다가왔다. 



* 어둠

영화에서는 밝음과 어둠이 상징적으로 대비된다. 소영이 상우를 버리거나 혹은 맡겼던 밤은 어둠이었고, 소영이 동수에게 말로 상처를 준 시점은 저녁(어둠), 그리고 둘이 대화를 통해 조금 더 가까워지는 건 저녁이 지난 아침(밝음)처럼. 하지만 이렇게 전형적인 메타포 사용이 아닌, 어둠은 보다 서로에게 진실해지는 순간을 담아내기도 한다. 이를 테면, KTX를 타고 가던 중 통로 칸에서 상현과 소영의 대화씬에서 소영이 진심을 담은 말을 꺼낼 때 기차가 터널 속으로 진입함에 따라 어둡게 소영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그 외에도 모텔에서 서로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진솔되게 표현할 때도 동수는 '불을 끄자'고 이야기한다. 어둠은 마냥 부정적인 요소로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해지는 찰나, 혹은 나의 진솔된 고백을 밝히는 순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이지 않음이 때로는 보이는 순간이랄까. 



* 차의 창문과 수진 

수진의 직업은 형사로 잠복 수사를 위해 차에서 지내는 씬이 초반에 많이 등장한다. 남편이 옷을 주러 찾아왔을 때도 차의 창문만 내려 손을 뻗어 받고, 창문 밖에 떨어진 꽃 하나가 붙어있을 때도 창문을 아주 살짝 내려서 꽃을 잡을 뿐이다. 차에는 창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 문도 있다. 진짜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면, 창문이 아닌 차 문으로 나갈 수 있는데, 수진은 그보다 조금 더 소극적인 창문, 그것도 완전히 다 열어버리는 것이 아닌 살짝만 내리는 씬을 보여줌으로써 수진이 그은 경계가 확실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수진은 차가 아닌 직접 걷는 장면, 바다에 바지를 젖어 가며 들어가는 장면 등 경계 밖으로 나온, 그리하여 조금 더 자유로워진 모습이 그려진다. 경계를 넘는 것, 어떠한 편견을 깨고 진짜를 마주하는 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장면이라 생각한다. 

+차의 창문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세차 씬에서도 함께 이야기할 예정. 



* 소영의 화장 

짙은 스모키 화장.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화장을 이어갔던 소영은 본인의 진짜 이름을 밝히고 나서부터 화장이 점점 옅어지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너무 뻔한 메타포라 해당 글에 적는 것도 큰 의미가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하나의 여정 속에서 변화된 모습을 지켜보는 것 역시 하나의 쏠쏠한 재미라 생각하기에 함께 적어보았다. 



* 세차 

 해진은 바다를 뻗어 나아간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작 해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울타리 안에 속해지는 것, 이를 테면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함께하는 것. 세차 때 창문을 열어 거품과 물을 함께 받아내는 것. 바다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충분하다. 이러한 모습은 월미도의 대관람차를 탑승했을 때, 상현의 무릎에 기대어 토를 참으며 세차를 더 지향해 하던 해진의 모습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해진이 원하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게 아니라, 바다를 건너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소속되고 함께하는 것. 본인의 이름은 목사가 지어주었다고 하지만, 자기의 이름은 자기가 충분히 찾아가고 새로 호명할 수도 있는 거니까. 

  앞서 차의 창문과 수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다섯 명이 찬 타에서 해진은 장난스럽게도 차의 창문을 슥 내려 거품과 물이 차에 유입되도록 유도한다. 차 안에서 차 밖으로 향하던 수진의 시선과는 대조된다. 차 밖에서 차 안으로 밀려오는 것들에 대해 다섯 명은 크게 불쾌해 하거나 어려운 상황이라 느끼는 대신 그저 웃고 넘긴다. 그게 그렇게 재밌냐고 웃으며. 경계는 넘나드는 것. 경계는 때론 선이지만 동시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차의 창문을 내려 외부를 받아 들이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불편함을 웃을 수 있는 것. 그리고 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이유에서 세차 씬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 같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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