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닿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신기함 너머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다. 대게 그것들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에 여운으로 인해 상기되는 것. 그 중 하나의 기억을 꺼내보자면, 대학교 때 학부로 전공했던 국어국문학과 수업 중 고전문학과 관련된 에피소드다. 해당 수업엔 매주 일정한 고전문학 콘텐츠를 읽고 본인의 생각을 기술하는 에세이가 과제였다. 고전문학을 매주 읽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충분한 고찰을 요구하는 서사들이 많아서 내 삶의 어느 지점과 함께 연계하며 종종 그 수업의 과제를 즐겼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수록된 <용궁부연록>은 정말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그 이유는, 나와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본 듯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에 대해 깜짤 놀랄 정도로 의문이 들어서. 마치 가닿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신기함이라고나 할까.
용궁부연록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몽유소설에 해당되는 이 작품은 주인공이 꿈 속에서 용궁으로 초대되었고, 거기서 겪은 일을 주로 다루고 있다. 글에 능한 한생이 꿈속에서 용궁으로 초대되어, 용왕의 청을 받아 이를 시행하니 용왕이 그 재주를 크게 칭찬하고 잔치를 베풀어 대접한다. 잔치가 끝난 후 한생은 용왕의 호의로 궁궐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골고루 구경하고, 구슬과 비단까지 선물 받는다. 하지만 꿈에서 깬 뒤 한생은 이를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명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해당 작품은 자신은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자 하나 세상은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데서 오는 작자의 불만을 드러낸 작품이라고도 일컫는다(용궁부연록 (naver.com)).
22살,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있는 그대로 솔직한 감상을 적어갔다. 한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좋은 걸 구경하고 왜 본인만 알고 있나, 얼마나 용궁이 아름다웠는지 더 많은 사람들과 그 경험을 적극 공유해야 한다, 어쩌면 그 꿈으로 인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일굴 수도 있지 않나, 왜 꿈에서 깬 뒤 도피해 버리나, 나라면 꿈에서 깨고 난 다음 이를 생생히 글로 적거나 그림으로 표현해 알리고 싶다 등. 과제 제출 이후 교수님께서는 몇 년 동안 보았던 용궁부연록에 대한 해석 중 가장 흥미로운 감상문을 하나 읽었다면서 내 과제를 익명으로 수업 때 읽어주셨다. 네? 이게 흥미롭다고요? 다들 나처럼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회사에서 홍보직무, 그 중 커뮤니케이션 쪽을 담당하고 있는 나는 흔히들 일컫는 '포장업'에 매우 능하다. CEO 메세지를 작성하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등 회사의 가장 좋은 면, 자랑스러운 점들을 모으고 모아 글로 편찬하고 널리 알리는 게 나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꽤 이 일을 애정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어느 사주에서 말한 것처럼 내게는 불(化)이 부족해 본능적으로 그것을 쫓는 직무를 하게 될 거라는 말이 정말 예언이 되었듯, 회사의 어떤 좋은 면이라면 뭐든지 뻥튀기처럼 크게 더 멀리 알리고 싶다. 흠, 정말 '본능적'으로 그러한 일에 이끌리는 걸까? 그러니까 그러한 일이라고 함은 무언가의 좋음을 내가 할 수 있는 특기를 동원해 널리 알리고자 하는 행위일텐데 이는 일명 나의 본 투 비(born to be)인 걸까? 다른 누군가는 꽤 흥미롭고 재밌는 순간을 목도해도 누군가들과 공유하는 대신 나만이 아는 비밀상자에 조용히 넣고 홀로 관람하고 만끽하고 싶은 걸까?
최근 추석 연휴 때 나랑 상반된 성향을 가진 정민이와 점심을 먹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또 한 번 나와 정민이의 차이를 느꼈다. 정민이는 주말마다 공방에서 나무로 가구를 만들고, 좋은 국내 여행지를 다양한 계모임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녀의 핸드폰 앨범에는 인생샷도 많고 좋은 풍경들도 있지만 정민이 말에 의하면 본인의 일상 모두를 사진으로 다 남긴 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 역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나 SNS에 결코 업로드를 하지 않는다. 비공개 계정으로 운영함에도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 공유하는 대신, 자기 전 앨범 속 사진을 보며 추억 여행하는 게 재미라고 했다..! 반면에 나는 모든 일상으로 사진으로 찍으며 네이버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에 활발히 공유하며, 매일 카톡하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도 거리낌없이 내 일상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도 있고 내가 보고 먹은 좋은 모든 것들을 나의 사람들에게 더 열렬히 알리고 싶다. 대체 나와 정민이의 차이는 무얼까?
*분량 조절 실패로 2편은 추후에 업로드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