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평서문으로 나를 이야기하겠다.
* 제목인 "예민한 애였구나,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은 정세랑의 <피프티피플> 38페이지에서 인용.
보름달 같이 아주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편에 속하는 외형. 누가 보더라도 귀엽고 강아지 같은 인상.
맏딸이자 친가 외가 통틀어 맏손녀로서 서울로 대학도 가고 장학금을 받으며 3전공을 얻어냈으며 취업도 일찍한, 살갑고 자랑스러운 아이.
누군가 나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면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적당히 둥글둥글한 인상에 성격도 밝은 편이고 사교적인 성향을 갖고 있으며 목표지향적인 삶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이다.
하지만 늘상 그렇듯 외적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진 않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책의 겉표지가 전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느끼는 나는 전혀 둥글둥글하거나 완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 뾰족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그리하여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감정의 증폭이 꽤 높은 사람이다. 또 다른 좋은 표현으로는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이야기가 있겠지. 그만큼 섬세하고 여린 마음에 이리저리 다치기도 하고, 남들은 쉽게 툭툭 털고 일어날 상처나 난관에도 쉬이 주저 앉아 있곤 한다. 하지만 남들이 인식하는 나와 내가 인식하는 나의 괴리가 점차 크게 느껴질 무렵, 나는 내가 어떤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잠시 관두었다. "나, 그렇게 둥근 사람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하면 "에이 겸손하기는, 너만큼 성격 좋은 사람 어딨어?"라고 되돌아 왔기 때문이었다. 나에 대해 내가 아닌 모습들로 규정 짓는 사람들게 나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봄날, 대학교 2학년 1학기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속해 있는 교내교지편집위원회에 후배가 들어왔다. 재수를 해서 나와 나이는 같지만 1학년 신입생이었고 딱 보기에도 굉장히 깐깐하게 생긴 남자애였다. 새로 들어온 그 친구와 선후배 사이의 흔히 있는 점심 약속을 잡게 되었다. 밥을 사주고 커피 한 잔씩 들고 교지편집실로 향하는 길.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전에 악기를 배우거나 다룬 적이 있냐는 주제가 나왔다. 그 친구는 현재 드럼을 배운다고 했고. 나는 그 친구에게 내가 어떤 악기를 배웠을 것 같냐고 물어봤다. 그런데 바로 그 친구가 "바이올린?"이라며 정답을 이야기했다. 이상하고 신기했다. 나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바로 정답을 맞출 수 있는 건지, 그저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에게 어떻게 정답을 추측했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너 뭔가 예민해 보여서. 바이올린이 예민한 감성이나 선율을 대변하잖아. 그게 너랑 잘 어울려서 맞혔어.
가던 걸음을 딱 멈춘다는 표현이 이렇게도 정확한 표현이었을까? 나는 정말 벙쪄서 그 친구를 바라보았다. 정작 그 친구는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빨리 안 오고 뭐하냐는 눈빛을 준 게 다였다. 그때 나는 어쩌면 놀라움보다는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나를 깊이 알지 못하는 애가 나를 알아준다는 생각에 글쎄,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가장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었던 내 약점이자 치부. 그러나 한편으로는 몰라줬으면 하는 마음도 공존하곤 했던 내 어떤 부분. 그걸 그 애가 봐준 거였다. (이 이야기하고는 큰 관계가 없지만, 나는 마치 아기오리가 태어나자마자 보는 존재를 엄마로 인식하고 졸졸 따라다니듯, 그 친구야말로 내 숨겨진 정체성을 알아주는 첫 번째 사람이라 인식해서 한동안 큰 관심을 갖고 따라다니곤 했다.)
사회생활이나 기타 여러 부문에 있어서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을 내 예민한 감수성. 그래서인지 내 예민함은 평상시엔 몸을 잘 감추고 있다가, 혼자 문화예술 콘텐츠를 즐기거나 여러 대인 관계에서 트러블이 있을 때만 종종 고개를 내밀어 등장하곤 했다. 그럴 때 내게 또 하나의 위안이 되어준 콘텐츠들이 있었으니,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한 최은영 작가님(최은영의 <밝은 밤>, 나의 밝은 밤들을 기억하며 (brunch.co.kr))의 여러 작품들을 비롯한 여러 문학들이 바로 그런 존재들이었디. 내가 예민함과 관련하여 위로를 받았던, 그 시초로 기억하고 있는 글은 바로 정세랑 작가님의 <피프티피플> 속 캐릭터 '윤나'에 대한 여러 묘사들이다.
- 예민한 애였구나,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보기보다 훨씬 예민한 애였구나. 애선은 속이 상했다.
- 윤나의 그런 면이 어렵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잘 웃는 사람, 친절한 사람,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결코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 특수한 촬영기기가 나와서 윤나의 복잡한 안쪽을 찍어볼 수 있다면, 환의는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도록 잘 배울 것이다. 윤나의 다치고 망가진 부분을 짚어 보일 수 있는 기계가 나온다면.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랑스러운 윤나. 주변 사람들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윤나라는 캐릭터에 나는 내 자신을 많이 투영시켰다. 예민한 기질을 가진 윤나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시선,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새삼 내가 다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쉬운 사람은 아니지만, 그런 윤나를 더 이해하고 느껴보려고 하는, 윤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시선을 따라가다보면, 예민함은 어느새 모난 기질이 아닌 하나의 특징, 그것도 사랑 받아 마땅한 무언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선은 최은영 작가님의 <쇼코의 미소> 속 '신짜오, 신짜오'에서도 등장한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나의 예민함은 본투비적인 거라 별도의 교정이나 치료가 필요한 영역이 아닌 그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줘야 하는 영역임을 작가님들의 글을 읽어 가며 알아가고 자연스레 위로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나여도 괜찮은 사람들 속에 살아감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너 너무 예민하다, 라는 표현 대신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인정해주는 친구들. 어느 날 책을 읽고 광광 울면서 통화해도 토닥여주는 애인은 나의 사나움에 대해 뭐라고 탓하는 대신 그대로를 받아주고 있다. 또 예민한 기질로 인해 몸과 정신이 피폐한 나날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어떻게서든 건강을 지켜주려고 하는 나 자신까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이상 예민함에 대해 감출 필요가 없는 거다.
예전에 나는 예민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의문문이나 감탄문을 쓰곤 했다. 내가 예민한가? 그런 건가? 혹은 아 나 좀 예민하네! 아 나 예민한 사람이네! 이런 식으로. 다소 극단적이긴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평서문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예민한 사람입니다.하고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다. 담백하게 드러내고 싶다. 그리하여 나의 예민함을 감추지 않고, 나의 그 어떠한 부분이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때로는 햇볕을 쐬어주기도 바람에 말려주기도 할 것이다. 이제 나는 평서문으로 나를 이야기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