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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Oct 17. 2022

뮤지컬 <엘리자벳>, 다섯 가지 질문과 답

자유와 죽음, 삶의 영역과 선택 막이 내리면 질문은 시작된다


뮤지컬 <엘리자벳>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했던 다섯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글을 짧게 쓰려고 한다. 




죽음은 왜 그녀를 삶의 영역으로 보냈는가 


이번 뮤지컬 <엘리자벳>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 죽음은 그녀를 사랑하나, 정작 그녀를 죽음의 영역이 아닌 삶의 영역을 밀어 보냈다. 대체 왜? 오히려 사랑한다면 자신의 영역으로 그녀를 들였어야 했지만 오히려 삶의 지점으로 그녀를 보낸다. 죽음이란 어떠한 끝을 본인(죽음)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고 싶어서일까? 그리고 원한다면 언제든지 엘리자벳의 생명을 가져갈 수 있었을 텐데, 언제나 엘리자벳의 자유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죽을뻔한 고비를 넘겨 시작된 또 다른 삶이었기에 그 전보다 더 죽음을 더 멀지 않게, 가까이 느낄 수는 있다는 게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겠다. 오히려 삶의 영역에서야말로 죽음을 더 느낄 수 있으니까. 죽음의 영역에서는 죽음이 대립된 가치를 지니지 않기에 큰 의미가 없을 수 있겠으나, 삶이라는 반대되는 지점에서야말로 죽음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더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빛과 그림자의 비유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아닌 빛의 영역에서야 말로 그림자가 제대로 보이니까. 그리하여 죽음은 엘리자벳을 삶의 영역으로 보냄으로써 모순적으로 본인의 존재감을 더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유와 죽음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엘리자벳은 극 중 내내 자유를 갈망하고 원한다. 엘리자벳을 대표하는 키워드가 자유라고 하였을 때, 죽음과 자유가 맺는 관계성은 무엇일까. 일부 입장에서 본다면 삶이 아닌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자 자유의지일 수 있다. 삶은 주어지는 것이라면 죽음은 선택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 그러나 여기서 죽음과 자유가 맺는 건, 위에서 이야기했듯 죽음이 결국 가르키는 건 삶이듯 죽음이라는 한계성과 유한한 삶으로 인해 보다 더 자유의 가치가 돋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끝이 있는 이야기라면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 엘리자벳의 또다른 이름 씨씨. 씨씨는 본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아이였다. 그런 씨씨가 죽음을 보았을 때 말했던 이야기는 바로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왜 그랬을까. 씨씨는 그 전에도 죽음을 마주했던 아이였을까? 나는 이 장면을 씨씨는 '메멘토모리'라는 가치관을 장착하고 태어난 존재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끝나는,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엔딩을 필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삶에서 씨씨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그 유한함을 극복하는 자유라고 믿은 건 아니었을까? 때문에 씨씨가 죽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은 곧 한계가 있는 삶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는 이야기의 또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루돌프는 돛단배, 엘리자벳은 새. 이 메타포가 갖는 상징성은


개인적으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좋아하는 넘버는 '행복은 멀리에'이다. 회전하는 무대 장치를 따라 천천히 돛단배가 엘리자벳의 손에서 멀어지는 걸 보면 너무도 많은 걸 응축하고 있는 연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여기서의 돛단배는 엘리자벳을 닮은 그녀의 아들 루돌프를 의미한다. 자유로운 항해를 하고 싶어했던 루돌프는 돛단배 그 자체이지만 격변하는 시대와 엄격한 관습은 그를 목졸랐다. 루돌프가 돛단배라면 엘리자벳은 새에 비유되곤 한다. 새장 속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새. 새장에 들어온 것은 엘리자벳의 선택이었으나 새장 밖을 벗어나는 건 새장 안에 들어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루돌프가 돛단배로 자유로운 바다 위 항해를 갈구했다면, 엘리자벳은 자유로운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을 갈구했으리라. 각각 자기만의 바다와 하늘 안에서 자유로움을 원했던 둘은 중력이라는 절대적인 법칙이 통하는 육지, 어떠한 세계에서는 결코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기는 처음부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엘리자벳이 가벼운 슬릿 드레스에 숄만 걸치고 부르는 '나는 나만의 것' 넘버에서 숄은 마치 날개처럼 보인다. 실제로 극 중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도 모든 무거운 장식구를 걸친 모습이 아닌 '나는 나만의 것'을 부를 때의 모습 그대로 죽음에게 안기낟. 새장 밖을 벗어난 새처럼 가장 가벼운 옷차림이자 편안한 모습으로 진정 원하던 세계로 날아갔다. 




반복되는 불통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EMK 작품들의 공통점을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세대간의 갈등이라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모차르트>부터 시작해 시대극을 다루면 숙명적으로 세대간의 불통을 주요 화두로 내세울 수 밖에없는 것 같다. 소피와 요제프의 갈등, 그리고 요제프와 루돌프의 갈등. 똑같은 주제로 롤만 바뀌었을 뿐이다. 누구나 관리자가 되면 지키고 싶은 게 더 커지는 걸까. 관리를 당하는 자는 언제나 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게 당연한 거고. 조금 더 나이가 어렸을 때는 관리를 당하는 자식세대들의 자유로움 갈망에 더 눈길이 갔는데, 이제는 그 자식들을 더 품고자 하는 억압스러운 포옹에도 눈길이 가게 된다. 덜 상처 받았으면 하는 바람. 균열을 일으키지 않고 유지하는 게 어쩌면 더 힘든 영역임을 인지하고 있는 고통. 반복되는 불통이라 생각했지만, 요제프가 소피의 롤을 이어 받은 것처럼 시간상의 문제일뿐 언젠간 루돌프도 본인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날이 왔을지도.




죽음의 존재를 앎으로써 우리는 


죽음을 의인화한 지점이 정말 매력적인 뮤지컬 <엘리자벳>. 친구랑도 이야기했지만 이 뮤지컬을 비단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로 응축시키기엔 아쉬운 게 한 둘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일 공포스러워하고 두려워할만한 존재인 죽음을 하나의 캐릭터로 설정한 그 이유부터 짚고 가야 이 뮤지컬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마치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 여신님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하나의 집단이 만든 것처럼 이 뮤지컬에서 죽음을 하나의 존재로 소환한 이유는 그 너머를 바라봐야 함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혼돈하는 시대, 격동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는 더욱 더 유한한 삶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더 역설적으로 내 삶의 중요한 가치를 하나의 신념으로 삼아 움직인다. 분명 이는 죽음이 곁에 있기에 가능한 지점이다. 무한하고 영원한 삶이라면 그 무엇도 의미를 지닐 수 없으니까. 오히려 언젠간 죽으니까, 라는 허무주의로 간다면 이 뮤지컬은 막이 올리는 동시에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의 존재로 인해 내가 갈망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는 엘리자벳을 뮤지컬에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 집중해서 보았던 것 같다. 오히려 엘리자벳은 죽음이 아닌 삶의 영역에서 더 고통스러웠다. 원치 않은 삶을 살고 사랑하는 존재들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정말 삶의 축복이었는지는 쉬이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더이상 이승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죽음에게 안겼겠지. 하지만 그 처연한 삶 속에서도 분명 마주했던 행복이 있었을 것이고, 그 순간들을 거치며 나의 자유와 이를 더 능가하는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자연스레 터득하고 받아들였다면, 엘리자벳의 삶은 자유 하나의 키워드가 아닌 더 깊고 복합적인 스펙트럼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막이 내리는 순간 우리는 저마다의 질문들을 가져간다. 죽음이 당신 앞에 찾아왔지만 다시 당신의 삶의 영역으로 보내줄 때 어떠한 삶을 살겠다고 스스로 약속할 것인지. 그리고 언젠간 다시 마주할 그 죽음 앞에 당신이 서 있을 때 당신은 두 번째 삶에서 무얼 배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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