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이 있나요? 배꼽이 없나요? 글쎄요,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을 듯해요
천선란 작가님의『어떤 물질의 사랑』은 <사막으로>를 포함한 여덟 편의 이야기가 담긴 단편소설집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정말 나에게 찐하게 다가왔지만 특히 <어떤 물질의 사랑>에 대한 나의 감상을 적어 내려가보고자 한다.
(『어떤 물질의 사랑』 수록 작품 : 사막으로, 너를 위해서, 레시, 어떤 물질의 사랑, 그림자놀이, 두하나,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 마지막 드라이브)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결심한 건 남자친구와의 통화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때마침 <어떤 물질의 사랑>에 흠뻑 취해 그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책의 내용을 묻는 그에게 ‘알에서 태어난’까지만 꺼냈을 때 남자친구는 SF 소설의‘신체 일부의 특이성이 전제 조건화되는 특징’에 대해 ‘또 그 이야기이냐고’라고 말했다(오빠는 아마도 정세랑 작가님의 『옥상에서 만나요』의 <해피 쿠키 이어>를 떠올린 듯했다). 그런 오빠의 반응이 나는 무척 재밌고 한편으로는 짜릿함을 느꼈는데, 대한민국에서 흔하지 않는 오드아이로 살아가는 내가 왜 SF 소설에 큰 흥미를 느꼈는지 그 연결고리를 찾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과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왜 그리 정세랑 작가, 김초엽 작가 그리고 천선란 작가의 작품집을 샅샅이 읽고 다니는지, 그게 한 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는데 “드디어 찾았다!” 싶은 마음이었다. 신체 특이성을 가진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SF소설이 누군가에게는 조금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오드아이로 살아가는 나에게는 대입하기 가장 쉬운 몰입지점이자 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었기에 어떤 측면에서 보면 가장 현실적인 공감이 쉬운 영역이었다.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안녕, 오드아이. (brunch.co.kr)
『어떤 물질의 사랑』의 표제인 <어떤 물질의 사랑>에선 알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등장한다. 왜 알에서 태어났는지, 남들 다 가진 배꼽이 왜 나한테 없는 건지 묻는 주인공에게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원래 그런' 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 그러니까 애들이 당연하다거나 네가 이상한 거라고 하는 거 다 듣지 마. 그거 다 너희가 아직 어려서 상대방 상처 주려고 하는 말이니까. 알겠지?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억지로 하나를 맞췄다가 너를 영영 잃을 것 같았어. 그럴 바에야 그냥 너는 너 자체로 살아가는 게 더 맞겠다 싶었어. 배꼽이 없으면 어때. 틀린 것도 아닌데.
와, 나의 지난 상처들이 절로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두 눈 색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받아온 내 지난 상처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페이지였다. 그래, 당연한 건 없는 거니까. SF 소설 안에서는 내 오드아이 하나쯤은 정말 별 코딱지 같은 존재감일 수도 있으리라. 소설 속 주인공에겐 배꼽이 없다는 것 외에도 놀라운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주인공에게는 생식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어떤 대상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의 성(性)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너는 남자가 될 거야, 민혁이를 사랑하는 동안
이 지점도 놀라웠다.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세계가 아닌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그 상대의 성을 따라 갖게 된다니, 오히려 동성애의 자연스러움을 납득시키는 구간이라 꽤 흥미로웠다. 주인공은 민혁이를 사랑하고, 또 다른 언니를 사랑하게 된다. 언니가 가진 생리통에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언니의 평안을 바라며 상대를 오롯이 이해하려는 순간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의 이해를 보여준다.
언니의 행복을 바라는 것에 이유는 없다.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도 언니의 등을 쓸었던 것처럼, 사랑했기에 그것은 당연한 바람이었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그 누구보다 사랑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 같다. 카멜레온이 주변의 색을 닮아가듯, 사랑하는 사람의 성(性)을 따라가는 게 사랑이라면 상대방을 닮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인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할 때마다 변화하는 모습이 진정 자연스러운 영역인지. 사랑은 대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그때 주인공 앞에는 아빠라 일컫을 수 있는, 아니 어쩌면 또 다른 나의 부모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를 통해 누군가를 보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바다도 하늘도 아닌 우주를 가로질러 올 수 있다’는 것이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알게 된다. 주인공의 지난 사랑들은 단순히 나의 성(性) 변화 일대기가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간 게 아닌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자리를 굳혀 비로소 내가 되게 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누굴 사랑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어차피 서로에게 새로운 우주일 테니, 그러니까 ‘모두가 서로에게 외계인’일 테니 겁먹지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고 ‘끊임없이 사랑을 하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한다.
<어떤 물질의 사랑>은 비단 관계 속에서 오는 사랑만을 담아내지 않았다. 나로 태어나 나를 사랑하기 위한 과정도 잘 담아냈다. 누굴 좋아하느냐에 따라 바뀌는 성에 대해 이질적인 감정을 느끼며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닌, ‘언제나 변하고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나’를 이내 받아들이는 것 역시 사랑의 일부임을,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임을 고백한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누군가를 알아가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또 한 번 전제되는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아갈 수 있다는 것. 당연한 이치를 아름다운 동화 같은 단편소설 한 편에 담아낸 천선란 작가님의 스토리텔링이 참 좋았고, 따뜻했다. 그래서 소설이 끝나면서부터 시작될 주인공의 사랑 찾기 여정이 더 반짝였던 것 같다. 누굴 만나든지 누구와 사랑을 하든지 주인공은 주인공으로서 오롯이 행복할 것이라 믿게 되었다, 다만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한 상대방을 만나길 바랐다. 본인처럼 배꼽이 없을, 혹은 배꼽이 아닌 다른 신체기관이 없더라도 주인공은 충분히 그를 환대할 수 있으리라.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를 알아주는 사람 (brunch.co.kr)
<어떤 물질의 사랑> 외에도 보석 같은 작품들이 많았던 『어떤 물질의 사랑』. 다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몇 작품만 짧게 이야기해 볼까. 개인적으로 이 책이 정말 괜찮다고 느꼈던 순간은 <어떤 물질의 사랑> 직전 <레시>에서였다. 서사 자체가 가진 먹먹한 감동이 있었고, 정말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이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게 되는 순간에 대해 모두들 한 번쯤 환상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 책을 읽고 나서도 일상 속에서 그 여운을 만났던 것 같다.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직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네가 죽지 않고 끊임없이 해수면 밑으로 떨어지고 있을 거라는 예감. 그러다 돌연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는 불가능의 확신. 우리의 이별이 지구에서만 일어난 일일 거라는, 스스로를 향한 같잖은 위안까지도.
<그림자놀이>를 보면서 누군가의 고통을 나눠 갖는 방식은 진짜로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네가 아파하는 걸 내가 나눠가지는 거야.
아픔을 나누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아픈 사람이 더 늘어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너의 아픔을 공유하고 나눠 갖고 그로 인해 네가 덜 힘들어할 수 있다는 그 마음만 전해진다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때론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위안을 얻곤 하니까. <두하나>가 가진 여운도 <레시>와 비슷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주는 끈끈한 그리움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마음일까, 둘 중 무엇이 더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끝에서는 충분한 위안이 기다리고 있길 바랄 뿐이다.
나는 꽤 SF 단편 소설을 지속적으로 읽고 있다. 말이 SF이지, 실상은 관계에 대해 그 어느 장르보다 가장 투명하게 가장 깊게 보여주는 장르라 생각한다. 공상적인 요소는 서사 전개의 집중도를 높이고 보다 더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래서 나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SF의 붕 뜬 소리가 길을 더 밝혀주는 가로등 같이 느껴진다. 더 정확한 방향을 안내하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주목해야 해,라고 직관적인 설명을 이어가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난 SF소설을 통해서 나를, 우리의 관계를 더 깊게 성찰할 수 있게 되고, 계속해서 SF소설을 찾는다. 작은 환상쯤 가슴에 품고 살아야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