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가 인생 영화가 되었다. 왜냐면,
이제 나는 내 취향의 예술 문화 콘텐츠의 결을 얼추 알 것 같다.
해당 콘텐츠의 서사가 내 삶의 일정 부분과 공명되는 그 지점, 그에 대해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떤 포인트가 내 감정을 건들었는지! 물론 보통은 다 비슷한 범주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지독하게 파고 들고 싶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나를 새롭게 발견할 것 같아서.
아래 글은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를 재밌게 감상한 나의 개인적인 리뷰 서평 후기 정도의 글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쭉쭉 시원하게 뻗어 나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종종 나의 지난 길들 돌아보며, 그때 못 지켜준 나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비효율적인 사람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꾸 ‘만약에’를 기어코 말하는 사람. 그래서 말인데, 나는 2016년 기숙사 1인실에 살던 그때의 나에게 딱 하나만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다.
어느 평화로운 주말, 맛있는 디저트를 가득 안고 푹신한 침대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를 봐!
그 영화가 네 외로움을, 네 좌절감을 기꺼이 껴안아 줄 거야.
이렇게 좋은 영화인줄 알았으면 진작에 찾아볼걸. 평상시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유독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는 뒷전이었다. 살짝 유치할 것 같기도 하고, 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에게는 거리가 멀 거라 생각했는데, 완벽한 나의 착각이었다. 평상시에 영화라는 영상 콘텐츠를 즐기지 않는 나지만 비교적 시간 여유가 있었던 이번 설 명절에 넷플릭스를 통해 <마녀 배달부 키키>를 만났다. 그리고 그렇게 키키는 내 인생 영화목록에 올라갔다.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는 키키가 13살이 되던 어느 날, 검은 고양이 지지와 함께 빗자루를 타고 가족들 곁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이야기는 길을 떠나는 순간 시작되는 말처럼 키키는 가족들의 품을 떠나 홀로서기에 도전한다. 비록 시작부터 폭풍우를 만나고 잠시 쉬려고 간 기차에서 단잠을 잤지만 키키는 그토록 원하던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 정착하고자 결심한다. 낯선 곳에서도 우왕좌왕 헤매지만 우연히 만난 빵집 주인 오소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항구마을에서 배달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좌충우돌 난관을 겪어가는 키키의 여정이 영화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키키는 배달 실수를 겪기도 하고, 오해를 만나 고충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본인을 환대해 주지 않는, 그래서 자신을 더 작아지게 만드는 타인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쉽게 세상에 내 자리 하나 비집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는 키키는 좌절감과 소외감을 맛보며 성장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키키의 나날들이 따스히 이어질 수 있는 건 선의를 베푸는 오소노 아주머니와 더불어 숨은 조력자들 그리고 호의를 가지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가며 본인의 세계를 조금씩 확장하는 키키는 낯선 변화도 맞이하는데, 같이 고향을 떠나온 정든 친구 지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타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고양이겠지만, 본인과는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이 되어 왔던 존재였음에도 키키는 어느 날 지지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된다. 키키는 이를 ‘마력이 떨어져서’로 해석하였으나 다른 차원에서도 충분히 고민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지는 키키가 아닌 자신의 동족인 예쁜 하얀 고양이와 더 시간을 많이 보내기 시작했고, 언제까지나 키키에겐 지지가 지지에겐 키키가 절대적으로 가까울 존재일 순 없다. 세상 어디에도 변함 없는 관계가 없듯, 키키와 지지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이에 단 둘이 있어도 서로의 소통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연출을 보여준 거라 생각했다.
대신 키키에게는 슬럼프에 대한 같은 경험과 감정을 나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언니 우르술라가 있다. 절망에 빠진 키키에게 우르술라는 자기의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말한다.
그리는 걸 관두지.
산책을 하거나, 경치를 구경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무것도 안 해.
그러는 도중 갑자기 그리고 싶어지는 거야.
우리의 여정이 따뜻한 볕들 날만 가득하면 좋겠지만, 때로는 패배감으로 젖은 축축한 날들도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럴 때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보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진실되고 포근한 조언을 건네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키키에게는 키키의 능력을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친구 톰보도 있고, 키키의 실수를 기꺼이 눈감아주는 센스쟁이 강아지 제프도 있다. 또 키키의 도움을 기꺼이 필요로 하고 키키를 응원하는 할머니도 있으니 키키가 마주한 사회는 여러 관계 속에서 더 멀리 뻗어 나갈 수 있을 테다. 때론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 상처 입을지라도 더 좋은 쪽으로 나를 봐주는 이들에게 잠시 기댈 수 있으니.
한편, 키키가 마녀라는 설정에 대해서는 생각할 지점이 꽤 존재한다. 보통 마녀라는 이미지는 악녀에 가까운 프레임이 쉽게 씌워지곤 한다. 그러나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마녀가 별종이나 기괴한 정체성이라는 부정적인 편견 대신 일반인들에게도 크게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형성되었음이 흥미로웠다. 특히 키키의 엄마는 약을 제조하기도 하는 등 평범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마녀임이 누군가의 전부라기보단 일부, 이를테면 일종의 직업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관점 하나. 마녀라는 특수성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아닌 일정 수준의 이해와 암기로 산뜻하게 넘어가는 사회라는 관점 하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키키의 여정에 더 주목하고 싶었다. 상처 받고 좌절하지만 누군가의 도움과 몇 가지의 과정들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키키.
키키는 그렇게 하나의 주체가 되어 간다. 엄마의 빗자루 대신 자신이 손길이 닿은 빗자루를 직접 만지고 다루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달려가면서 키키는 자신의 이야기 속 진정한 주인공으로 한층 더 다가선다. 그래서 <마녀 배달부 키키>는 내가 나로서 오롯이 설 수 있도록 독립하고 나아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콘텐츠이다. 때문에 내가 스스로 혼자 서는 법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좌절했던 2016년의 나에게 이 영화를 보라고 귀띔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결코 만만치 않았던 몇 가지의 시련들을 겪으며 나라는 사람이 너무도 작아졌을 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를 마주하며 기가 꺾일 때. 그때 이 영화를 봤으면 조금이라도 울적한 웅덩이를 조금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도 그 시절이 존재했기에 영화를 보며 그때의 나를 소환하고 더 이해하고 긍정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또한 결국 구원은 관계에서부터 나옴을 다시금 느꼈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다정함’이겠지.
이제 나는 키키의 서사가 아니라 키키 주변의 서사를 따라가고 싶다. 키키에게 선의를 베푼 사람들. 그 넉넉한 마음의 여유와 타인을 기꺼이 품어줄 수 있는 따스함을 배우고 싶고 누군에게 온전히 전하고 싶다. 키키가 아닌 다른 인물들에 시선이 가는 것은 필히 내가 받아온 누군가의 다정함 덕분임을 잘 안다. 하나의 영화를 보면서 여러 인물들을 곱씹어 보는 재미가 있다는 건 곧 내 안의 또다른 영화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녀 배달부 키키>의 마지막 장면은 별도의 대사 없이 키키를 둘러싼 일상의 연속이 그려진다. 잔잔한 파동이 있는 삶. 햇빛이 따사롭게 비추는 날도 있고 울적한 먹구름이 드리우는 날도 있겠지만 내가 맺은 관계들 속에서 나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마주하며 나아갈 것이다, 천천히 앞으로.
더불어 키키도 언젠간 또다른 키키를 만나게 되겠지. 그때의 키키의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