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더기, 기억 그리고 감정에 대한 단상
2020. 11. 12.에 작성한 글
얼마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더기를 보았다.
대리님들과 함께 연구소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 중이었다.
구더기를 보게 된 건 쌓여가는 쓰레기를 보며 더 열심히 쓰레기를 줍겠다는 다소 쓸데없는 의지를 불태운 탓이다.
화단 깊숙이 박혀져 있는 비닐봉지를 집게로 꺼낸 순간.
제일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구더기였다.
- 아으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네
- 너무 깊숙한 곳에 있는 걸 굳이 꺼내지 않아도 돼
대리님들의 한 마디씩들을 듣고 차마 이 구더기가 주렁주렁 붙은 비닐봉지를 처리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만 덕담 주고 받듯 여러 번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두고 연구소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본 구더기.
대리님은 비가 오던 어느 날 꿉꿉하고 습하던 탓에 비닐봉지에 구더기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된장에도 나오는 게 구더기이니 너무 놀라지 말자며 웃었다.
구더기는 비닐봉지에만 붙은 게 아니다.
굳이 안 들여 봐도 되는 기억에 손을 뻗어 그때의 감정을 지금으로 소환하는 것도 구더기를 마주하는 것이다.
마들렌의 달콤한 향이 유년 시절의 꺼내는 것처럼, 코 끝에 머무는 차가운 공기가 유독 힘들었던 그 겨울을 꺼냈다.
괜찮다고, 그 시절로부터 멀어졌으니 이제는 문제가 없다 믿고 싶은 건 오늘이라도 잘 살고 싶은 욕심이다.
하나하나 헤아리지 못하고 덮어두었던 감정들이 손을 내미는 거다.
알아봐달라고, 잊지 말라고, 정말 외롭고 힘들었다고.
우리를 잊고 어떻게 지금을 살 수 있냐며.
그럴 땐 구더기들을 외면하는 게 답인가.
그래서 다음 번에 마주했을 땐 더 큰 구더기를 기어코 만날 수 밖에 없는 건가.
아니면 장갑을 끼고 구더기 하나하나를 떼어 내며 구더기가 붙어 있기 전의 모습을 찾아주고 위로해 줘야 하나.
나는 장갑을 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