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내야 한다. 희수 언니랑 그렇게 약속했다.
희수 언니는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바로 위 선배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동아리 소개를 하러 왔던 희수 언니의 모습을 기억한다. 희수 언니는 밴드부의 보컬이었다. 희수 언니를 본 순간 나는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음에도 꼭 밴드부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희수 언니는 밴드부 오디션을 보러 온 나를 반겨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악기를 다룰 줄 모르는 점도, 음색이 비슷한 점도 자신과 닮았다며 나를 좋아해 줬다. 단점이 장점이 되는 걸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여러 후보들을 제치고 나는 밴드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희수 언니가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나는 희수 언니와 정기 공연에서 부를 노래를 정하고 화음을 맞추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우리가 부르기로 한 노래는 한로로의 <0+0>이었다. 기분이 울적해서 노래를 부르다 울어버린 적도 있는데, 희수 언니는 그 순간마저도 다정하게 나를 달래주었다. 연습을 뒤로하고 세 시간을 앉아서 희수 언니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했고, 기분이 좋을 때면 희수 언니를 끌어안고 병아리가 된 것처럼 조잘거렸다.
그날은 뭔가 이상했다. 한 번도 연습에 늦지 않았던 희수 언니가 한 시간 늦게 나타났다. 눈은 퉁퉁 부어있고 그 모습을 애써 숨기려 세수를 하고 온 듯했다. 원래 연습에 지각하면 지각비를 내야 하는데 다른 동아리원들은 희수 언니의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만 아무것도 몰랐다. 표정이 좋지 않은 희수 언니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는데 동시에 서운했다. 난 우리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희수 언니에게 모든 걸 이야기했는데. 희수 언니는 나의 모든 걸 알고 있는데 정작 난 희수 언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들 짐을 싸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희수 언니와 단둘이 나가기 위해 미적거렸다. 모든 동아리원들이 다 나가자 희수 언니도 천천히 일어났다. 어떤 말로 희수 언니를 붙잡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망설이다가 아무 말이나 뱉어버렸다.
"언니. 나 버릴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널 왜 버려." 희수 언니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아파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희수 언니는 나를 한 번 꽉 안아주었고 나는 안겨서 이유 모를 눈물만 흘렸다. 나도 따라 웃어줄 걸 그랬나 보다. 그 아픈 웃음이 내가 본 희수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희수 언니가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한 뒤,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희수 언니를 향한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고 선생님들은 그 소문을 막아보려 애썼다. 나도 희수 언니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날 버리지 않겠다고 말해놓고 떠나버린 언니를 원망하다가 슬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로로의 <0+0>은 나 혼자 부르게 됐다.
언니는 이제 영생과 영면의 차이를 알고 있을까. 전주가 시작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희수 언니가 사랑해 줬던 내 목소리가 이젠 끔찍하게 들린다.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검은 눈동자가 싫다. 그래도 끝까지 노래를 부른다. 진심으로 언니에게 묻고 싶어서.
난 우리를 영영 잃지 않아.
너도 영영 그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