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지 않고 다 이야기할게.
H에게.
잘 지내? 나는 잘 못 지내. 네가 잘 지내길 바라면서도, 나를 떠올리면서 힘들어하길 바라는 내가 참 어리석다. 이 어리석은 마음을 정리하려고 편지를 써. 그저 네가 잘 지내기만 했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편지지만 그럼에도 진심을 담아 쓸 거야. 마치 네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네가 내 옆에서 나의 안부를 물어주고, 나와 입을 맞추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너와 잔디밭에 누워서 들었던 노래들을 다시 들으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온통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들 뿐이네. 근데 난 왜 그렇게 불안했을까. 그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던 걸까. 분명 넌 이런 나를 떠날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열심히 도망쳤던 것 같아. 내가 덜 다치려면 너와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럼 너는 내가 떠난 발자국을 거슬러서 변함없이 나에게 왔지만 나는 더 멀리, 아주 멀리까지 발자국을 다시 새겼어. 그게 네 마음에는 발자국이 아닌 못을 박는 것과도 다름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도망쳤어. 오로지 나를 위해서. 이기적이고 못되기만 한 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 넌 이 이별을 받아들이겠지만 모든 게 서툴렀던 나는 아직도 기적을 꿈꿔. 너와 다시 만나서 내가 바보 같았다고, 그러니까 돌아와 달라고, 제발 나를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는 그 기적.
그러니까 그때까지 잘 지내자. 끝까지 불안하고 무서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어. 기약 없는 기적을 기다리는 건 나의 몫이니까 너는 잘 지내기만 했으면 좋겠어. 잘 지내다가 우연히 스치게 된다면 그때는 도망치지 않고 다 이야기할게.
또 편지할게.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