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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의 골목이 실어 온 기억

비-스토리 넘버원

by 해먹

열세 해 전이었다.

만으로 스무 살이 되던 해 두달 여간 떠난 인도여행은 이미 중반부에 들어섰고,

나는 함께 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컨디션 악화로 귀국하게 되면서 혼자가 되어 바라나시에 당도했다.


인도인의 영적 물줄기인 갠지스강이 흐르는 도시,

수많은 인도인들이 생의 마지막을 신성한 강에 맡기려 이곳에 모여들지만

고온다습한 날씨 탓에 도착하자마자 턱에 땀띠가 난 배낭여행자에겐

'도시에 거대한 습기만 더하는 존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묵는 게스트하우스에 여정을 풀었다.

천장에는 선풍기가 미지근하게 돌아가며 미약하게나마 열기를 잠재웠다.

하지만 불안정하기 그지 없는 전기가 나가버리면 몰려오는 열기에 잠을 이룰 수 없어

결국 숙소에 묵는 모든 여행자들이 옥상으로 올라와 불어오는 강바람을 이불 삼아 겨우 다시 잠을 청하곤 했다.


그 숙소의 옥상에는 많은 것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의 담소와 지나온 여정의 기억, 갠지스강이 보내는 시원한 밤바람,

누군가가 이십여분 걸어가 어렵게 사온 맥주와 함께 피어나는 문명에 대한 감사함도.

저녁이 찾아올 하늘이 어스름할 무렵에는 옥상 난간 너머로 푸르스름한 갠지스 강을 볼 수도 있었다.

낮에는 마치 갈색 묵처럼,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무겁게 흐르던 강의 움직임이

이상하게 푸르스름해질 무렵이면 세차게 느껴지는 듯했다.


사실 같이 여행을 출발한 일행들과는 다 흩어졌지만, 바라나시에 같이 오게 된 사람이 있었다.

뉴델리 기차역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표를 예약하면서(그 당시엔 외국인들은 다 예약사무소에 가야만 표를 살 수 있어서 많은 여행자들이 그곳에서 만나곤 했다.)

서로 곧 각자의 일행과 떨어져 바라나시로 가게 되는 여행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군대를 막 전역하고 여행 온, 나보다 두어 살 많은 남자였는데 군대에서 담뱃값도 아껴가며 돈을 모아 여행을 오게 된 거라고 했다.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도 그가 어디선가 들은 정보로 오게 된 거였는데

처음 바라나시에 와서 이틀 정도는 그와 이리저리 시간을 많이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것처럼 서로 호감을 가져 운명적인 만남이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딱히 그런 감정이 들지는 않았고, 그저 한창 활동하던 대학 동아리 선배와 닮았다 정도의 감상을 가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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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갠지스강이 푸르게 보이는 이른 저녁시간 옥상 난간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조심히 올라오라고 살짝 내민 손길에, 강과 나란히 보이던 그의 옆모습에

순간의 시간과 분위기가 내게 '지금은 조금 설레도 돼.'라고 말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호감이 없던 사이었기에 잠깐의 설렘 정도로 끝났을 뿐,

서로가 다른 상대였다면 운명적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습기를 내뿜던 낮의 강은 설렘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낮엔 시장 골목을 돌아보고

가트에 나가 하릴없이 앉아있기도 했다.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개나리색보다 조금 더 진한 노란 천이 펼쳐져 달려있는 풍경들이 보였다.

아마 수많은 색색의 천들이 매달려있었을 터인데, 이상하게 나에게는 그 노란색이 너무 강렬해

내 기억 속에는 바라나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개나리색 천이 떠오르곤 한다.

색색의 천 밑으로는 뿔난 소가 유유히, 커다란 몸집을 아랑곳 않고 좁은 골목을 걸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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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좁은 골목을 지나가려는데, 골목을 완전히 가로막은 소가 버티고 있었다.

한껏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나를 보고는 꼬마아이들이 키득키득 재밌어하다가

친절하게도 소를 몰아 내가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쯤부터, 나는 골목 사이로 비추는 태양 빛의 각도와 색,

그리고 아이들이 골목에서 놀고 있는 소리,

오후의 약간 늦은 공기의 템포를 통해 내 유년시절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라나시 골목에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기분과 감각들이 하나둘 투영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약간은 울고 싶어 지는 기분이었다.

온통 빛바랜 필름 색으로 떠오르는 내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속에 갈색 묵같은 갠지스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여섯 살 무렵까지 우리 가족은 두 살 어린 남동생과 함께 넷이 단 칸 방에 살았다.

주방과 화장실은 밖과 이어져 있어서, 겨울엔 엄마 손을 잡고 목욕탕에 다녀오던 길이 아직 생생하다.

먹고, 얘기하고, 잠도 자고, 모든 생활이 이루어지던 그 단칸방엔 누런 빛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온 가족이 늦잠을 자는 일요일에는 햇살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온 방이 아주 따스한 누런 빛으로 가득했다.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느낄 수 있는 온기와 햇살의 따스함,

그게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색이자 사랑의 기억이다.

그 색을, 그 빛을 십수 년 만에 보게 된 게 아이러니하게도 몇천 킬로미터는 떨어진 이곳에서였던 거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이 울 것 같은 기분은, 아득한 기억이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인 걸까,

너무나도 일찍 철이 들었던 내 유년시절, 어렸지만 그 감정들을 다 느낄 수 있었던

그 꼬마에 대한 아픔인 걸까.


십수 년 전 처음 여행을 시작하며

나는 여행을 통해서 무언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게 뭔지 아직도 다는 모르지만 단 몇 가지는 알 것만 같다.

믿음직스러움, 자랑스러움, 또 그런 비슷한 어떤 책임감 같은 존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동생과 둘이만 남은 어린이집 교실에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종종 남을 때가 있었다.

하루는 화이트보드에 낙서를 하다가 아마 유성매직을 그어버렸나 보다.

평소엔 잘만 지워지던 매직이 지우개로도 지워지지 않으니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이 발견하면 혼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생에게 그 당황스러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근두근 하던 마음을 끝내 참은 그때가 아마 대여섯 살쯤 되었을 무렵이다.


내가 필연적으로 여행을 좋아하게 될 사람이었다는 것도 대여섯 살의 기억을 통해 증명된다.

여느 때처럼 어린이집 하원하는 차를 기다리던 중 문득 집에 혼자 찾아가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일종의 모험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렇게 대열을 조심스럽게 빠져나가 혼자 씩씩하게 집을 찾아가던 중 갈림길과 마주쳤다.

한쪽은 모래밭이 가득한 공사장, 한쪽은 그 뒤가 보이지 않는 언덕길이었는데

조그맣던 내게는 그 갈림길이 마치 사막 가운데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무서움에 엉엉 울고 있기를 얼마간, 다행히 뒤에서 어린이집 차가 나를 발견하고는 선생님이 뛰어 내려와 나를 차에 태웠다.


이렇게 씁쓸한 실소가 터지는 작은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바라나시의 골목은 온통 내 유년시절의 모습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 골목을 거니는 내 눈은 무슨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골목엔 아이들이 쇠똥에 불을 붙여 탄약놀이를 하고 있었다.

원래 검은 건지, 흙탕물에 검어진 건지 모를 개들이 몸을 털 때마다 까만 먼지가 몸에 달라붙었다.

관광객을 찾아다니며 강제로 축복을 쥐어주고 돈을 받는 사두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 날은 그렇게 온통 낯섦 속에 작은 나를 마주하면서 온통 따스히 지는 햇살 속에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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