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해먹에서 토끼 같은 눈망울이 초롱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온마르코였다.
나는 그와 짧은 순간 서로의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부터 그에게 묘한 동질감과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는 인상 깊었던 여행지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는 무려 '지상낙원'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이며 어떤 섬에 대해 내게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언제든 또 가고 싶을 만큼 자신이 좋아하는 곳이라고 했다.
또 그와 섬 중앙의 조용한 오솔길을 걷기도 했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돌아갔을 길일텐데, 그와 함께 걷자니 그 고요함이 좋았다.
그렇게 그와 사흘간 섬 곳곳을 다니면서 아마 나도 모르는 새 손목을 긁힌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주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 동행이 끝나고 각자의 여정으로 그를 배웅하는 순간 눈물이 터진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 혼자 여행을 이어가면서 며칠간 이어진, 파도같이 몰려오는 그리움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파도에 올라타느냐 아니면 소금물을 삼키느냐의 기로에서 고민하다가, 쓴 속을 달래느니 무모하지만 파도에 올라타보기로 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 일정을 조율해 그가 여행 내내 얘기했던 그 '지상낙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때로 젊은 사랑은 풋기를 동반한 무모함으로 나타난다.
아마 무모함에 색이 있다면 청사과를 닮은 푸른색일 것 같다.
그렇게 그와 헤어진 지 꼬박 2주 만에 쿠알라룸푸르에서 그를 조우했다.
다시 만난 반가움과, 계획에도 없던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렘이 공존한 채였다.
말레이시아 동해안에 자리한 티오만섬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그만큼 그곳에 닿으려면 쿠알라룸푸르에서 머르싱이라는 도시까지 대여섯 시간을 버스로 이동한 후,
다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엔 으레 관문이 있는 것이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에 오르니 특이하게 가로로 세 자리가 있는 널찍한 좌석이 보였다.
버스는 꽤 오래됐는지 에어컨이나 다른 이곳저곳이 망가지고 쾌쾌한 냄새를 풍겼다.
한숨 나른하게 자고 일어나니 몸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몽롱한 느낌이 가득한데 창 밖엔 거대한 팜유 농장에 나무들이 끝도 없이 열을 맞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다음은 옅은 녹색의 낮은 초목들이 나타났다. 사바나 기후가 실감되는 풍경이었다. 또 그다음은 키가 큰 열대 가로수들이 눈앞을 채웠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엔 빗줄기가 떨어진다. 구름과 부슬비로 버스의 더위가 한층 가셨다.
나는 한 편으론 버스가 나를 얼른 목적지에 데려다주길 원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이 평화로운 순간이 조금 더 지속되길 바랐다.
덜컥이는 소리만 가득한 버스에서, 쾌적하지만은 않은 이 공기와 함께 이름도 낯선 목적지로 향하고 있는 이 아무것도 아닌 그 순간이 새삼 설렜기 때문이다.
다섯 시간 만에 버스에서 내려 약 한 시간 배까지 타고 들어오니, 우리가 티오만섬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게다가 그가 목적하던 곳은 다시 보트를 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라 첫날은 티오만섬에서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묵는 ABC에 내려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러 ABC 지역의 남쪽 해안 끝까지 걸었다. 걷는 동안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길에 작은 개구리들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찌르르하는 벌레소리가 해변 바로 뒤로 우거진 숲에 가득했다. 가끔 밝혀진 불 아래로 여행자들이 앉아 있는 게 보일뿐, 섬의 길은 어둑어둑했다.
바다 바로 앞 숙소에서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푹 자고 일어났더니 쨍한 하늘 아래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아주 이국적인 해변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북적북적하던 인기 관광지와 다르게 헤밍웨이의 소설에서만 보았던 평온한 바다가 펼쳐진 것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