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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어지면 여기로 와야겠다. 티오만 下

비-스토리 003

by 해먹

"Oh, He is online!"

낙원에는 술과 먹을거리가 제한적이기에, 마지막 보급품을 챙기는 군인들처럼 면세상점에 들러 쇼핑을 하던 중 마르코의 상기된 외침이 들렸다.

유선도, 인터넷도 없는 그 낙원의 주인장이 인터넷이 잡히는 다른 항구에 와 있다는 뜻이다.

21세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얇은 연결의 실타래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그 길로 스쿠터 옆에 달린 수레와 히치하이킹을 대중교통 삼아 그가 일러준 한 펍에 도착했다.

여느 비치프론트 펍과 비슷하게 느긋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다른 점이라면 여길 누가 올까 싶을 만큼의 고요함이 가득했다는 거다.

붉은 꽃나무가 흐드러진 해먹을 나 혼자 전세 내어 흔들흔들거리고 있자니, 볼 일을 마친 낙원의 주인장이 펍에 들어섰다.



허리만큼 오는 레게머리를 자랑하는 아바스는 장난기 어린 특유의 표정으로 마르코와 반갑게 인사한 후, 내게도 친근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보트에 태워 티오만의 지상 낙원인 니파해변으로 안내했다.


보트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은 가기 어려운 곳이 분명했다.

영화 '더 비치'에서 주인공 무리가 낙원을 찾아가던 과정이 떠올랐다.

거기서도 몇몇 일행은 낙원을 찾아오던 길에 죽음을 당하고, 주인공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몇몇만 살아남아 그들만의 낙원인 마야베이에 다다른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그런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의 유토피아, 번잡한 세상과 동떨어진 우리만의 바다.

그리고 니파해변에 첫 발을 내디딘 순간 나도 모르게 디카프리오가 마야베이에 도착했을 때 느꼈을 그 감격을 느낄 수 있었다.


해적 같은 머리를 한 주인장의 뒤를 따라 보트에서 내려 모래사장 위에 있는 오두막에 다다랐다.

오두막은 숙박객 모두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었는데 조개껍질이며 코코넛이며 각종 이 해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오목조목 장식되어 있었다.

니파해변의 옅은 모래색과 빛바랜 페인트까지 이곳의 매력을 한 층 더하는 듯했다.


오두막 앞에서 원피스의 나미처럼 숏컷 스타일을 한 아바스의 여자친구 오야가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뒤로는 푸른 눈의 손님들이 여럿 보였다.

알고 보니 스웨덴과 덴마크, 바이킹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만 들으면 정말이지 말라카 해협의 해상 무역이 아주 활발했던 시절 해적들의 소굴이 재현된 들리지만

실제로는 사랑스러운 은발머리의 엘리자베스와, 한 살배기 동생이 있는 친절한 부부와 아주 시원시원한 성격의 젊은 커플이었다.



배정받은 방갈로는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할 정도로 지면과 띄워져 있었는데,

가끔 방갈로 밑으로 지나가는 커다란 도마뱀, 아니 크로커다일인지 코모도인지 모를 정도로 커다란 무언가를 발견할 때면 왜 이렇게 건물을 지었는지 설명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간소한 가구와 침대, 모기장, 정말 최소한의 것들로만 채워진 욕실.

이 모든 것들이 이곳과 꼭 잘 어울려 나는 퍽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상상해 본 적 있는 우리만 사는 해변가의 방갈로,

해변 뒤 편으로 펼쳐진 열대우림, 모래사장 끝에 닿은 절벽, 그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커다란 새들과 아득히 펼쳐진 수평선,

인터넷도 전화도 없는 이곳에서 잠깐 사이에도 오랜 친밀함이 느껴지는 얼굴들, 날이 지날수록 이곳이 더 좋아질 것 같았다.

마르코도 내가 이곳을 좋아할 걸 알았다고 했다.


저녁시간이 되자 게스트 모두가 모여 앉아 아바스의 요리를 기다렸다.

사 왔던 술은 조금 아껴 마셔야 했다. 함께 모인 게스트들과 소담스레 웃음꽃을 피우며 여행과 문화, 역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밤이 되자 별들이 오두막 위를 환히 비췄다.

흥이 오르면 바닷물에 살짝 발을 적셔도 이상할 게 없었다.

파도소리는 금세 심장박동처럼 자연스러워졌다.

벨소리니 알람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오로지 자연과 사람 사는 소리로만 채워지는 경험이 너무도 특별했다.


어느 날은 카약을 타고 해변 북측 절벽을 넘어 조금 먼바다로 나가보았다.

해변에서는 절벽으로 가려져 있던 곳을 돌자 버려진 리조트가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버려진 리조트라니, 누군가 부푼 꿈을 지어 나가던 그 시절은 어땠을까 잠깐 감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꺼져버린 그 꿈이 초라한 흑백사진으로 바뀌어 빛바랜 콘크리트의 잔상이 강렬하게 남았다.

파도가 넘실넘실 대는 탓에 카약이 뒤집힐까 무서웠던 나는 얼른 해변으로 돌아가자고 마르코를 재촉했다.


또 다른 날은 마르코와 계속 궁금하던 반대편 절벽 구경을 갔다.

멀리서 보기에도 풍경이 빼어나서 계속 바라만 보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모래해변이 끝나고는 날카로운 돌밭을 헤쳐가거나 땅이 없어 바닷물을 건너기도 해야 해서 꽤나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얼마간 모험을 마친 뒤, 누군가 박아놓은 쇠말뚝에 걸린 로프를 잡고 커다랗게 솟은 바위 위로 오르는 순간 아주 세찬 바람이 불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귓속으로 제니스 조플린의 'Piece of my heart'의 후렴구가 재생되었다.

'자유롭다'는 말이 이처럼 온몸으로 가득히 체험되는 순간이 있었던가

거센 바람에 맞서 우뚝 서있자니 날개가 녹아내려도 태양을 향해 날아가길 멈출 수 없었던 이카로스의 마음이 생생히 이해되었다.

세상 살던 근심이나 걱정 따위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매달려있어도 모두 흩어져버릴 것 같은 후련함이 전해졌다.

이 섬이 전해주는 자유가 느껴졌다.



그 후에도 심심하면 수영복을 챙겨 입고 바닷물에 들어갔다.

바다에 떠있자면 니파해변의 방갈로와 뒤 편의 산이 한눈에 보였다.

등을 돌리면 반대편으로 끝을 모를 바다가 보였다. 나와 바다뿐인 현재의 순간이 느껴졌다.

짭짤한 소금기는 따뜻한 햇살에 녹아 달달한 맛을 낼 것만 같은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바닷물의 부력을 느끼며 가만히 떠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다가 언젠가 죽고 싶으면, 혹은 죽고 싶을 만큼 힘이 드는 날이 있으면, 꼭 여기로 와야겠다.'

'아무리 앞이 캄캄해도 잊어버리지 않고 꼭 여기로 와야지, 그래야지.'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곰곰이 돌이켜봐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때 이후로 내 마음속 어딘가엔 'Hide away', 도피처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한 해 한 해 무게와 깊이가 더해지는 삶의 고민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내가 아주 힘들 때면, 꼭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이 섬이 내게 특별해지는 만큼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생겨났다.

앞서 적었듯 계곡에 갔다 다리를 다쳐서 방갈로로 돌아왔더니

아바스가 연고를 다리에 잔뜩 발라주었다.

고통을 잊으라며 맛있는 술까지 따라주어서 살짝 오르는 술기운에 서러움이 조금 없어지던 참이었다.

그날 저녁도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얘기를 나누던 중 아바스가 밥도 줘가며 키우던 반려 사슴벌레가 테이블 근처에 나타나 그 녀석에 대한 관심이 모아졌다.

담뱃갑을 아주 제 베개마냥 편하게 앉아있는 사슴벌레가 신기해서 살짝 등껍질을 만져보려던 찰나 그 반려 사슴벌레가 내 검지손가락을 물어버렸다.

아니 집어버렸다.

과장을 살짝 보태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이었다. 게다가 떼려고 해 봐도 좀처럼 놓아주질 않으니 정말 살이 찢기는 게 아닌가 진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슴벌레가 떨어졌고, 손가락은 시뻘건 자국이 진하게도 남아있었다.

안도하는 마음과 함께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면서도

독특한 지상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사슴벌레에 물리기까지 하다니,

어이없는 상황에 결국은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울고 웃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섬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왔다.

이번 여행이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특별한 시간들인 것은 그때의 나와,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과, 섬에 머무는 바람마저 늘 같은 바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노라는 기약을 하며 다시 아바스의 작은 보트에 올랐던 걸 마지막으로

쿠알라룸푸르에 돌아온 여정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발바닥에는 모래가 느껴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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