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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mission. Home Stretch

인문학으로 MBA하다 (15)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15)

Intermission. Home Stretch


학교 수업을 마치고 다니엘이 집으로 라이딩을 해주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 1학년 마지막 Module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2024년 4월 말 정도였을 것이다. 다니엘은 나와 집이 가까운 편은 아니었는데 가끔 수업을 마치고 서로 이야기거리가 남은 날에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은 여러 경로가 있는데 우리는 보통 도시 왼편으로 크게 우회하는 한적한 길을 택했다. 그 길을 따라 집에 가다보면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는 목장도 보이고 나무가 우거진 숲 길도 나오기 때문에 소란스러운 교내 캠퍼스와는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가끔 딸이 “아빠는 어떻게 다니엘하고 친구가 되었어?” 라고 물어보는데, 사실 나도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250명이 한꺼번에 모여 2주 동안 Orientation을 받을 때까지는 누가 누구인지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MBA 프로그램이 시작되며 다니엘과 수업을 몇 개 겹친 것까지는 알겠는데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는 MBA 과정 내내 거의 대부분의 수업을 함께 들었다. 1985년생인 나와 2000년생인 다니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아서 친해질 여지는 충분했다. 둘다 INFJ인 MBTI를 가졌다는 점, 책을 읽는 걸 좋아하거나 크리에이티브한 직업을 가진 가족을 두고 있다는 점, 말수가 별로 없다는 점,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점, 그리고 발표를 싫어해서 발표하는 날 아침에는 꽤 긴장한다는 점 말이다.


그날, 다니엘은 운전을 하면서 이런 말을 내게 들려주었다.


“솔직히 MBA 시작할 때만해도 걱정이 많았거든. 왜냐하면 다들 나보다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아서. 근데 1년 정도 해보니까 나도 어느 정도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어.”


2000년생인 다니엘은 MBA 전체 250명 학생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축에 속한다. 평균 5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 MBA에 오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대학 졸업 후 짧은 사회생활을 거친 뒤 MBA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의 말처럼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약간의 걱정스러운 마음과 함께 막상 MBA 과정을 해보니 성적도 기대했던 것보다 꽤 괜찮게 받았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하는 말씀도 제법 잘 이해가 되고, 여러모로 “버틸만하다.”,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플로리다 출신의 느긋한 성격도 MBA 생활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하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생각보다는 버틸만하다… 그건 내가 오래 전 대학교 1학년 과정이 끝날 무렵 느낀 감정이기도 하다. 수능은 그저 그렇게 봤지만 운이 좋게 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던 나는 2004년 3월 첫 학기가 시작할무렵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경기도에서 유년기를 보낸 나는 그 지역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었고, 보통의 고등학교에서 운이 좋게 내신 성적을 잘 받아서 서울의 모 대학에 합격했는데 대학은 고등학교와 달리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학생들만이 이곳에 올것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전국에서 모여든 똑똑이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은근히 부담이 컸고, 또 동갑내기와 경쟁하던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대학에는 재수, 삼수까지 한 형들이 많았던 것도 신경쓰이는 부분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학년 1학기 대부분은 긴장한 채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마치 전투태세를 하듯 바짝 긴장했던 나의 몸과 마음은 1학년 1학기, 2학기가 지나며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성적을 잘 받았고 무엇보다 같은 반 학생들과 학기 초반 전공필수 과목을 함께 들으며 이들이 나를 압도할만큼 엄청나게 똑똑하거나 영민한건 아니라고 느껴졌다. 물론 대학 생활 초반에 수업 몇 개의 성적과 수업에서 보여주는 학생들의 태도를 갖고 그들의 지성 수준을 평가하려는 스무 살의 내 모습도 돌이켜보면 웃긴 것이지만, 어쨌든 새로운 경쟁 틈바구니 속에서 “나도 버틸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겠다”며 생각이 든 것이다. 2학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로 몇 명의 학생들이 사라지고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과 어울려 수업을 들으면서 긴장감은 점점 사라지고 안도감과 일종의 자신감까지 생겨났다.


전국의 똑똑이들만 오는 줄 알았는데 별거없네? 라는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뀌어갔다. 2학년이 되어 군대를 다녀오고, 3학년과 4학년을 거치면서 2004년 함께 입학했던 약 320명 경영학과 04학번 학생들의 진로는 꽤 다양해졌다. 여전히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 기업 공모전을 준비하며 글로벌 마케팅 회사에서 일하기를 꿈꾸는 친구, 방송사 PD를 지망하는 친구, 컨설팅펌에서 일하고 싶은 친구, 석사 과정을 밟으며 아카데미쪽에 더 있기를 원하는 친구 등 처음 우리가 같은 수업을 들으며 같은 것을 배우던 시절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진로로 제각기 흩어지고 있었다. 1학년때 놀기 좋아하고 크게 지적으로 내가 교류할 점이 없다고 느꼈던 친구들도 졸업을 앞두고 보니 초롱초롱한 눈빛에 꽤 진지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었다. 제각기 다른 삶을 꿈꾸며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무리 속에서 내가 누구보다 낫다거나, 내가 전체 중에 몇 퍼센트 안에는 들겠다는 식으로 우열을 비교하기란 어려웠다. 맨 처음에 나는 내가 그래도 뒤쳐지지 않고 가끔은 남들보다 앞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덧 누군가보다 앞서고 뒷서는 것 자체가 없어졌다.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미국에서 MBA 과정을 절반 정도 마무리하는 2024년 봄 나의 마음도 대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던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미국에 온 뒤 MBA 수업을 들으면서 매일 느낀 감정은 ‘외롭다’ 였다. 학교에 오려면 집 앞에서 정류장에서 시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 병원 근처 정류장에 내린 다음 15분 정도 한적한 오솔길을 걸어야 했다. 병원 근처 정류장에서 내가 수업을 듣는 경영학과 건물까지 오는 길도 꽤 다양했지만 나는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길을 찾았고 남들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뒷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23년 여름 MBA 과정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1교시는 보통 아침 8시에 시작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씻고 역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와 인사를 한 뒤 7시에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7시 반 정도에 캠퍼스에 도착한다. 그리고 15분 정도 한적한 그 길을 따라 경영관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미 동이 튼지 오래라 햇살이 맑은 하늘을 비추고 있고 아침 새가 지저귀는 한적한 길을 걸으며 나는 하나의 생각만을 떠올렸다. ‘오늘도 과연 얼마나 외로운 하루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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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MBA 학생들은 모두 MBTI에서 E성향을 지닌 것처럼 활달했고 대화(수다)가 끊이지 않았고 마치 몇 년 전부터 알아왔던 사이처럼 금방 친구가 되었다. 전체 253명 학생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던 나는 분명 프로그램 초반에는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 인종의 장벽 앞에서 쉽게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았다. 같은 그룹 멤버들과 썩 활발하게 어울리지 못했고 오히려 ‘피터가 뭘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였다. 그래서 남들은 미국으로 MBA를 하러 갈 때 기대와 설렘이 가득할 법 하지만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 이전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미국에서 이방인이고 쉽게 융화되지 못하리라는 걸. 그리고 그 예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2023년 여름의 나는 매일 정해진 수업만 가까스로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랬던 나도, 1년이 지나자 조금씩 많은 것이 바뀌었다. 생각보다 성적도 잘 받았고, 과정 초반에 그룹 프로젝트를 할때 친구들은 내가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기업에서 15년 정도 보고서 작성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체화된다), 영어를 모어로 쓰는 학생들만 모아둔 Management Communication 수업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받고, 나와 성향이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주어진 마감기한 내에 과제를 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또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의 일과도 자연스럽게 정착해 시간과 과제에 쫓겨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영어로 나의 생각을 100% 전달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틀리거나 말거나 그냥 말하는 배짱도 조금은 생겼던 것 같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말했던 것처럼 나도 “솔직히 MBA 시작할 때만해도 걱정이 많았거든. 왜냐하면 다들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자신감 넘치고 또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친구들이라서. 근데 1년 정도 해보니까 나도 어느 정도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어.” 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니엘의 솔직한 자기 고백에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하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무엇보다 2000년생인 너는 1985년생인 나보다 훨씬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젊음과 시간이라는 무한한 무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능력이 있고 돈을 많이 벌고 똑똑해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앞으로 해 나갈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이 주어졌는지가 나는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편으로는, 다니엘에게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20년 전 대학을 졸업하면서 내가 느꼈던 것처럼 어차피 우리는 MBA를 거친 뒤 제각기 다른 길로 흩어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미국 MBA에서는 한국에서보다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찾아 나선다. 다들 어느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가 MBA에 왔기에 현실감각과 관리능력이 뛰어났고 MBA에서 얻은 지식과 네트워킹을 바탕으로 자신이 진출하고 싶은 쪽으로 더 깊고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모두가 최고가 되고 싶어하지만, 같은 지점의 최고를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월가의 트레이더를 꿈꾸는 것도 아니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케팅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Clean Energy에 관심이 많은 학생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위치한 전력회사에 문을 두드리고, 기업이 아닌 NGO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도 있었고, 어떤 학생은 자신이 자랐던 고향의 꽃 재배 회사의 인턴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회장의 말은 사어(死語)가 아니었다.


다들 각자 꿈꾸는 미래를 향해 제 갈길을 가는 것을 보며 나는 어떤 의미로는 진심으로 자유롭다는 감정을 느꼈다. 각자의 위상이나 목표까지의 진척도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것에만 집중할 때 우리는 소위 Ranking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비즈니스에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 “I said so”였는데, 일이 다 일어난 다음에 예전에 내가 그럴꺼라고 그랬잖아! 라고 흘러간 과거 이야길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었다.


그 동료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흘러간 과거 이야길 하나 해보자. 지금의 UNC at Chapel Hill로 오기 전에 나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있는 Y대학에도 합격했는데 두 학교 중에 어디를 갈지를 두고 거의 한 달을 끙끙거리며 고민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 MBA 랭킹을 놓고 봤을 때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Y대학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가 아는가? Y대학에 가면 더 좋은 교육환경과 더 넓은 네트워크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MBA가 끝난 뒤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남들이 봤을 때도 아이비리그를 졸업했다는 경탄의 시선(?)도 다소 있을 것이고… 이런저런 생각에 한 달 정도 알아볼 것을 알아보고 고민할 것을 고민했는데 결국 안전하고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지금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Y대학은 학교 캠퍼스를 벗어난 지역은 범죄율이 높은 우범지역이었고 이 학교에 통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뉴욕시와 코네티컷 주 사이 어딘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Y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할것이 많았다. 한 달의 고민 끝에 UNC로 결정하고 나서 나와 아내는 UNC가 있는 채플힐이 더 좋은 이유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했다. 마치 직관이 우선하고 합리적인 추론이 그 뒤를 잇는다는 조너선 하이트 뉴욕대 교수의 말처럼 말이다.


미국에 온 뒤에 어느 정도는 Y대학의 MBA 랭킹 숫자가 눈에 아른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아침마다 오솔길을 15분 걸어 경영학과 건물로 향하며 지독한 외로움과 자기비애, 두려움의 감정을 느낄 때에는 “이렇게 힘들 바에야 그나마 랭킹이라도 더 높은 곳에 갈 걸…” 이라고 되뇌었던 적도 많다. 한국인이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랭킹의 굴레. 나는 MBA 과정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그 굴레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가장 기뻤다. ‘나도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버틸 수 있다’는 마음은 조금씩 ‘우리는 각자의 이상을 따라 제각기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마음으로 바뀌었고, 그 마음이 깃들고서야 비로소 MBA 랭킹보다 자신이 얼마나 하고 싶은 것을 찾아냈는지, 의미를 발견했는지, 그 지점으로 전력으로 향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해했다. 비교를 하고 우열을 나누고 랭킹을 매기는 것에는 끝이 없다. 내가 MBA 1학년 과정을 거치며 성적을 잘 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낮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보다 내가 더 우수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 남들보다 크게 뛰어나진 않지만 크게 뒤쳐지지 않는다는 평범함에 대해 깨닫는 삶… 이런 각성이 MBA에 와서 내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이었다.


MBA 과정이 시작되고 첫 Module이 끝날 때의 일이다.


나뿐만 아니라 미국 학생들도 MBA의 첫 반 년은 긴장해서 수업을 듣는 모습이었는데 반 년 간의 강도 높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나서 <Strategic Cost Analysis & Performance Management> 수업의 마지막 그룹 프로젝트 과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Zoom으로 온라인 미팅을 가진 우리들은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MBA에 대한 이런저런 소회를 서로 나누었는데 다들 주로 하는 이야기는 “이제 정말 반 년의 과정이 끝나간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I am glad we are almost at the finish line!” 이라고 한 마디 거들었는데, 다른 학생이 내 말에 “Home Stretch” 라고 답장해주었다. Home Stretch. 뜻을 찾아보니 원래 경마에서 나온 표현인데, 경주에서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마지막 직선 구간을 의미하는 표현이고, 거의 끝나간다는 말이다. 모든 일은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반드시 있다. 시작에서 끝으로 향하며 우리는 조금씩 불안함을 벗어 던지고 매사 익숙해지고, 또 조금씩 서로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직역하면 집에 거의 다 와간다는 그 말이 나는 꽤 인상적이어서 다른 친구들에게 Home Stretch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우리는 결국 각자의 집을 찾아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

그 여정에서는 남과 비교하거나 우열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나도(너도) 남과 비슷하게 불안했다가 익숙해질 것이고 끝내 너의 페이스대로 잘 할 것이라는 말.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MBA의 1학년이었다.


이제 여름방학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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