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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Estate. 스물다섯 Revisited

인문학으로 MBA하다 (14)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14)
Real Estate. 스물다섯 Revisited
2024 Spring - Mod 3, Mod 4
#부동산투자, #문학, #김연수, #도시개발, #거울의시간



2024년 초부터 그해 5월까지 두번의 Module을 거치면서 나는 네 개의 Real Estate 관련 수업을 연달아 들었다.


나는 2년의 MBA 과정 동안 다니엘과 많은 수업을 함께 들었는데, 다니엘은 MBA에 오기 전 건설회사에서 그것도 실제 인부들이 일을 하는 건축 현장에서 경력을 쌓고 왔기 때문에 Real Estate 분야로 심화 전공과정을 이수할 생각이 있었다. Finance나 Consulting이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지닌 학생들에게 문호가 비교적 폭넓게 열려있고 전공을 이수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 반면, Healthcare나 Real Estate 분야는 꽤 구체적인 산업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 수업을 듣는 이들은 부동산에 있어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니었다.


MBA에 오기전 부동산 개발업체나 건설회사에서 다년 간의 경험을 쌓은 학생들이 많았고 대부분 졸업 후에도 이쪽 분야에서 직업을 얻기를 희망하는 찐 Real Estate 애호가들이었다. 사실 내가 다닌 UNC at Chapel Hill은 Real Estate 분야에서 강점을 보이는 학교인데, UNC MBA 프로그램은 미국 내에서 10위대 후반에서 20위 사이였지만 Real Estate 프로그램만 따로 순위를 매기면 10위 이내로 꽤 준수한 순위를 기록했다. 미국 부동산 시장에 대해 배우면 나중에 과연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아예 모르는 분야를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를 따라 강남에, 아니 다니엘을 따라 Real Estate 첫 수업이 열리는 McColl 2650 강의실로 향했다.


이 여정은 2024년, 2008년, 그리고 다시 2025년으로 돌아온다.



첫 번째 점. 2024년. 마흔


Real Estate 프로그램을 관장하는 제이콥 사기 교수는 두루마기 한복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었고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기 교수가 가르치는 첫 수업은 <Real Estate Process>였다. 이 수업은 부동산 개발 과정의 전반적인 이론을 다룬다. Real Estate이란 토지와 그에 부속된 건축물로 구성된다는 점, 토지는 다양한 종류로 구분되며, 토지 위에 우리가 건축할 수 있는 부동산의 종류도 다양하다는 점을 배운다. 텅 빈 나대지가 있으면 여기에 Retail, Industrial, Office, Multifamily (한국 식으로 말하면 아파트먼트 또는 주택), Healthcare 등 어떤 용도의 건물을 건축하여 수익을 창출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꽤 복잡하며 주정부나 소방당국이 요구하는 건축 규제를 잘 지켜야 한다. 건폐율(BCR), 용적률(FAR), 필수 구비 소방시설, 건물 앞 공용 공간 조성까지 다양한 건축 규제에 맞게 건물을 짓고나면 이제 이 건물에 사람, 즉 세입자를 모아야한다. 세입자에게 얼마의 렌트 비용을 거둘 것인지, 최초에 그들을 모집하기 위해서는 어떤 프로모션을 제공할 것인지도 고민거리 중 하나다.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은 무엇이며 어떻게 조달할지, 세입자로부터는 어떤 메리트를 주어서 이 건물에 오도록 유인하며 그들로부터 어떤 수익을 거두어야 하는지, 그래서 종합적으로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이 프로젝트를 통해 거둘 수 있는 수익률이 얼마이며 나를 믿고 투자해 준 외부 투자자에게 얼마를 되돌려줄 수 있는지 등, 프로젝트 전반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다.


미국의 많은 도시가 그렇겠지만 UNC at Chapel Hill 학교가 위치한 Chapel Hill 지역은 2023년 기준 인구 62,000명의 작은 캠퍼스 타운인데 여전히 개발되지 않은 곳이 많았고 비교적 조용한 시골 동네였다. 그런데 UNC, Duke, NCSU 세 대학이 형성하는 Research Triangle에 IT, Healthcare, Life Science 기업이 많이 입주하면서 도시 전반적으로 여기저기 개발되는 곳이 점차 많아졌다. 내가 살던 타운하우스 맞은 편에도 꽤 큰 규모의 주거단지가 새로 들어섰고, 차를 타고 지역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도 여기저기 공사현장이 많이 보였다. 이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이들은 조용하고 한적했던 Chapel Hill이 점차 파헤쳐지고 상업화되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Real Estate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 지역은 살아있는 개발 현장이자 비즈니스 케이스이기도 했다. 사기 교수는 실제 Chapel Hill과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진행중이거나 최근에 진행되었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이론과 실제 현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Real Estate Process>와 함께 <Real Estate Modeling>수업을 같이 들었다. 강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수업에서는 실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의 Pro forma, 즉 프로젝트의 예상 수익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추정하는 ‘재무모델’을 엑셀로 만들게 된다.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는 단기간 내 금방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수 년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돈이 들어오고 돈이 나가는 것을 긴 호흡으로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Pro forma에서는 총 공사 비용 규모, 공사 비용의 조달 방안, 대출금의 월 별 상환 스케줄, 공사 완료 및 세입자 입주 시점, 세입자의 월 별 수익 규모 등을 월 단위로 미리 작성하게 되는데, 나이브하게 이야기하면 이건 숫자놀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 분석이 숫자놀음에 가깝다는 생각은 사실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뿐만 아니라 모든 투자 프로젝트가 겪는 비슷한 운명 같았다. 가정사항의 작은 숫자 변화만으로도 프로젝트의 사업성 또는 수익성이 너무나 크게 변하기 때문이다. 투자 프로젝트의 Pro forma에는 수많은 가정사항들이 반영된다. 타인자본을 빌릴 때의 이율, 세입자가 건물에 입주하고 난 이후의 건물 공실률, 빌딩을 건설할 때 필요한 여러 비용의 단가, 인건비, 연간 물가상승률…… 수없이 고려해야 하는 가정사항들은 Underwriting assumption이라고 해서 따로 모아두게 되는데, 이 지표들이 조금만 변해도 프로젝트 IRR이 변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내가 원하는 IRR을 얻기 위해서 가정사항 숫자를 조금씩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Real Estate Modeling> 기말고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손으로 어떤 프로젝트의 Pro forma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나는 문제에서 주어진대로 정직하게 계산했는데 생각보다 투자 수익성이 너무 높은 것이었다. 조금 고민하던 나는 투자 수익성이 너무 높다고 장밋빛으로 전망하는 것보다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미래 공실율을 높이거나 세입자의 입주 시점을 지연시켜서 프로젝트 수익성을 조금 낮추어서 기말고사를 마무리했다. 사실 Pro forma를 작성할 때 단 하나의 정답은 없다. 부동산 디벨로퍼 입장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시장의 가정상황을 반영하여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평가하는 것이고, 그 가정사항이 비교적 합리적이면 되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Real Estate Modeling> 수업은 무척 재밌었고 성적도 잘 받았지만 어딘가 숫자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는 인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몇 년에 걸친 한 프로젝트를 숫자를 가지고 전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1학년의 마지막 Module에서는 Real Estate 수업을 두 개 더 들었다. 이전 Module에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의 이론과 재무모델 수립을 이해하고 나면 이제는 Real Estate 영역을 조금 더 거시적으로 멀리서 들여다보고 큰 관점에서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Real Estate Macroeconomics and Securities Markets> 수업에서는 금융시장에서의 부동산이 어떤 역할을 하며 현실에서 어떤 이슈가 발생하는지를 다룬다.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각도로 들여다보았던 것과 미국 부동산 건물을 보유하고 운영하는 여러 펀드 중 어떤 펀드에 투자해야 가장 투자수익이 극대화 될 수 있을지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과제였다.


부동산 펀드에 투자하는 프로젝트는 우리가 앞선 수업에서 배웠던 것과 같이 단순히 정량적인 재무모델 분석만을 가지고 적정성을 판단하지 않았다. 펀드가 보유한 부동산 건물의 종류(상업시설인지 주거시설인지), 건물이 위치한 지역(동부 뉴욕시인지 서부 캘리포니아인지), 펀드가 소유한 건물의 인근 유동인구는 어떤 수준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서, 가장 투자하고 싶은 부동산 펀드를 선택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어떤 펀드는 오피스, 멀티패밀리, 상업시설을 고루 갖고 있어서 상품 다각화 측면에서 좋아보였지만 특정 지역에 부동산이 몰려있다는 단점이 있었고, 또 어떤 펀드는 보유한 건물의 공실율은 꽤 높은 것이 단점이었지만, 뉴욕시와 캘리포니아주 등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 중심으로 부동산을 보유한 점이 매력적이었다. 무엇이든 장점과 단점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부동산 디벨로퍼로서 자신만의 가치관과 판단 기준을 정한 뒤 그에 맞게 투자 대상을 선택해야 한다. 정량적으로 그리고 정성적으로 투자 대상을 식별하고 선택하는 것을 배우며 우리는 서서히 부동산 디벨로퍼로 성장하고 있었다.


<Real Estate Process>부터 <Real Estate Modeling>, 그리고 <Real Estate Macroeconomics and Securities Markets> 수업까지 가르쳤던 제이콥 사기 교수가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다. 얼핏 들으면 졸린 목소리처럼 들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고 시장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과 같이 부동산 디벨로퍼를 꿈꾸는 MBA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점을 늘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사기 교수는 학생들과 토론을 할 때 “Why don’t you walk me through your thoughts?” 라고 정중하게 학생들의 의견을 묻곤 했다. 가끔 경영관 복도에서 지나가다 마주치면 윙크를 보내며 인사를 건넸던 사기 교수가 참 인상적이었던지, 나는 그가 늘 신고다녔던 브랜드의 운동화를 사서 MBA 과정 내내 신고다니기도 했다. 색깔까지 맞춰서 말이다.


이론 습득, 재무모델 설계에 이어 시장과 매물을 읽는 안목까지 갖췄다면 이제 직접 부동산을 개발해 볼 차례다. 짐 스패스 교수가 가르치는 <Cases in Real Estate> 수업에서는 총 일곱 개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의 재무모델을 직접 만들고 수익성을 따져본 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과제를 해야했다. 각 부동산 투자 프로젝트는 수업을 위해 가상으로 만들어진 케이스가 아니라, UNC가 위치한 Chapel Hill 인근에서 시행되었던 실제 프로젝트였다.


첫 번째 과제인 셀프 스토리지 창고 인수 과제는 노스캐롤라이나주 개스토니아 카운트에 위치한 어떤 실제 물류 창고를 배경으로 했다. 첫 주에 우리가 나름대로 재무모델을 설계해서 수익성을 계산한 뒤 과제를 제출하고 나면 그 다음 주에 실제 이 물류 창고 투자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외부 인사가 게스트로 수업에 참여해서 프로젝트의 배경과 결과를 설명하는 식이었다. 물류 창고에 투자할 때 특별히 염두에 두었던 시장 상황은 무엇이었는지, 투자 후에 발생했던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는 무엇이었는지, 물류 창고 투자 시에 부동산 디벨로퍼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등을 실무자 관점에서 생생하고 상세히 말해주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높았다. 아무래도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자신의 세부 심화 전공으로 Real Estate을 공부하고 있었고 향후에도 이 분야에서 일할 예정이기 때문에 관심이 높을 수 밖에 없었다. 몇 년 뒤에는 우리가 이 수업의 게스트로 참여해서 우리가 진행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수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다. 우선 한국과 미국의 세법과 부동산 규제가 다른 것이 많아서 개념부터 낯설었고 용어가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많았다. 실제 부동산 개발이나 건축 현장에서 일한 경험도 전무하다보니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와 교감하는 듯하게 보이는 다른 학생과는 달리 주어진 과제를 가까스로 제출하는 데 허덕였다. 짐 교수는 우리가 충분한 이론과 개념을 배웠다고 생각했는지 부동산 프로젝트 재무모델 서식부터 우리가 직접 엑셀로 구현해야했다. 이전에 사기 교수가 분석에 필요한 재무모델 서식을 제공해주었던 것과는 달랐다. 간신히 과제를 하다보니 점점 점수는 떨어졌고 바로 두 번째 과제에서는 100점 만점에 57점을 받으며 반에서 밑바닥 성적을 기록했다. 과제를 채점하는 TA가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관련해서 충분히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더 노력하고, 그래도 잘 안되겠으면 TA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도록 해. 그리고 이건 숫자만 계산하는 수업이 아니야! (The case isn’t just about trying to find the numbers. It’s about thinking through the analysis and the write up needs to show that.)” 라는 코멘트를 내게 남기기도 했다. 절박감을 느낀 나는 절치부심해서 남은 과제에서는 서서히 점수를 끌어올려서 마지막 기말고사는 상위 25% 안에 들었다. 다행이었다.


영어로 쓰여있어 더 낯선 부동산 용어, 다른 나라의 세법과 규제, 처음 작성하는 Pro forma, 무엇보다 여기서 배운것을 토대로 Real Estate 분야에서 직업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슨한 동기…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내가 Real Estate 수업을 계속해서 들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라고 분명 느꼈기 때문이다.


부동산은 다른 자산과 달리 쉽게 움직이지 않고 (그래서 부동산이기도 하다) 많은 자금이 소요되기 때문에 긴 사이클에 걸쳐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상호 호흡하며 프로젝트를 함께 만들어간다. 적어도 한국에서 소위 ‘강남에 똘똘한 아파트 한 채’와 같이 내 집 마련 또는 투자 목적으로 부동산 시장을 바라보는 것과 달리, MBA에서 배운 Real Estate은 어느 지역을 어떤 용도로 개발해서 그 지역 전체를 장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바꿀 것인지 변화에 대한 깊이있는 고민에 가까웠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Real Estate 수업을 들으면서 지역, 개발, 건축, 변화, 구조와 같은 개념을 익히고 철학적 고민을 하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이 즐거움은 본능적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Real Estate 수업을 네 개 듣고 난 뒤에 나는 15년 전에 이 분야에 깊게 휘감겨 들어가버린 적이 있었음을 그제야 떠올렸다.



두 번째 점. 2009년. 스물다섯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대학을 다니며 가장 가깝게 어울린 친구는 같은 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는 호성이었다. 나이가 서로 같았던 호성이와는 일본 대학과 교류하는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 어울렸는데, 가끔은 호성이가 있는 이공계 캠퍼스로 놀러가곤 했다. 우리 학교는 내가 전공하던 경영학과와 호성이가 있는 건축학과가 지하철 역 두 개에 걸쳐 서로 다른 캠퍼스로 구분되어 있고 남성 걸음으로도 삼십 분 정도는 걸어가야 할만큼 꽤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호성이를 만나러 이공계 캠퍼스로 가면 건물 빌딩, 자연 풍경, 심지어 공기의 질감까지도 꽤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이공계의 질감이었다.


2007년 가을 어느 날에는 호성이를 만나러 건축학과 건물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졸업작품 이었는지 아니면 과제 제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성이는 다른 건축학과 친구들과 함께 꽤 커다란 건축 모형을 한창 만드는 중이었다. 과제를 하는 방에 들어가보니, 자르고 남은 흰 폼보드, 아크릴, 우드락, 사포, 락카 등 건축 모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온갖 재료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처음에 나는 혹시 과제를 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뭔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씩 건축학과 친구들이 말하는대로 재료를 자르거나 자른 재료를 건축 모형에 붙이는 것을 살짝 도와주었다. 얇은 폼보드를 조금씩 모양을 다르게 해서 한 겹 한 겹 붙이면 건물 주변에 위치한 산이 되고 언덕이 된다. 잘린 아크릴을 폼보드에 난 구멍 위에 덧대면 건물 창문이 된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어떤 모형은 꽤 구조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이는데 어떤 모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러나 위태로운 만큼 그 구조는 보다 창의적이다.


그때 나는 호성이를 비롯한 건축학과 학생들을 꽤 동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경영학과인 우리가 활자를 읽고 숫자를 분석하고 현상을 진단하고 있을 때 이들은 직접 양감의 물질과 덩어리를 다듬으며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몸을 쓰며 재료를 직접 자르고 붙이고 다듬는 경험은 책상머리에 앉아 레포트나 쓰고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는 경영학과 수업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경험이었다. 건축학과 학생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 같았고 그 창조야말로 경영학과가 가질 수 없는 건축학과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조금씩 건축학과가 하는 일, 도시개발이라는 분야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에서 하는 일 등에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친구따라 이공계 캠퍼스에 가서 건축 모형 제작 과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건축 세계를 엿봤던 내가 실제 건축 현장을 아주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된 건 다음 해 겨울이었다. 대학 졸업 1년을 남기고 이력서에 들어갈 경험을 하나라도 더 찾고 있던 나는 대학생 참여자를 모집하는 어떤 단체의 공고를 본 뒤 2008년 말 겨울부터 주말마다 출근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단체는 실제 컨설턴트로 오랜 경력을 쌓은 대표가 이끌고 있었는데 서울 시내 다양한 사회적 기업을 대상으로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주력으로 했다. 단체에 참여하는 인력은 크게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나처럼 컨설팅 분야에 경험을 쌓고 싶은 대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직에서 실제 일을 하고 있는 전문가 그룹이었다. 전문가 그룹은 컨설턴트를 포함해 변호사, 대기업, 회계사 등 다양한 산업에서 일을 하고 있는 현직 전문가들이었다. 단체에서는 각 전문가들이 가진 역량과 소속 산업을 고려해서 진행 중인 여러 사회적기업 컨설팅 프로젝트에 그들을 배정했고, 전문가를 보조하기 위해 나와 같은 대학생을 몇 명 붙여주었다.


내가 배정된 프로젝트는 서울에 위치한 소형 건설업체의 수익성을 개선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사장 부부가 직접 경영하는 작은 건설업체였다. 이 건설업체는 종국에는 업체에 소속된 건설 기능자들이 회사의 주인이 되는 형태를 꿈꿨고, 규모가 작았던만큼 수주 경쟁력은 높지 않았지만 대신 가장 안전하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건물을 짓는다는 자부심은 매우 높았다.


나는 모 대기업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전문가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 건설업체 사무실을 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생인 나와 대기업 영업팀 직원이었던 전문가 모두 20대 중후반의 매우 젊은 나이였고, 20대 청년들이 건설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업체에 어떤 묘안을 줄 수 있을지 누군가 의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체 사장 부부는 우리가 갈때마다 귀한 손님이 온것처럼 환대해주었고 밤늦게 사무실을 찾을 때면 가끔 음식을 시켜서 함께 먹기도 했다. 처음보는 건설업체 분들과 마주앉아 대형 김치찜을 함께 먹었던 경험은 지금 돌이켜봐도 각별하다.


우리 팀은 이 건설업체가 처한 상황을 차근차근 들어봤고 어느 지점에서 수익성이 나빠지고 있는지를 검토한 다음 대략 어떻게 하면 그나마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을지 간단한 제안을 드리는 것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건설업계에 경험이 일천한 우리 팀이 건의한 작은 제안들이 그분들에게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 또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컨설팅 서비스였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식의 외부 도움 경험이 거의 없었던 업체 사장님은 매 번 우리가 갈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었고 나름대로 우리의 의견을 열심히 경청해 주셨다.


한 번은 실제 이 업체가 짓고 있는 건설 현장에 같이 나간 적이 있었다.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 타운 하우스 몇 채를 짓고 있는 현장이었는데, 아파트 재개발 현장에 있을 법한 타워크레인과 철골 구조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다 마무리되지 않은 건설현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다. 건설 현장 뒤에는 높지 않은 산이 있고 앞에는 도로와 가옥 몇 채가 있었고 그 멀리로는 또 마을 도심이 보이고… 이런 식으로 하나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입체적으로 종합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업체 사장님께 부탁해서 미리 얻었던 남색 회사 작업복 일명 ‘건설잠바’를 하나 껴입고 있었다. 건설잠바를 입은 것만으로도 나는 이 업계의 한 일원이 된 것 같았고 사장님이 직접 건설 현장을 설명해주시는 것을 들으며 점점 이 분야에 흥미가 생기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 넥타이를 맨 채 회사의 현황을 들여다보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폼나는 컨설턴트는 아니고 현장을 직접 답사하는 ‘건설턴트’였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매력적이었다.


이때까지 내가 경험한 것은 모형이든 실물이든 건물을 직접 형상화하는 건축업에 가까웠지만, 한 번 이 분야에 관심을 갖자 이제는 직접 내가 부동산 디벨로퍼가 되어 건물 단위가 아니라 지역 단위로 변화를 가져오는 아이디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이 글로벌 부동산 개발업체인 Savills Korea에서 시행하는 <Real Estate Venture IDEA 공모전>이었다. 이는 낙후한 지역을 선정해서 해당 지역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 사업의 전체적인 모습을 구상하고, 사업의 수익성을 분석하고 단계별로 정량적인 재무모델을 설계하는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공모전이었다. 나는 호성이와 다시 뭉쳤고 팀 이름을 WALP(왈프) 라고 했다. <Where Are you Living Project>의 약자였다.


우리는 학교 정문 앞 낙후된 지역을 새롭게 개발하는 사업을 구상했다. 우리 대학이 위치한 지역은 서울 강북 지역에 오래된 곳이었기 때문에 특히 학교 정문 앞은 식당, 주택 등이 혼재된 난개발 지역이었다. 우리는 이곳을 외국인 교환학생을 포함한 대학생 전용 기숙사와 상업공간으로 다시 개발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어느 지역에 어떤 건물을 몇 층으로 올릴 것인지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렌더링하기도 했다. 사업 아이디어 제시는 나와 호성이가 하고, 수익성 분석은 다른 학교의 금융투자 동아리와 함께 진행했다. 우리가 사업을 구체화하면 그들은 프로젝트 실행에 필요한 총 발생비용 조달은 어떻게 할것이고 각 건물로부터 어떤 수익이 얼마나 발생해서 총 사업 수익성은 얼마라는 것을 능숙하게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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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디어는 본선에 진출했고 나와 호성이는 본선 프리젠테이션에 참가해 <고려대학교 정문 앞 Campus Town 조성 사업>을 소개했다. 운이 좋았는지 우리 팀은 우수상을 받았고 총 상금 200만원을 받았다. 함께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학교 투자 동아리 팀에 절반을 주고, 세금을 제하고 남은 금액을 나와 호성이가 나눠 가지니 각자에게 돌아간 몫은 몇 십 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 공모전에 참여한 모든 과정이 너무 즐겁기만 했다. 어떤 지역을 새롭게 개발하는 과정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지역 개발은 그 지역에 대한 입체적 이해를 필요로 했고 지역을 둘러싼 다른 지역과 연계해서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시간, 공간, 땅, 건물,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 거시적이고 때론 미시적인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가끔 나는 경영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정문 앞 부지를 내려다보며 머리 속으로 이 지역이 잘 조성된 Campus Town으로 바뀐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이 뱃머리에 서서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상상하며 "I'm the King of the World!”라고 외치는 것처럼, 도시개발의 현장을 내려다보며 내가 여기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재밌기도 했고 무척 뿌듯했다. 건축, 도시개발, 부동산개발 이런 분야는 실물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언젠가 호성이가 “건축학과는 이공계의 철학과야.” 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서 거시적인 고민과 미시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쫓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실제 건축학과에서 교양과목으로 개설된 <도시개발> 수업을 신청해서 들어보기로 했다. <도시개발> 수업은 건축학과에 소속된 전임 교수가 아니라 실제 부동산 디벨로퍼로 활동 중인 CEO가 겸임교수로서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겨울에 참여했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공모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발지역 인근의 지리적인 정보와 상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어떤 부동산을 건설하여 어떻게 이 지역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실제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것까지 다룬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개발> 수업에서는 지역이 소속된 도시의 변화 방향도 개발 시 염두에 두어야 함을 강조한다. 도시가 지향하는 정체성이 있다면 그에 맞춰서 도시 내 세부 지역이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는 것이고 그 역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당 지역을 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는 실제 서울시가 2009년 당시에 추진하던 디자인 서울 정책을 많이 연구했고, 디자인 서울 정책과 연계하여 동대문 인근에 외국 관광객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 세련된 디자인의 대형 호텔을 건설하자고 마지막 그룹 프로젝트를 통해 제안했다.


학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2009년 봄 당시에는 동대문운동장역) 인근에는 DDP로 불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한창 막바지 공사 중이었는데 이는 디자인 서울 정책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건물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청계천 복원 공사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며 바지를 걷고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타임지 커버스토리에 실렸던 것처럼 2009년 당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야심작은 디자인 서울이었다. 디자인 서울은 단순히 거리를 깨끗하게 정비하고 난잡하게 제작된 상가 간판을 통일감있게 다시 만드는 것만을 뜻하진 않았고, 통일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갖고 도시 정책 차원에서 공공 디자인을 추진하는 전체 체계를 의미했다.


거시적인 레벨에서 서울시가 추진하는 디자인 서울 정책이 있고 미시적인 지역 관점에서 디자인 서울 정책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건물(DDP)이 들어서는 점을 골똘히 생각하자 이와 연계한 숙박시설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우리는 동대문역 인근에 크게 수익성이 나지 않던 작은 쇼핑몰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숙박시설을 세우자고 제안했는데 정확히 같은 자리는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2014년에 5성급 호텔이 근처 부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함께 수업을 들으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건축학과 형들이 이 사실을 알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회사에 다니던 나는 뉴스를 접하며 몇 년 전 건축학과 수업에서 도시개발에 재미와 열정을 느끼던 시절을 다시 떠올렸고, Real Estate은 역시 진짜 변화를 창조하는 것임을 되새겼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건축학과 학생들과의 만남, 건설업체 컨설팅 프로젝트, 부동산 개발 공모전, 도시개발 수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즐거움이었다. Real Estate 수업을 들으며 느낀 즐거움이 본능적이었던 것처럼 15년 전 내가 느낀 즐거움도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았다.



세 번째 점. 다시 2024년. 마흔


건축의 세계에 기웃거리며 도시개발의 매력에 푹 빠졌던 2007년부터 2009년까지의 시간. 그리고 Real Estate MBA 수업을 들으며 어렵지만 부동산 개발의 매력에 푹 빠졌던 2024년의 시간. 이 두 시간은 평행우주처럼 비슷하다.


Real Estate 분야에 대한 경험인 점은 물론이거니와 2007년 호성이를 따라 건축학과 건물에 놀러가며 모든 사건이 시작된 것처럼, 2024년의 나도 친구 다니엘을 따라 Real Estate 수업을 듣기 시작해서 연달아 네 과목을 듣게된 것도 비슷하다. 관심의 대상이 조금씩 확장되는 것도 유사하다. 학부 때 나는 건축학과 학생들이 건축모형을 만드는 것을 보다가, 실제 건설업체를 만나 건축현장을 들여다보고,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 공모전에 나가며 개발 아이디어를 고민해보고, 마지막으로는 도시 전체의 관점에서 지역을 변화하는 걸 상상하는 식으로 나의 관심과 시선은 계속 확장되었다. 2024년에 MBA 수업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론에서 모델로, 모델에서 시장 전체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스로 부동산 개발 디벨로퍼가 되어서 의사결정을 하는 것으로 내가 배우고 고민해야 하는 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MBA Real Estate 수업을 들으면서 15년 전 내가 건축학과 도시개발에 본능적인 즐거움을 느꼈던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다니엘이 Real Estate 수업을 들을 계획인데 너도 같이 들을래? 라고 물어볼 때 예전 학부 때의 즐거웠던 배움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래! 라고 답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호기심이 나를 Real Estate 수업으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나는 “예전에도 비슷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흥미를 느꼈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Real Estate 수업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비록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따라 이 분야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이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며 Real Estate의 깊은 세계로 계속 발걸음을 옮긴 셈이었다. 그러니까 두 사건은 매우 비슷한 평행우주처럼 보이지만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는 개별사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두 시간의 배후에는 공통분모가 분명 있었다.


부동산 투자 프로젝트나 도시개발은 철학적인 고민, 거시적인 안목, 미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부동산을 개발할 때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국가 단위, 도시 단위, 지역 단위에서 어떤 변화가 발생하고 있고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 전반에 걸친 트렌드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계속 고민하게 된다. 어떤 지역을 개발하여 바꾸고 나면 시각적으로도 이 지역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상상하게 된다. 나의 사고와 고민은 큰 관점에서 입체적이고 총체적일 수 밖에 없다.


부동산 개발이 시작되고 나면 우리가 직접 목격하는 것은 실제 이곳에 들어서는 다양한 종류의 빌딩들이다. 빌딩은 어떤 외관과 기능으로 구성하여 어떻게 지을 것이며, 그 안에 사람들은 어떻게 채우고 유동인구를 늘릴 것이며, 개발된 지역이 인근 지역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레이아웃과 디자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고, 이는 미시적인 측면에서 아름다움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다르지 않다. 미시적인 아름다움은 겉으로 보이는 디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시각적으로, 수학적으로, 재무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구현되는 아름다움이다. 구조적으로 안정적이면서도 창의성이 돋보이는 디자인의 건물을 볼 때의 아름다움과, 이 건물을 짓기 위해 필요한 Pro forma를 정교하게 완성하고 난 뒤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찬찬히 바라볼 때의 아름다움은 서로 등가였다. 거시적인 고민과 안목, 미시적인 미(美)를 계속 추구하다보면, 나, 너, 우리, 공간, 시간 등에 대해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사유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생각해보면 그 대상이 꼭 Real Estate이 아니더라도, 나는 길고 느리고 먼 관점에서 어떤 존재를 바라보고 추상적인 언어로 그 존재의 변화양상을 그려내는 것에 큰 관심이 있었다. 또 사물을 가깝게 들여다보았을 때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것을 선호했는데 이 두가지의 공통 분모가 도시개발과 건축이었던 셈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2008년부터 2024년까지 부동산 투자와 도시 개발에 본능적인 즐거움을 느꼈던 이유는 그들이 가진 학문으로서의 속성이 내가 추구하는 삶의 본질과 맞닿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는지, 어떤 것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는지와 관련해 내가 쫓는 삶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는 철학적인 사유와 미시적인 아름다움 모두를 알고 싶었고 그것을 일깨워주는 분야가 2008년이나 2024년 모두 Real Estate였다.


잠시 관점을 Real Estate에서 벗어나 MBA라는 프로그램 자체를 생각해보자.


흔히 MBA는 경영학석사 과정이긴 하지만 일반 석사 과정에 비해서는 다소 실무적이고 나이브하게 이야기하면 자본의 냄새가 많이 나는 프로그램으로 여겨진다. MBA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이나 MBA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대학 입학처 모두, MBA를 통해 커리어를 전환할 수 있고, 학생들의 샐러리는 많이 올라갈 것이고, 네트워크도 꽤 넓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MBA과정은 비즈니스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론과 기술을 2년 내에 빠르게 습득하는 것을 목표로하기 때문에 꽤 인텐시브하고, 거의 모든 수업이 실무적인 실용성을 높이기 위해 디자인되며 실용성을 염두에두고 수업이 이루어진다. 바로 그 점때문에 MBA가 다른 석사 과정에 비해서 비교적 학문적인 진지함이랄까, 철학적인 고민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MBA에 오는 학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직장생활을 5년 정도 한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가 2년 뒤에 다시 새로운 직장생활을 하는 셈이니, 비즈니스-MBA-비즈니스의 사이클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계속해서 학업적인 배움이 이어지는 다른 석사 과정이나 일반적인 직장생활과는 확실히 다른 점이다. 학사, 석사, 박사로 이어지는 학업 과정 사이에는 비즈니스나 직장생활의 경험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반대로 대학 졸업 후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든 이들은 MBA와 같이 비즈니스와 비즈니스 사이의 막간극 같은 시간이 거의 없다. MBA는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커리어 사이에 놓인 유의미한 공백에 가깝다.


이 공백의 시간 덕분에 MBA는 각자의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시간을 제공한다. 2년 간의 MBA는 커리어와 연결된 자신의 본성과 취향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많은 학생들이 MBA를 일종의 커리어 전환기로 생각하고 MBA 과정을 지나고나면 이전과는 다른 산업에서 새로운 직업 (가능하면 예전보다 돈을 더 많이 받는)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 물론 이 기대는 크게 틀리지 않다. 실제 많은 학생들이 이전의 직업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MBA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국에는 자신의 본성과 본질적인 취향에 더 적합한 것에 끌리기 마련이며, MBA학생 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본능적으로 어떤 비즈니스의 속성에 끌리는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나는 거시적인 철학적 고민과 미시적인 아름다움이 결합된 영역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누군가는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숫자로 구체화해서 가치의 겉면에 외피를 입혀주는 것을 본능적으로 선호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신호와 소음으로 가득한 노이즈 속에서 숫자의 힘을 빌어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Finance 업계를 선호할 수도 있다. 누군가 그 사람에게 왜 Finance가 좋아? 라고 물어봤을 때 엉겁결에 “난 숫자가 그냥 좋아.”라고 우선 대답했지만, ‘그런데 나는 왜 숫자가 좋은거지…?’ 라며 스스로 한 번 더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나의 본질적인 취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왜 Finance에 본능적으로 끌리는지, 나는 왜 Marketing에 본능적으로 끌리는지 한꺼풀 더 들어가 자신의 취향과 본성이 무엇인지를 추상적인 언어로 고민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취향과 본성이 이끄는 방향에서 경제적 이익, 직업적 소명, 사회적 기여의 교집합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한 삶 아니겠는가. 그러한 방향에서 우리의 커리어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건 정말로 복받은 삶 아니겠는가 말이다. MBA의 2년은 바로 추상의 언어로 자신의 속마음을 다시 그려보라고 주어진 시간 같았다. 단순히 표면적으로 매력적인 인더스트리로 옮겨가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나는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고 이 본성에 가장 어울리는 커리어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깨닫기 위한 시간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스폰서십을 받아서 MBA에 온 나는 교육 후 퇴사 시 받은 돈의 몇 배를 물어내야한다는 의무조항 때문에 회사로 돌아가야해서 고민을 섣불리 행동으로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저 Real Estate 수업을 들으며 나의 본성에 부합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어쩌면 그 점이 다른 MBA 학생들을 바라보며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들에겐 젊다는 시간이 있었고, MBA 뒤에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다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가장 부러웠다. 다양한 수업, 다양한 경험, 다양한 대화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면의 소리에 따라 본성에 맞는 커리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그들에겐 주어져 있었다. MBA는 거울의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공부만 한 사람은 쉽게 알 수 없는, 비즈니스 현장에서만 몇 십 년을 버티는 사람은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진짜 자신을 거울 너머로 발견하기 위한 2년의 시간말이다. 거울에서 자화상을 발견한 우리는 이제 다시 거울 밖으로 시선을 돌려 현실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희망, 기대, 사랑, 성공, 이런 단어들을 떠올리며 말이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다른 학생보다 더 오래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1970년 생인 김연수 작가는 20대 중반에 자신의 두 번째 장편소설 <7번국도>를 발표한 이후 마흔 살인 2010년에 <7번국도 Revisited(문학동네)>를 새롭게 발표한다. 1997년 출간된 <7번국도>는 삶과 사랑의 상처를 안은 '나'와 재현, 두 젊은이가 부산에서 시작해 포항을 거쳐 삼척, 강릉, 속초를 지나는 7번국도로 자전거여행을 떠나 체험하는 길 안팎의 이야기인데, 13년이 지나 7번국도를 다시 찾으며 기존 줄거리의 뼈대만을 남긴 채 거의 새롭게 다시 쓴 것이 <7번국도 Revisited>이다. 이 소설은 40대가 된 작가가 20대에 느꼈던 희망, 사랑, 절망, 망각과 같은 감정을 다시 되돌아보고 현재의 감정과 언어로 다시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살아간다는 건 때로 새로운 규모의 입자 가속기를 마주한 물리학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일과 비슷했다"고 말한다. 소설의 화자인 작가는 책 말미에서 "입자 가속기 안에서 일어날 일들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을 관찰하는 순간, 자신의 짐작이 옳았든 옳지 않았든 무조건 그는 놀랄 것이다. 짐작하는 것과 실제로 지켜보게 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니까. 그러니 살아가면서 나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놀라면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191쪽) 라고 되뇌인다.


40대가 된 김연수 작가가 십 수 년 전 자신이 썼던 작품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다시 쓰기로 결심한 것은, 40대가 된 내가 부동산 투자 개발, 도시개발, 건축모형과 함께 정처없이 쏘다니던 20대 중반을 되돌아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MBA 수업을 들으며 20대 시절을 다시 Revisited 했고, 거울에 비친 나의 오래된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김연수 작가처럼 나의 본성, 본능적인 취향이라는 뼈대만은 남겨둔 채 20대를 관통했던 다양한 감정을 지금의 언어로 새롭게 써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MBA 학생들처럼 거울 너머의 현실로 시선을 돌릴 수는 없지만 거울 너머로 비친 10대, 20대, 30대, 40대의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것을 늘 현재진행형 언어로 새로고침해서 다시 묘사해볼 수 있진 않을까. 그것만큼은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함께 어울리며 Real Estate 수업을 함께 들었던 다니엘은 2000년생으로 나와 열 다섯 살 차이가 났다. 다니엘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MBA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이제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만들어 나갈 일이 남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MBA에서 배운 것으로 자신의 과거와 오늘을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쓸 수 있는 어제의 작품은 아직 없는 셈이다. 나에게는 어제가 있었다. 흥행한 베스트셀러든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작품이든, 나에게는 20대 중반에 썼던 어제의 작품만큼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MBA 과정도 무용한 것만은 아니라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MBA를 거치며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Visit 할 것이고, 나는 스물다섯 무렵의 자화상을 계속해서 현재의 감각으로 Revisit 하는 것이다.


MBA의 1학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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