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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stainability. 당위는 설득 가능한가

인문학으로 MBA하다 (13)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13)
Strategy and Sustainability. 당위는 설득 가능한가
2024 Spring - Mod 4
#지속가능성, #종교, #길상사, #법정스님, #당위의설득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나오는 먼 거리에 있었다. 이 고등학교는 원래 다른 동네에 들어서 계속 거기에 있다가 내가 입학하기 몇 년 전에 어떤 산 중턱을 깎아 평지를 만든 다음 그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산 중턱을 깎은 터에 중학교, 고등학교, 크고 작은 운동장 몇 개, 수영장, 도서관, 심지어 골프 특성화 커리큘럼을 운영했던 이유로 골프 연습장까지 들어섰는데 지금 생각하면 평범하진 않은 학교였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경기도에서 중학교를 졸업해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200점 만점의 시험을 봐서 성적에 맞게 학교를 선택하던 시절이었는데, 이 학교는 인근에서 유일한 인문계 남자 고등학교였는데 공학학교에 진학하면 여학생들과 내신 경쟁에서 유리하지 않을 거라고 부모님이 생각하셨던지 이 학교로 가게되었다.


고등학교는 워낙 산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통학버스를 타고 교문에 내려 고등학교 건물까지 제법 가파른 경사로를 따라 걸어 교실로 향했다. 교문이 동쪽이었고 교실이 서쪽이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등 뒤에서 막 떠오른 햇살이 학교 건물을 반짝반짝 비추었다. 고등학교 건물 외곽의 흰 벽에는 금색으로 칠해진 어떤 글귀가 세로로 적혀있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영어로는 “Arise, Shine.” 맞다. 구약성경 예언서 중 하나인 이사야의 60장 1절의 글귀를 학교 건물 외관에 금빛으로 새길만큼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기독교를 신실하게 믿는 미션스쿨이었고 매 주 수요일 아침이면 모든 학생이 찬양과 경배에 참여하는 워십 시간이 있었다. 워십은 교실 앞에 놓인 TV를 통해 생방송으로 이루어졌다. 목사 선생님이 기도를 하고, 성경 구절을 함께 공부하고, 이어 학교 기독교 밴드 동아리가 라이브로 찬양가를 연주하면 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율동과 함께 찬양가를 불렀다. <생명 주께 있네>, <나의 가장 낮은 마음>, <야곱의 축복>, <로마서 16:19> 이런 찬양가는 지금도 내 입에서 노래가 술술 흘러나오고 20년이 지났지만 율동 동작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유명 가수 콘서트에 온 듯이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친구들이 기독교를 믿는 교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특별히 어떤 종교를 믿지 않았는데, 수요일마다의 워십 시간은 기독교 교리를 배울때면 적당히 따분하고 또 찬양가를 부를 때면 조금은 재밌는 그런 시간이었다. 매 주 수요일마다 워십을 했으니 3년이면 적어도 100번은 워십을 했을텐데, 100번의 워십에도 나는 끝내 기독교로 개심하지 않았다.


뭐, 원래 학교의 미션이 학생을 기독교인으로 만들겠다라거나 혹은 기독교를 믿는 이들만을 신입생으로 받겠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강제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두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학교는 미션스쿨로서의 신념에 충실했고 나는 종교가 없는 비종교인으로서의 내 신념에 충실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에 전교에서 1등부터 10등까지 학생을 모아 목사 선생님이 간절하게 “하느님 아버지 이 어린 양들이 수능 날 떨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시어 부디 이 학생들이 모두 서울대에 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해주실 때에도 나는 하느님이 나를 도와 서울대에 보내주실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서울대에 가지도 못했다.) 다만 우리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 주시는 목사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 나를 위해 저토록 간절하게 기도를 해준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나는 매일 학교 교문에 도착해 교실로 향하면서 학교 건물에 새겨진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라는 말을 유행어 따라하듯 매일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진 않았다. 학교와 나의 신념은 서로 다른 것이었고 신념은 누군가의 설득과 강제로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신념은 기독교를 절대 믿지 않겠다는 신념이 아니었다. 그것을 믿어야 할 이유를 아직은 찾지 못했다는 신념이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구절을 응용해 만든 노래에서 “내가 천사의 말 한다해도 내 맘에 사랑 없으면 내가 참 지식과 믿음있어도 아무 소용 없으니…” 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떤 방향을 믿고, 믿지 않는 것의 시작점은 내 안에 있었다.

믿음은 설득되지 않는다. 그걸 다시 느낀 건 MBA 1학년 마지막 Module에서 <Strategy and Sustainability>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솔직히 모든 학생들이 모든 MBA수업에 적극적이고 진심인 태도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MBA 과정 초반에 전공필수 과목으로 배우는 Finance, Strategy, Marketing과 같은 수업은 자신의 진로와 관계없이 쓰임새가 많은 과목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참여도와 집중도가 무척 높다. 그리고 1학년 중반이 지나 자신의 세부 전공 관련 수업을 듣는 Concentration 과정에서도 학생들의 참여도와 집중도는 무척 높다. 향후 자신의 진로와 관련있는 수업이기 때문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정 초반의 전공필수 과목과 과중 중반 이후의 세부 심화 전공 과목 사이에 놓인 어떤 과목들은 다소 멍한 느낌으로 수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전공 필수 과목이기 때문에 수업을 반드시 듣긴 들어야 하는데, 내가 선택한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큰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올가 교수가 가르치는 <Strategy and Sustainability> 수업은 기업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 필요성과 최근의 사례에 대해 다양한 프레임워크와 비즈니스 케이스를 다룬다. 이 수업은 Ethics, Corporate & Individual Responsibility 영역에 개설된 3개의 수업 중 하나를 선택해서 들어야 하는 전공 필수 과목 중 하나였다. 개설된 3개의 수업은 <Ethical Leadership>, <Resisting Corporate Corruption>, 그리고 <Strategy and Sustainability> 였는데, 이리저리 시간표를 계산해보았을 때 마지막 수업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수업을 듣기로 했다.


두 달 동안 이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너무나 마음이 편안했고 부담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올가 교수가 이 수업에서 가르치는 ESG 경영, 지속가능성, UN SDGs, Net Zero(탄소배출량을 2050년 등 어느 시점까지 0으로 만드는 목표)와 같은 용어와 개념은 내가 MBA에 오기 직전까지 회사에서 3년 동안 직접 담당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자가 기업의 경영활동에 있어 재무적인 수익 창출 이외에도 환경, 사회, 거버넌스 등 요구하는 항목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론, 개념, 용어는 조금씩 다르게 정의되어 오다가 2020년 무렵에 마치 화산이 분출하듯 이를 묶어 ESG라는 용어가 급격하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글로벌 투자회사 BlackRock의 래리 핑크 회장은 매 년 초 주주들에게 자신의 명의로 주주서한을 보내며 앞으로의 투자 방향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글로벌 투자회사로서 BlackRock은 어떤 가치와 철학을 갖고 금융시장에서 활동할 것인지를 밝힌다. 래리 핑크 회장은 2020년 주주서한에서 “ESG 성과가 나쁜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라고 밝히며 기업이 계속해서 시장에서 투자를 받고 싶다면 단순히 돈을 버는 것뿐만 아니라 ESG 경영에도 앞장설 것을 강조했다.


래리 핑크 회장의 2020년 주주서한과 함께 ESG경영이 시장 전반적으로 크게 확산이 되었고 마침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Pandemic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투자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Pandemic 이전까지 인류는 더 높이,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것에만 몰두하며 환경이 복원 불가능한 수준으로 파괴되는 점은 다소 간과해왔다. 그런데 Pandemic을 통해 사람과 물자의 운송이 제한되자 자연환경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복원되는지를 경험했고 이제는 자연과 함께 인간이 지속적으로 성장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ESG 중 사회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다. Pandemic 이후로 원격근무 또는 재택근무가 급격하게 확산되었는데 이렇게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한 팀, 한 회사로서의 정체성이 유지되고 소외받는 구성원이 없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회사에서 ESG 업무를 하기 시작한 건 2021년이었고 나는 운이 좋게도 ESG경영에 대해 시장과 회사의 관심이 가장 높았던 2021년, 2022년, 2023년 여름까지 이 업무를 담당하며 많은 개념을 배우고 많은 전략을 고민하고 수립하고 적용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올가 교수의 <Strategy and Sustainability> 수업은 내 몸으로 체화되어 이해되는 느낌이었고 기업 현장에서 고민하고 적용했던 ESG 경영의 한계와 사례 등을 에세이 과제로 제출해서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남들은 기초를 배우고 있을 때 나는 이미 기초를 통달하여 어떻게 응용할까를 고민하는 건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집중도와 참여도가 약간 낮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딘가 나사빠진 느낌이었고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반면에 아주 열성적인 학생들도 있었다. 무슨 법칙처럼 열성적인 학생들은 교실 가장 앞에 앉아 교수가 가르치는 수업 내용에 호응하며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 자신이 궁금했던 것 등을 거침없이 물어보며 수업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학생들의 참여도는 아주 비대칭적으로 양극화된 셈인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교실 앞자리에 앉아 아주 열성적이었던 질럿(열광자)들은 Sustainability나 Clean Energy 분야로 자신의 Concentration을 정했거나 아니면 다양성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 수업은 기초가 되는 방법론이나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 개념을 다루는 수업은 아니다. 이 수업은 학생들이 비즈니스 필드에 나가서 커리어를 만들어갈 때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어떤 기업이 경쟁자에 비해 조금 더 차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추가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가치 철학에 가까웠다. 이 가치 철학이 그들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그리고 자본시장 내에서 기업의 존속과 성장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아닌지 여부는 비즈니스의 목적에 대한 학생 각자의 신념에 달려있었다. 즉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존재하며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이상적인 비즈니스라고 믿는 이들의 신념과, 기업은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호흡하며 함께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며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재무정보 못지않게 환경, 사회, 거버넌스와 같은 비재무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개선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의 신념은 달랐다. 그건 신념의 문제였기 때문에 설득을 통해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방향성의 당위에 대해 스스로 납득하는 것이 중요했다.


기업에서 ESG업무를 하다가 MBA에 와보니 느껴진 이질감 중 하나는 여전히 ESG, 지속가능성, Net Zero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든 기업이든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비즈니스의 본질이라고 믿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회사에서 ESG 전략을 고민하고 실행하던 2021년에서 2023년은 글로벌 투자시장의 경향도,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의 시각도, 심지어 회사가 소속된 그룹 전체의 경영 화두를 고민하는 기업 오너도 모두 ESG에 대해 뜨거운 관심을 보냈다. 회사에서는 통상 매 년 가을에 앞으로의 회사 중기 전략을 수립해서 이를 다른 회사의 CEO들이 모두 모인 전체 워크숍에서 공유하곤 했다. 한 해의 농사를 결산하는 자리이기도 하며 앞으로 몇 년 동안 회사가 추진할 전략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CEO 입장에서, 그리고 회사 전체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세션이다. 그런데 내가 ESG 추진 부서로 이동했던 2021년에는 이 중기 전략 수립 업무를 통상적인 경영기획부서가 아니라 우리 부서가 담당하게 되었다. CEO는 회사의 거시적인 장기 전략이 ESG경영을 실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고, 때문에 우리 부서에서 전체적인 전략 수립과 자료 구성 그리고 발표에 이르기까지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내가 직접 경험한 ESG는 회사 경영의 요체였고, 모든 구성원이 이러한 변화 방향에 잘 공감하며 우리 부서와 잘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Pandemic을 겪으며 기업의 미래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라고 믿게 되는 직장인으로서의 가치 철학, 회사 내에서 적지않은 구성원이 관심을 가지고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공감해준다는 인식, ESG 경영이 불타올랐다가 금방 사그라지지 않고 어느 정도는 장기적인 추구 가치로서 기능을 할 것이라는 외부의 평가, 이런 것들이 결합되어서 ESG에 대한 나의 신념이 만들어졌다. 1조원을 벌 수 있지만 탄소 배출량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8,000억원을 벌어도 좋다는 생각, 다양한 구성원이 모여들고 그들을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나만의 정체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나는 진심으로 믿었고 그런 믿음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회사적인 차원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나는 ESG 관련 일을 할 때 비로소 내가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직장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0년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딛었을 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소위 ‘기름회사’의 정체성이 전부였다. 그래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가끔 대학생 친구들을 만나서 다들 어떻게 사는지 근황토크를 할 때 친구들은 나를 보고 “오 기름회사! 돈 많이 벌겠네!” 라고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기름회사는 확실히 돈을 많이 버는 업종 중 하나였고 내가 입사하고 나서 몇 년 동안은 고유가가 지속되어 회사 실적이 좋았던 탓인지 연말 성과급을 적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나도 속으로 ‘오 기름회사! 역시 돈을 많이 주는구나!’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받는 것만으로는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돈을 많이 주는 기업은 내가 다니는 회사말고도 많았고, 극단적으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를 하는 것이 어쩌면 시간 측면에서는 더 빠를 것이었다. 물론 내가 다니는 회사가 성공해서 돈을 많이 받고 회사 핵심 부서에서 경력을 쌓으며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무척 중요하고 나도 그로부터터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목마름이 채워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그 이상의 가치를 꿈꾸게 된다. 나는 그것을 2021년에 ESG 담당 부서로 이동하면서 발견했고, 내가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치에 부합하는 일을 드디어 하게 되었음을 느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 현재가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 아마존과 아프리카와 남극과 북극이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많은 생명이 멸절되어가는 것을 되돌리기 위해 고민하는 것, 나는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이 옳다고 믿었고 그러한 것을 개인적인 관심에 머물지 않고 일로 추진할 때 비로소 내가 인간으로서 의미있다고 여겼다. 나의 관심과 믿음은, 누군가 내게 강제하거나 설득해서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신념으로 존재했고 마땅히 해야한다는 뜻인 ‘당위’는 설득의 산물이 아니었다. 너는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을 나는 누군가에게 설득할 수 없고 누군가도 나에게 설득할 수 없다. 그것은 애초부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정해진 행동양식을 준수하듯, 알 수 없는 힘으로 이끌려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업은 수익을 만드는 곳이라고 믿는 이들과, 기업은 이해관계자와 함께 환경, 사회, 거버넌스 측면에서 긍정적인 내일을 만드는 곳이라고 믿는 이들은 각자의 당위에 따라 움직이며 서로를 쉽게 설득할 수 없다. 내가 제일 경계했던 말은 우리는 수익을 추구하면서도 ESG를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지 않다. 수익과 ESG는 함께 공존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면, 각자의 신념과 당위에 따라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내가 2023년 여름 MBA에 온 다음 해에 회사 상황은 매우 어려워졌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길어지면서 회사 손익에 영향을 주는 국제 유가 지표가 계속 불안정했고 재무적으로도 많은 부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이자비용으로 나가는 비용이 적지 않았다. 이렇게 기업 재무상황이 안좋아지자 가장 손쉽게 내리는 결정은 덜 불필요해보이는 ESG 목표를 줄이거나 하향조정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시점까지 탄소배출량을 50% 감축하자고 했는데 기존 목표대로 추진하자니 당장의 비용이 염려되기 때문에 배출량 감축 목표를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탄소 배출량 감축이라는 활동은 어느 정도 계속 하면서도 기업이 지불해야 할 비용은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눈가리고 아웅이다.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기 어려울 때 수익과 관련이 없어보이는 요소부터 제거한다. 여전히 이것 아니면 저것인 상황에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을 함께 추구하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여전히 내가 다니는 회사를 지배하는 신념과 당위는 “기업은 수익을 창출한다.” 였다… 비즈니스 맨으로서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ESG 부서에 있으며 개인적인 신념과 회사의 가치철학이 일치할 때의 짜릿한 맛을 봤던 나로서는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을 뿐이다.


당위는 설득 가능한가?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주장은 과연 타인에게 얼마나 설득력있을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분수령 앞에서 우리는 다양한 신념 중 어떤 신념을 선택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이 올가 교수의 <Strategy and Sustainability> 수업을 듣는 내내 주변 친구들의 무관심한 표정을 보며 피어올랐다. 교실 앞자리에 앉아 열성적으로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은 내가 2021년 그랬던것처럼 자신의 신념과 학교의 수업이 일치하기 때문에 몹시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복잡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설계해 최대의 수익을 거두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다수의 학생들에게, Sustainability라는 분야를 비즈니스 세계의 당위로서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점에서는 자신이 없었다. 당위는 설득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위는 다른 사람에게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것에 가까웠다.


마흔 살 가까이 지금까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로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영적인 존재의 가능성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떠올리는 영적인 존재가 각 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인 단 하나의 존재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지만, 인간은 살아가면서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세속에서의 성공과 영적인 마음의 충만함을 함께 쫓는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누가 나에게 설득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를 믿었던 어머니를 따라 가족은 늘 전국의 이름난 사찰로 여행을 다녔는데 대웅전에서 사람들이 절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믿는 사람으로서의 간절함이 인상적이었고, 대웅전 근처 절간 처마 밑에 앉아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볼 때면 속세에서 벗어난 영적 공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대학에 들어와 친구를 따라 1년 정도 서울 금호동 성당에 다닌 적이 있는데 기독교 워십과는 다르게 경건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자리에 앉아 기도하는 교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역시 믿는 사람으로서의 간절함과 그들이 믿는 영적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 적도 있었다. 성당 신부님이 경건하게 <내 발을 씻기신 예수> 노래를 부르신 적이 있었는데 그건 고등학교 워십 시간에 떠들썩하게 기독교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서울 성북동에 가면 길상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은 법정 스님의 영정과 유품이 모셔져있기도 하고 기생 출신인 김영한이 원래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법정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길상사>라는 절로 공덕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길상사 경내에 들어서면 서울 시내에 이렇게 꽤 넓은 부지의 절이 있음에 놀라게 된다. 경내 한편에는 돌로 만들어진 관세음보살상이 서있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천주교의 마리아상인지 불교의 관세음보살상인지 헷갈릴정도로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조각가 최종태 선생의 작품인데 그는 서울대학교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던 1958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터라, 이 관세음보살상은 천주교의 신자가 빚어낸 불상인 것이다. 길상사 관세음보살상을 보며 나는 종교는 비록 교리와 믿음의 대상이 서로 다르지만 그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통분모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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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미션스쿨인 고등학교에 갈때만 해도 나는 기독교를 믿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니와 왜 종교를 사람들이 갖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다. 십대 후반의 나는 어차피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선택하는 것은 나라는 실존적인 존재인데 종교는 일시적인 마음의 위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수 십 년에 걸쳐 나는 조금씩 종교, 신앙, 믿음, 초월적인 존재와 같이 교인들이 ‘마땅히 그렇다고’ 믿는 가치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개념들을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그 개념을 믿는 사람들의 간절함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직 종교를 가져야 한다거나, 사람은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이 말하는 당위의 일부분은 내게 스며들었다. 그건 어느 한 순간에 어느 한 사람의 강제적인 언어로 내가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기간 스스로 경험하고 고민하는 것이 반복되며 알게 모르게 나의 삶에 흡수되는 과정이었다. 진심을 다해 끈질기게 누군가를 설득해야 내가 믿는 당위를 타인에게 설득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신념을 바꾸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신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체는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고, 내가 믿기 시작해야 그들의 당위가 나의 당위가 되는 법이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씩 그들의 당위 속에 노출되고, 그것을 경험하고, 긍정과 불신이 교차하며 조금씩 나의 생각이 바뀌는 긴 여정 속에서 그들은 내게 스며든다. 나는 스며듬이 없는 완벽한 세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MBA 수업으로 돌아가보면, 나를 포함해 몇 명의 열렬한 질럿들은 올가 교수가 가르치는 내용을 매우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공감했다. 우리는 서로 같은 신념을 가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심한 표정의 다른 학생들도 언젠가는 조금씩 내가 믿는 Sustainability라는 당위에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거다. MBA를 마치고 다시 필드에 나가 이런저런 경험을 더 쌓으며, 가족을 이루며, 단순히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며, 때로는 자신이 믿던 가치체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중대한 위기를 겪으며, 예상하지 않았던 집단과 친분을 쌓는 가운데 비즈니스의 본질이 ‘모두가 함께 끝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라는 믿음과 당위가 누군가에게는 조금씩 스며들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수업 한 번만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180도 바뀌기 쉽지 않지만 말이다.


내게 무언가 스며들기 위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영화 <인터스텔라(2014)>에서 배우 매튜 매커너히가 연기한 쿠퍼는 영화 종반부에서 동료 아멜리아 브랜디 (앤 해서웨이 배우)를 살리기 위해 자진해서 블랙홀 가르강튀아로 빠지게 된다. 이런 쿠퍼의 결심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마지막에야 쿠퍼의 행동을 보며 브랜디가 당황해하자 쿠퍼는 “뉴턴의 제3법칙이요.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버려야죠. (Newton’s third law - you have to leave something behind)”라고 말한다.


뭔가를 얻으려면 뭔가를 버려야하고, 뭔가 스며들려면 뭔가 비어있어야 한다. 내 안의 어딘가 비어있지 않으면 외부의 당위들은 나에게 스며들거나 흡수되지 못하고 밖에서 겉돌고 증발해버릴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해 비즈니스의 본질이 수익 극대화에만 있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이해관계자 모두가 건강하게 끝까지 잘 사는 지속가능한 내일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Strategy와 Sustainability가 일치할 때 느꼈던 짜릿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꼈으면 좋겠다. MBA 학생들 중에도 꽤 많은 학생들이 어린 자녀를 두고 있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지금 해야하는 것을 더 많은 비즈니스의 사람들과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다른 MBA 학생들에게 스며들었으면 하는 나의 당위였다.


내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의 당위가 그들에게 아주 조금씩, 서서히 스며들 수 있도록 그들이 아주 작더라도 약간의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 수익이 아닌 것도 비즈니스의 본령이 될 수 있다는 공백이 있을 때 나는 법정 스님의 말처럼 세상도, 인간도 좀 더 맑고 향기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약간은 빈 마음을 서로 가진 채 맑고 향기롭게 살고 싶은 것이다…


빈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 2012년 3월 찾은 성북동 길상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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