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MBA하다 (12)
인문학으로 MBA하다 (12)
Management 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2024 Spring - Mod 4
#커뮤니케이션, #음악, #브로콜리너마저, #커뮤니케이션의이해, #발표
MBA 과정에서 2년 동안 모두 41개의 수업을 들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수업을 꽤 많이 듣는 편이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6년 동안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47개 수업을 들었는데 다른 단과대학의 전공과목이나 교양과목을 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경영학과 수업은 30개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MBA에서는 41개 수업 모두 경영학과 전공필수 또는 전공선택 과목이었고 이를 2년 내에 들어야 했다. MBA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내가 들었던 41개의 수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또 개인적으로도 여러모로 생각할 점을 남겨주었던 수업이 1학년 마지막 Module에 들었던 <Management Communication: Presentation Skills> 수업이었다.
학교마다 MBA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향은 저마다 조금씩 다를 것인데 UNC at Chapel Hill의 특징은 그룹 발표가 유난히 많다는 점이었다. 교수들에게 Kenan-Flagler Business School 특징에 대해 물어보면 기본적으로 이 학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Public School이기 때문에 다소 엄격한 행정 절차도 존재하고 학생들에게 대면 출석을 반드시 요구하는 등 공립학교로서의 엄격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동시에 교수들에게는 연구 주제, 범위, 시기에 대해 꽤 많은 자유도를 주기 때문에 Public School이면서도 Private School과 같은 특징을 갖고있다고 했다.
공립과 사립의 특징이 혼합된 특징은 MBA 수업에서도 잘 드러났다. (사실 어디까지가 공립학교의 특징이고 어디부터는 사립학교의 특징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학교 수업은 Lecture를 기반으로 했다. Finance든, Strategy든, Marketing이든 기본적으로 교수가 Lecture 중심으로 강의를 이끌어가는데, 거의 대부분의 수업은 네 다섯 명이 그룹을 만들어 프로젝트를 Module 내내 진행하고 그 결과를 마지막 수업에서 앞에 나와 발표하는 그룹과제를 포함했다. HBS처럼, 교수가 강의실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무자비하게 학생들에게 Cold Call을 하며 비즈니스 케이스에 대한 토론을 중심으로 수업이 진행되는 MBA 프로그램도 있었지만, 우리 학교는 강의와 그룹 발표 두 축이 수업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룹 발표는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한 수업에 5-6개의 그룹이 있고 수업은 100분이므로 한 그룹은 길어야 15분 정도 발표를 하면 되고, 뭐든지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인지 모든 발표는 모든 조원이 참여해서 나눠가진다. 그러므로 한 개인이 발표하는 분량은 고작해야 2-3분 남짓이고 세 네 장의 슬라이드를 발표하면 자신의 몫은 다한 셈이다. 자신이 발표할 슬라이드는 보통 자신이 직접 만들기 때문에 발표 내용이 낯선 것도 아니다. 수업을 듣고 중간고사과 기말고사를 보면 되었던 MBA 초반을 지나, 처음 그룹 발표를 할때는 분명 적지않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무뎌졌던 것 같다. 가리온이 <영순위> 노래에서 “니 첫 가사를 기억해?! 그 포부 가득했던 두 눈과 첫 번째 선 무대를 기억해?!”라고 외친 것처럼 나도 내 첫 발표를 기억한다.
하이디 슐츠 교수가 가르치는 <Management Communication: Presentation Skills> 강의는 수업마다 발표를 어떻게든 해야하는, 그리고 졸업 후 필드에 나가면 다양한 형태의 발표를 할 수 밖에 없는 MBA학생들을 위해 개설된 전공필수 과목이었다.
이 수업은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어떻게 만들어서 어떤 태도와 기술을 발휘하여 상대방에게 전달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아무래도 프리젠테이션에 대해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30명에서 40명이 듣는 다른 수업보다 규모를 확 줄여서 18명만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래서 수업이라기보다는 소규모 워크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수업에서 모든 학생은 혼자 발표를 준비하고 개인 발표를 다섯 번 하게 된다. 첫 수업에서 기본적인 자기 소개를 하며 가볍게 몸을 풀고나면, 나머지 네 번의 개인 발표는 교수와 같은 학생들로부터 평가되어 성적에 반영된다. ‘정보 전달 목적’의 발표를 두 번 하는데 한 번은 대면으로 강의실 앞에 나가 발표하고, 다른 한 번은 Zoom에서 온라인으로 발표한다. 2020년 Pandemic 이후 온라인 미팅이 많아졌기 때문에 실제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것과 작은 스크린에 얼굴만 등장하는 온라인 발표는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려는 목적이다. 이어 가장 성적 반영 비중이 높은 세 번째 발표는 ‘설득 목적’ 발표인데,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주제에 대해 이 주제를 왜 사람들이 이해하고 공감해야 하는지를 청중을 설득하는 발표다. 마지막은 자유 발표를 하는 것으로 모든 발표표가 끝나게 된다.
수업 초반에 나는 미국식 발표에 대해 근본적인 어려움을 느끼며 조금 헤매고 있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데, 각자 선호하는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를 ‘쓰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면 나는 두말할 것 없이 ‘쓰는 사람’ 쪽이었다. 남들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다거나 아니면 말주변이 없다는 쪽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수반되는 에너지의 크기였다. ‘쓰는 사람’은 우선 활자로 자신의 생각을 적는다. 정보 전달 목적이든,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함이든, 혹은 소설을 쓰는 것이든 머리 속에 담긴 무형의 정보를 유형의 텍스트로 옮겨 적는다. 그리고 쓰여진 정보를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그 정보를 읽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인 상대방의 몫이며, 만약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원작자인 ‘쓰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고 그럴 경우 ‘쓰는 사람’은 말과 글로 응답하며 계속해서 소통하면 된다. 그러니까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과 한 쌍이며 쓰고 읽는 행위를 각자 나누어 분담한 뒤 내용에 대해 공통적으로 이해된 지점에서 좀 더 세밀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이들의 커뮤니케이션은 ‘북토크’나 ‘작가와의 만남’ 같은 것이었다. 작가와 커뮤니케이션 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작가가 쓴 소설을 읽지도 않은 채 혹은 작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 와서 정보를 습득하지 않는다. 이들의 커뮤니케이션은 무에서 무가 아니다. 유에서 유다. 작가의 작품이라는 공통 분모를 서로 충분히 이해한 뒤에 그것을 바탕으로 디테일한 커뮤니케이션을 나눈다. 그것이 내가 선호하는, ‘쓰는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반면 ‘말하는 사람’은 정보를 생성해서 이를 ‘듣는 사람’에게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 말로 전달하는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 ‘말하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가장 다른 점은, 화자에서 청자로 정보가 전달되는 것이 동시에 발생하는지 아니면 순차적으로 발생하는지에 달려있다. ‘말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과 동시에 정보를 교류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주체가 ‘말하는 사람’에 있다. 반면 ‘쓰는 사람’은 정보를 생성한 뒤 이를 ‘읽는 사람’에게 동시에 전달하지 않는다. 쓰는 시간이 따로 있고, 읽는 시간이 따로 있기 때문에 정보의 전달, 정보의 교류, 정보의 수용은 상대방인 ‘읽는 사람’의 몫이다. 정보를 전달할 때 사용되는 에너지를 생각해보면 ‘쓰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어떻게하면 새어나가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나로서는 말하는 것보다는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발표하는 것보다는 나의 사유를 활자로 적어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편을 더 선호했다. 그러니까 나는 발표 자체에 대한 일종의 주저하는 감정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발표는 한국에서 15년 회사 생활을 하며 내가 접하고 생각했던 발표와는 조금 다른 측면도 많았다. 한국에서 내가 경험한 발표는 ‘전달’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상대방은 그것을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발표는 온전히 발표자의 몫이었고 화자와 청자가 주고받는 핑퐁은 꽤 느린 사이클로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반면에 하이디 교수가 강조하는 발표의 핵심은 ‘발표자와 청중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였다. 발표는 발표자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채널이 아니라 청중이 발표에 몰입하며 공감하는 장이었기 때문에, 발표자는 어떻게든 청중이 발표에 계속해서 집중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고민을 해야한다. 청중이 발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관심을 초기에 끌어모으는 Hook을 발표 초반에 배치하고, 모든 슬라이드는 단 하나의 간결한 메시지를 전달해서 청중이 혼란스럽지 않아야 하며, 발표 도중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즉석 Poll을 하면서 계속해서 그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경험한 발표는 발표자와 청중 사이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고, 어느 포인트에서는 다들 낄낄대고 웃었고, 그 유쾌함 속에 ‘그런데 말이지…’ 하면서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핵심 정보를 슬쩍 집어넣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발표를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지 감을 잘 잡을 수 없었던 나는 첫 두 번의 발표에서는 꽤 부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두 번 모두 정보를 전달하는 유형의 발표였다. 하나는 내가 회사에서 마지막까지 소속되었던 부서가 기업의 ESG전략을 수립하는 부서였던 점을 떠올리면서, <최근의 전 세계 ESG 트렌드>를 발표했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급격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전환의 위험>이라는 꽤 어려운 주제로 발표를 했다. 내 발표를 들은 학생들은 비교적 잘했다는 의례적인 격려를 보낸 뒤 ‘내용이 생소하고 어렵다’, ‘Hook이 없어서 초반에 발표가 다소 딱딱하게 느껴졌다’, ‘슬라이드에 여러 메시지가 섞여있다’ 등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다. 첫 두 번의 발표과제는 성적 반영 비중이 높진 않았지만 콘텐츠를 만들고 그걸 전달하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세 번째 발표를 했던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세 번째 발표는 남을 설득하는 목적의 발표인데 학생들은 각자 원하는 주제를 정해서 발표를 준비할 수 있었다. 뉴스, 학술지, 논문에서 제시된 주장을 소개하고 왜 이 주장대로 우리가 믿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이유를 같이 제시해서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을 납득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내가 택한 주제는 <Don’t be afraid of pursuing Work Life Balance, we can keep outperforming!>였다.
MBA에 오기 전 다행스럽게도 회사에 밤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했던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직급은 높아지고 덩달아 해야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예전에는 여유롭게 6시가 지나면 퇴근하던 것이 조금씩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퇴근하거나 아니면 퇴근 후에 집에서 남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회사에서 어느 순간부터 좋은 평가결과를 받기 시작하다보니 처음에는 마냥 기분이 좋았지만 시간이 가면서 평가결과가 누적되자 점점 불안해지는 것이 많았다. 지금까지 누적된 이 평가결과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부담감, 평가결과가 우수할수록 주위에서 내게 거는 기대감과 요구하는 책임감이 늘어나는 것에서 오는 압박감 등이 스스로를 계속 불안함 속에 일에 몰두하도록 채찍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MBA 프로그램에 선발되기 직전에는 이유없는 불안증세가 심해져서 정신과에도 가보고 한약을 지어 먹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일상 생활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증세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개인적인 경험을 섞어 발표자료를 준비했는데 나는 Hook을 잊지말라는 하이디 교수의 조언을 떠올리고는 미국의 유명한 컨트리 뮤직 가수인 돌리 파튼의 사진을 발표 슬라이드 첫 장에 걸어놓았다. 1946년생이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돌리 파튼은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이미자 또는 인순이에 해당하는 명성과 실력을 갖춘 가수다. Work and Life Balance 관련 명언을 Hook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서 관련 정보를 검색해보다가 돌리 파튼이 “Don’t get so busy making a living that you forget to make a life” 라는 말을 했다는 걸 발견하고는 이거다 싶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잃지말아야 한다고 돌리 파튼이 말했다. 나는 할머니 나이임에도 육감적인 몸을 자랑하는 돌리 파튼의 사진으로 발표를 시작했는데 그녀를 알아본 미국인 학생들이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서구권에서 온 외국인 학생이 한국에 와서 발표를 하는데 가수 이미자나 인순이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들이 말한 글귀를 읊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어딘가 웃기지 않겠는가?
여튼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성공한 나는 본격적인 발표를 시작했다.
2010년 스물 여섯 살에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 MBA에 오기 직전까지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작은 성공을 거두는 것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이 성공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안된다는 강박감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 뒤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틀릴 수도 있다, 잘못될 수도 있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내용을 조금 더 이야기한 뒤 마지막 슬라이드에서는 발표 며칠 전에 나와 아내 그리고 딸이 함께 참여했던 ‘4 mile Run’ 대회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회 며칠 전부터 딸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회 당일에는 한 번도 뛰지 않고 4 mile 내내 천천히 걸어서 결승점까지 당도했는데, 결승선이 저 멀리 보이자 그제서야 우리 셋은 뛰어서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뛰었던 모양으로 달리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바로 그 장면을 사진작가가 촬영한 모양인데, 나는 우리가 하이파이브를 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가 뛰었던 달리기 대회처럼 인생은 한 편의 긴 여정이고 끝까지 삶이라는 여정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Work and Life Balance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길었던 발표를 끝냈다. 같은 반 학생들은 놀랍게도 끝까지 내 발표를 들어주며 집중하는 모습이었고, 몇 명은 수업이 끝나고 나가면서 인상적이었다고 말을 건넸다.
세 번째 발표에 이어 네 번째 발표도 큰 어려움없이 끝내며 나는 이 수업에서 가장 높은 성적인 H(Honor) 등급을 받았다. 처음 두 번의 발표를 할 때만 해도 제발 평균인 P(Pass)만 받자, 하위 5%에 해당하는 L(Low Pass)은 받지 말자는 것이 목표였던 내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미국 학생들 속에서 H를 받은 것이다! 하이디 교수는 “피터, 너는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보였어. 말할 때의 목소리나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너의 장점이야. 수업에서 배운 것을 잊지말고 나중에도 잘 적용해봐!” 라고 피드백을 남겨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영어로 발표를 하는 수업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기뻤고, 한편으로는 미국 학생들이 발표하는 걸 지켜보는 것도 꽤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말하길 좋아하는 수더분한 성격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말을 잘한다는 것이 강단 앞에서 청중을 대상으로 발표를 잘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MBA에 와서 초반에 가장 적응이 안되는 것 중 하나는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지나치게 말을 잘하고 지나치게 말이 많다는 점이었다. 수업시간에 교수가 “자 이제부터 이 주제에 대해 너희들끼리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눠볼래? 그런 다음 너희들끼리 이야기한 결과를 함께 공유해보자.“ 라고 말하면, 교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은 좌우를 둘러보며 말을 쏟아낸다.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주제에 생각해온것처럼 저마다 이야기하기 바쁘고 교실 전체가 학생들의 목소리로 가득 찬다. 질문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하거나, 그룹으로 나누어 각자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침묵이 흐르는 한국과는 무척 다르다. 이 ‘언제라도 어떤 주제라도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환경이 가장 낯설었다.
그랬던 미국 학생들도 막상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하라고 하면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마케팅을 전공하는 한 학생은 늘 명랑하고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앞에서 발표할 때면 청중을 보지 않고 모니터만 보면서 준비해 온 발표 대사를 빠르게 읊조리고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발표하는 도중 음, 음, 이러면서 말 시작마다 뜸을 들이면서 대사 전달력이 부족한 학생도 있었고, 또 어떤 학생은 꽤 긴장했던지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 모두가 스티브 잡스처럼 발표를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겠지만, 대부분은 미국 학생들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자신감있게 발표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발표하러 앞에 나와서 보여주는 겉모습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준비해 온 내용을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모니터만 바라보거나, 중간중간 말을 끊으며 할 말을 더듬거나, 목소리가 떨리더라도 어쨌거나 그들은 자신이 준비한 내용을 전달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할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건 꽤 큰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미리 고민하며 프리젠테이션을 완벽하게 준비해서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하는 태도와, 남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보다는 자신이 어떤 내용을 청중에게 딜리버리 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발표 중 통제되지 않은 태도를 보여주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보통 첫 번째가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프리젠테이션을 멋지게 해내는 사람에게서 호감을 느끼고 좀 더 그 사람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면 결국 더 좋은 프리젠테이션, 그것보다 더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스스로에게 강제하게 되므로 결국에는 내가 세 번째 발표자료에서 이야기했던 성공의 악순환에 빠질 수 밖에 없게 된다. 내가 99번을 잘하더라도 한 번을 삐끗하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 고민을 계속 스스로에게 남겨놓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언제나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어차피 실수는 발생하고, 오류는 반복되고, 해당 분야에 대해 나보다 더 깊은 식견과 넓은 지식을 가진 청중은 존재하기 때문에 소위 이 스테이지를 ‘찢어버리는’ 발표를 하는 것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이미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발표를 하는 내 모습을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의식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된다면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보다는 내가 전달할 발표 내용에 좀 더 신경을 쓰게된다. 실제로 몇몇 학생들은 발표하는 모습이 상대적으로 미흡했지만 자신만의 경험, 지식, 생각을 결합한 솔직한 발표자료를 최선을 다해 전달하고 있었다. UNC at Chapel Hill에서는 의학대학이나 약학대학 학생들이 MBA를 이중전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학생들은 자신이 병원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을 살려 멋진 주제거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의 부모는 아시아, 중동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양한 국가와 지역의 문화를 경험한 학생들은 토종 미국인이라면 알기 어려운 아시아권 결혼 문화에 대해 들려주었다.
겉으로 보이는 발표 능력은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물론 겉으로 보이는 발표 능력도 중요하지만) 청중이 몰입할 수 있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그리고 이 발표자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독창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이야기를 고민하고 그걸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이디 교수가 가장 강조한 점도 바로 이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가 아니다. 남에게 전달되는 내용이 진실되고 독창적인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내용에 신경쓰자는 태도는 MBA 생활 내내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차피 나는 미국에서 마이너리티의 존재다. 내가 저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잘하는지 여부와 별개였다. MBA가 끝난 이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 여지도 없었기 때문에 2년 정도 이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스쳐가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건 쉽게 동화될 수 없다는 슬픈 운명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서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방식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언어는 다르기 때문에 나의 영어는 어떻게 해도 내가 모국어인 한국어를 하듯 저들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서툴러도 좋다. 어차피 언어의 차이로 오류와 실수는 늘 발생하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같은 언어라도 오류와 실수는 늘 발생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나의 고민과 경험을 어떻게든 솔직하게 전달하려는 노력만큼은 멈추어서는 안되는거다. 최선을 다해 솔직하게, 그렇지만 틀릴 수 있고 부족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내가 한국 회사에서 계속해서 좋은 평가를 받아왔던 것과는 반대로 스스로를 ‘서투른 이방인‘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인디밴드 브로콜리 너마저가 2010년 발표한 2집 앨범 <졸업>에는 두번째 트랙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노래가 실려있다. 브로콜리 너마저에서 보컬 및 베이스를 맡고 있는 멤버 덕원은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는 언론정보학과에서 학부생이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필수 과목인데 덕원이 이 수업을 듣다가 너무 지루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찾아보니 현재도 1학년 1학기에 가장 첫 과목으로 동명의 수업을 듣도록 되어있다!
브로콜리 너마저가 말한 커뮤니케이션이란 ‘말 같은 말‘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아무리 신뢰가 가는 목소리와 태도와 멋진 슬라이드로 발표를 완벽하게 해도, 말도 안되는 말을 늘어놓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거다. 다소 투박하더라도, 다소 부족하더라도, 그들이 전달하려는 말이 진실되거나 개인의 경험에 기대어 독창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 청중은 어떻게든 자세를 바로 하면서 화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청중이 화자에 귀 기울이는 것을 보면서 화자 역시 조금 더 자신이 준비한 말 같은 말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은 각자의 삶이 녹아든 진실에 달려있다.
나는 MBA에서 다양한 그룹 프로젝트를 하면서 최대한 말 같은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성공한 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납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발표할 때면 발표는 늘 버벅이고 꼬이고 망하기 일쑤였다. 내가 이해한 것, 믿는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이 일치될 때 나는 비교적 스스로에게도 만족스러운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것 같다. 학교 시스템에서 좋은 점 중 하나는 모든 수업이 자동으로 녹화되어 나중에 언제라도 온라인으로 수업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인데, 나는 가끔 내가 그룹 프리젠테이션했던 모습을 찾아서 다시 재생해보곤 했다. 동영상 속 내 발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겉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떨지 않고 침착해 보이는가?
내 영어발음은 괜찮은가?
나는 발표도중 멈추거나 주저하지 않고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던가?
무엇보다 나는 ’말 같은 말‘을 했던가?
말도 안되는 말을 늘어놔 거짓말처럼
사실 아닌 말로 속이려고 해도
넌 알지 못하는 그런건가 봐
생각이 있다면
좀 말같은 말을 들어보고 싶어
나의 말들은 자꾸 줄거나
또 다시 늘어나 마음속에서만
어떤 경우라도 넌 알지 못하는
진짜 마음이 닿을 수가 있게
좀 말같은 말을 해보고 싶어
브로콜리 너마저,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가사 중, 2집 <졸업>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