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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Management. 기획의도

인문학으로 MBA하다 (17)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17)
Project Management. 기획의도
2024 Fall - Mod 1
#프로젝트관리, #방송, #기획의도, #무한도전, #메타



나는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면서 조별 과제, 그러니까 팀플(팀 프로젝트)에 익숙한 편이었다.


경영학과 1학년과 2학년까지는 전공필수 과목을 중심으로 수업을 들었는데 이런 전공필수 과목은 수업-중간고사-수업-기말고사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갱지 종이 가득히 에세이를 적거나 객관식으로 된 문제를 푸는 시험을 푸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3학년이 되어 전공선택 과목의 비중이 많아지면서부터는 매 수업마다 팀플을 하나씩 해야 했다. 팀플은 워낙 악명이 높아서 밈도 많이 생산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꽤 흥미로운 작업이다. 교수가 어떤 주제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 프로젝트의 배경과 목적을 제시하면 그 다음부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었다. 누구와 같은 팀을 할것인지, 정해진 주제 내에서 구체적인 연구 사례는 무엇으로 할것인지, 마감기한이 언제라면 어느 시점에는 어느 정도의 진척도를 보여야 하는지 등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를 같은 팀원들과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 팀플은 꽤 자유도가 높았다.


물론 팀플 과정에서 연락이 잘 닿지 않는 프리라이더 학생, 나이가 많거나 학년이 높다며 권위를 내보이는 학생, 그러나 그 권위만큼 뭔가를 직접 하지는 않는 학생, 객관적으로 실력이 부족한 학생,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만 하며 삐딱선을 타는 학생, 발표는 내일인데 여전히 뭘 해야하는지 감을 못 잡고 있는 학생 등 팀플을 악명 높게 만드는 빌런들이 많이 존재한다.


이런 빌런로부터 프로젝트를 지키고 어떻게든 끝까지 완주하려면 역설적으로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 시절 내내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PM(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하는 걸 좋아했다. 거창하게 내가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리더이고 모두 나를 따르라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의 가장 큰 베네핏 중 하나는 내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팀플 주제로 선정하기 쉽다는 점이었다. 대학시절의 우리는 수업을 통해 경영학을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우리가 가진 지식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다. 어느 한 명이 압도적으로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거다. 대학생일 때는 2년 차이만 나도, 2학년일 때 바라보는 4학년은 엄청나게 나보다 뛰어나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현자처럼 느껴지지만, 돌이켜보면 2학년이나 4학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거기서 거기라면, 누군가 제법 그럴듯한 아이디어만 낸다면 특별히 그 아이디어를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어차피 해야하는 프로젝트라면 내가 관심있고 하고 싶은 주제를 하면 그나마 덜 지루하고 좀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언제나 팀플 첫 미팅에서 괜찮으면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내가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남들은 모두 어떤 주제에 푹 빠져 신나있는데 나만 주제에 공감하지 못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심드렁한 마음을 갖는 것보다는 뭐라도 재밌게 하는게 더 나아보였다. 패기 넘치던 2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


돌이켜보면 같이 팀플을 했던 대부분의 친구들은 빌런이 아니라 하나같이 훌륭한 히어로들이었고, 내가 제안하는 프로젝트 주제에 대해 크게 이견을 제시하는 친구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경영학과 학부 시절 경험한 십 수 개의 팀플에 대해 모두 즐거운 기억을 갖고 있다. 운이 좋았다. 나는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초기에 아이디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교수가 제안한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다소 이질적인 사례를 찾는 걸 좋아했다. 4학년 1학기에 수강한 국제경영 수업에는 해외의 우수한 경영 사례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다. 다른 팀은 대부분 당시에 유명한 해외 기업을 조사했는데, 건축과 부동산 개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도시 개발 분야에서 성공한 경영 사례를 찾고 싶었다. 해외의 유명 도시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도시를 브랜딩하는데 성공했는지, 혹은 도시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의 브랜드와 어떻게 협업을 하는지 Brand Urbanism의 사례를 조사했는데 서울, 도쿄, 싱가포르, 상하이 등 아시아의 메가시티가 브랜딩에 성공을 거둔 몇 사례를 조사해서 제출했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계속 고민했던 건 어떻게 하면 교수가 제시한 주제와 우리의 연구 사례가 어긋나지 않을 수 있는지, 즉 우리가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를 잘 이해하고 따라가고 있는지에 대해서였다. 한 번 연구 대상을 정해서 조사를 하다보면 재미있는 아이템과 아이디어가 계속 발견되기 때문에 자칫하면 배가 산으로 가기 일쑤다. 그럴 때면 ‘잠깐, 이 수업 과제에서 교수가 우리한테 하라고 한 것이 뭐였지?’ 라고 프로젝트의 기획의도를 다시 되집어보곤 했다. Syllabus를 다시 읽어보거나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서 과제에서 우리가 제출해야 하는 결과물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다시 점검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면 <즐거운 먼 산>으로 가던 프로젝트를 원래 목표에 가깝게 좁힐 수 있었다. ‘미칠듯이 매우 신선하지만 의도에는 부합하지 않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약간 신선하면서도 의도에 부합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프로젝트 매니지먼트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원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에 어쨌거나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에 매력을 느꼈다. <기획의도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질적인 아이디어를 조합해서 신선한 (2000년대 후반 당시에는 크리에이티브한, 모멘텀 있는, 엣지 있는 등의 표현을 즐겨썼다) 제안을 하는 것> 말이다.


패기 넘치는 대학생활을 지나 스물 여섯 살에 지금의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회사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하다보니, 나의 관심사는 조금씩 신선한 아이디어보다는 기획의도에 부합하게 우리가 가고 있는지로 옮겨 갔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원유를 정제해서 휘발유나 경유 제품을 생산하는 에너지 사업을 했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제품을 만들거나, 시장을 리드하는 성격의 비즈니스가 아니었다.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디자인이나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UX를 개발하는 프로젝트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략기획 부서에서 근무를 하며 중기 전략을 수립하거나,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만들거나, 시장점유율 제고 방안을 기획하거나, 아니면 심지어 구성원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복전략을 수립하며 “참신한 아이디어 없어?” 라는 질문보다는 “이거 원래 우리가 의도했던 것 맞나?” 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가 많았다.


전략기획 부서에서 다양한 부서의 사람들과 협업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한 두 마디씩 자신의 의견을 보태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조금씩 원래 목표했던 바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사람들이 제시하는 의견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타당하기 때문에 무조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그들의 의견을 다 반영하다보면 프로젝트 보고서 논점이 계속 흐려지게 된다. 나는 한때 “말은 좋은 말인데… 이 프로젝트에서 필요한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질 수록 원래의 기획의도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나는 20대, 30대를 거치며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이 ‘번뜩이는 아이디어’ 못지 않게 ‘원래의 기획의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원래의 기획의도를 지키는 것은 어렵고, 기획의도가 무엇인지 떠올리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MBA 2학년 첫 Module에서 <Project Management> 수업은 15년 간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경험해 온 내게 기획의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되새기는 수업이기도 했다.


중국과 미국에서 수학한 위첸 쉬 교수가 가르치는 <Project Management> 수업은 프로젝트라는 것이 무엇인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관리자로서 유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시간과 진척도 관리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등을 가르친다. MBA를 졸업하고 다시 필드에 나가게 되면 산업을 불문하고 프로젝트를 직접 이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프로젝트 관리에 대해 미리 고민을 해두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위첸 교수의 강의와 함께 이 수업에서 가장 기억나는 건 6명이 한 조가 되어 진행한 그룹 프로젝트였다. 그룹 프로젝트 주제는 <Lead Your Own Project Case Study>였는데 조마다 흥미로운 사업 기회를 제시하고 이 기회를 실제 사업으로 런칭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니까 이건 끝내주는 사업기회를 발굴하는 Business Development와는 성격이 다른 프로젝트였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사업 아이디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사업 런칭을 위해 필요한 단계들은 무엇이고, 각 단계에 어떤 인력을 얼마나 투입할 것이고, 만약 우리가 생각한대로 사업이 잘 성공하지 못한다면 백업 플랜은 무엇인지 등 프로젝트의 기획부터 엔드 이미지까지 전체 과정을 우리 스스로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교수는 “The idea doesn't have to be a groundbreaking innovation” 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디어가 얼마나 신선한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제로 구현시키는지 과정의 단단함을 보겠다는 의미다. 교수가 생각한 이 그룹 프로젝트의 기획의도는 Business Idea Development가 아니라 Project Management 였던 것이다.


우리 팀은 온라인으로 어떤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모을지 꽤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세 네 개의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는데 나도 예전 방영되었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서 영감을 얻어 <MBA 학생들에게 양질의 경영학 도서를 많이 읽게하는 독서 권장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불행하게도 나를 제외한 팀원 중 아무도 이 아이디어가 좋다고 응답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무 주제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과제의 기획의도는 아이디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어떻게 현실로 전개시킬 것인지에 달려있으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토의 끝에 우리 팀은 <The Tar Heel Move-Out Platform: 학기 초 학생들에게 필요한 가구와 물건을 서로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 개설>을 주제로 선정했고, 이어 어떻게하면 이런 플랫폼을 실제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 Project Scope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Business Model을 구체화하는 단계부터 우리 프로젝트 진척도는 꽤 더뎌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서로 필요한 가구와 물건을 서로 거래한다는 플랫폼을 만든다는 간단한 사업 모델을 구체화하는 방식은 팀원마다 조금씩 달랐고 쉽게 합의를 보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기숙사에서 방을 빼는 학생들이 그들이 쓰던 가구와 물건을 알려주면 우리가 트럭을 갖고 가서 직접 수거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보유한 스토리지에 학생들이 직접 물건과 가구를 갖다주면 우리는 보관하다가 판매만 담당하는 것인지, 트럭과 화물차량은 우리가 직접 소유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 기간만 렌트하고 반납하는 것인지 등 사업모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분명 필요한 논의였다. 비즈니스 모델이 어느 정도 정해져야 그걸 실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 마일스톤을 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과제에서 비즈니스 모델은 어느 정도 소개할 수 있을 정도만 구현되면 충분했고 A부터 Z까지 완벽하게 사업 모델을 다 구체화하는 것은 어려웠다. 사실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본질적으로 불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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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떤 학생은 이 비즈니스 모델의 수익/비용편익을 숫자로 계산하는데 푹 빠져있었다. 분명 교수는 프로젝트 과제 발표에서 어느 정도 수익/비용편익을 분석해서 제시하라고 했지만 그건 사업 타당성이 있는지 여부만 검토하라는 의미였고, 정확한 숫자 계산을 요구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 팀을 포함해 거의 모든 팀은 정량적으로 각자의 비즈니스 모델이 얼마나 사업 타당성이 있는지를 분석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분석 결과 재무 건전성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도 제안하곤 했다. 우리 팀도 마찬가지였다. 향후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생들로부터 가구나 물건을 매입한다음 새로운 학생에게 이를 되팔 때 가격을 좀 더 높여야 한다는 제안을 남겼다. 이 과제의 기획의도는 수익성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하라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처음에는 나도 “이건 Project Management 수업이지, Business Idea Contest 수업이 아니야” 라고 몇 번 이야기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될대로 되라… 는 마음으로 내가 맡은 부분만 수업의 기획의도에 맞게 작성해서 발표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 수업을 듣던 2024년 가을은 유난히 발표 과제가 많았던 터라 다섯 개의 그룹 프로젝트 발표가 한 주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이 수업의 그룹 프로젝트에만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고 성적을 받아보니 평균 정도의 점수를 받았으니 그룹 프로젝트가 꼭 실패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게 아닌데… 라면서 기획의도를 떠올리지 않을 때 프로젝트가 얼마나 더뎌지고 무뎌질 수 있는지를 다시 배울 수 있던 좋은 경험이었다.


어떤 일을 할 때 기획의도를 떠올린다는 건 두 가지 시선으로 일을 들여다보는 것을 뜻했다. 첫 번째 시선은 현재 서있는 자리에서 내가 원래 목표했던 도착지가 어디인지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오늘에서 내일로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출발하며 꿈꿨던 그 목적지에 지금 가깝게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주 강한 바람을 타고 신나게 항해를 했지만 정작 목적지에서는 멀어져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에서 내일을 보기 위해서는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높이 올라가야 전체를 한 눈에 내다보고 현재의 위치와 저 멀리 보이는 목적지를 잘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획의도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지평선에서 떠올라 높은 곳에서 전체를 조망하는 <메타-시선>이 필요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 중간에 나타나는 미션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몇 계단 높이 올라가서 프로젝트 전체를 입체적이고 거시적인 메타-시선으로 조망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 메타-시선이야말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관리자의 시선이기도 하다.


메타-시선을 생각할 때 나는 엉뚱하지만 방송 <무한도전>의 몇몇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된다.


만약 누군가 “나는 OOO 키드다” 라는 질문을 내게 던진다면, 나이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은 꽤 달라질 것이다. 10대 때 나는 라디오 키드, 일본 애니메이션 키드였고 30대를 지나면서부터는 인문학 책을 읽는 것이 거의 유일한 취미가 되었던 터라 인문학 키드라고 쑥스럽게 이야기할 것 같다. 20대라면? 20대의 나라면 나를 정의하는 OOO 중에 방송 <무한도전>도 아마 꼭 들어갈거다. 2005년 <무모한 도전>으로 시작해 2018년까지 무려 햇수로 14년에 걸쳐 방영한 이 프로그램은, TV 예능을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 나로서도 매 주 빠지지 않고 챙겨보는 유일한 프로그램이었다.


나처럼 1980년대 후반 혹은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나 2000년대 중반에 대학생이 된 비슷한 또래들 모두 <무한도전>에 대해 할 말은 각자 많을 것이고 각자 생각하는 베스트 에피소드도 다를 것인데, 내가 <무한도전>에서 특히 재밌게 봤던 에피소드는 이른바 자기 객관적으로 방송을 돌아보는 메타-에피소드였다. 그러니까 <댄스 스포츠>, <강변북로 가요제>, <죄와 길>, <못친소 페스티벌> 처럼 정말 큰 웃음이 ‘빵빵’ 터지는 에피소드도 나름대로 재미있지만, 그것보다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되돌아보는 메타-에피소드가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혹은 이 프로그램이 속한 예능이라는 장르를 거시적인 외부의 시선으로 점검하는 에피소드를 볼 때면, 이 프로그램이 단순히 시청자에게 재미만을 선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제작진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방송환경 속에서 제작진이 만드는 프로그램이 어떤 목표를 갖고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재는 어떤 수준이며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고민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여섯 명의 출연진보다,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의 관점을 엿보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무한도전>의 메타-에피소드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2014년 봄에 방영된 <선택 201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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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의 14년 간 전국 시청율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을 거쳐 2006년부터 프로그램 이름을 <무한도전>으로 바꾼 이후 급격한 인기를 얻으며 3년차인 2008년 상반기에 전국 시청율이 거의 30%에 달하며 프로그램의 인기는 정점에 이른다. 이후에도 <무한도전>은 2008년에서 2011년까지 꾸준히 15%-20% 사이의 높은 시청율을 기록하였지만, 이후 시청율은 10-15%로 조금씩 낮아지는 모습을 보였고 당시 언론에서는 예전만 못한 <무한도전>의 시청율 위기를 언급하곤 했다. 아무래도 프로그램이 제작된지 수 년이 지났기 때문에 제작진도, 출연진도 아이디어와 체력이 급격히 고갈되었을 것이다.


제작진도 이러한 점을 인지하였는지 2014년 봄 <선택 2014> 에피소드를 제작하면서 앞으로 새롭게 이 방송을 이끌어가는 리더를 선거로 선출한다는 취지로 하하, 정형돈, 유재석, 노홍철, 박명수, 정준하 (선거후보 순) 가 직접 후보가 되어 리더를 투표로 선출하는 과정을 방영하였다. 이 에피소드의 취지는 물론 투표와 선거라는 포맷을 방송에 접목시키는 것도 있지만 김태호PD가 어떤 강연에서 언급한것처럼 “시청자들이 원하는 예능 트렌드를 알아보기 위해 기획”한 의도가 있었다. <무한도전>이 런칭한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고 예능 방송 트렌드는 계속 바뀌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시청률이 낮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무한도전의 정체성을 다시 이해해보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보자고 제작진은 생각했다.


여섯 명의 후보는 본인이 리더로 선출된다면 지킬 신선한 공약을 내세운다. 노홍철 후보보는 리얼이 대세라는 말과 함께 무한도전 멤버들의 가족 일상을 담는 에피소드를 만들겠다고 하고, 유재석 후보는 광화문이나 남산에 곤장을 설치해두고 멤버들이 웃기지 못하면 직접 이 곤장을 맞는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출연진들이 제시하는 이런저런 신선한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멤버들은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 그러니까 <무한도전>이 어떤 기획의도를 갖고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꽤 진지하게 의견을 나눈다. 누군가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도전>에 있다고 말하고, 어떤 멤버는 시청자들에게 <큰웃음 빅재미>를 빵빵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멤버는 <무한도전>의 원래 취지는 시청자가 크게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방송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 에피소드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나치게 프로그램이 무거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리더를 투표로 선출한다는 <선택 2014> 에피소드의 기획의도에도 충실함과 동시에 좀 더 메타-시선에서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 기획의도, 방송목표, 지향점 등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셈이다. 서로 사용하는 용어는 다르지만 말이다.


애초에 이 프로그램은 ‘2%부족한 평균이하인 사람들의 프로그램’ 정도의 가벼운 기획 의도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출연진과 제작진이 “우리가 지금 원래의 기획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있어!” 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 주 한 주 시청자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보여주며 <큰재미 빅웃음>을 선보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란 과연 무엇이며 제작환경이 변화했다면 이제부터 지향해야 할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무한도전>을 다른 방송 프로그램과 다르게 만든 핵심이었다. 기획 의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방송은 매 에피소드의 신선하고 자극적인 아이디어에만 목을 매게 되고 결과로서 제시되는 시청률에만 집착하게 된다. 방송에 있어 시청률은 결과이며 의도와 목적이 아니다. 시청률을 올리는 것이 기획의도라고 생각한다면 개그콘서트 <시청률의 제왕> 코너처럼 꽤 웃픈 상황이 연출될 수 밖에 없을거다. 자신의 정체성, 처음 의도했던 목표에 대해 떠올리지 않는 존재는 목표와 결과를 혼동하게 된다. 그것이 방송이든, 비즈니스든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All's Well That Ends Well>처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도 분명 존재한다. 몇 시간이 걸려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수하면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어떤 프로젝트는 힘겹게 완수한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분명 나도 그룹 프로젝트 과제를 동시에 여러 개를 해야 할때는 ‘훌륭한 프로젝트는 끝난 프로젝트다.’ 라고 말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곤 했다. 그러나 신념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기획의도에 맞게 프로젝트를 완수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는 회사나 단체에 소속되어 직장생활을 하며 나도 모르게 완벽을 추구할 때가 있다. 이것도 알아봐야지, 저것도 분석해야지, 이런저런것이 빠져 있으니 그것도 추가해야지… 그렇게 우리가 보수공사를 할때 집은 아름다워지겠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가 원래 의도했던 집이었을까? 나는 모두에게 아름다운 집보다는 내가 원래 생각했던 집에 살고 싶었던 것이다.


프로젝트가 뜻했던 방향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지, 방송이 원래 의도했던 목적대로 잘 제작되고 있는지, 전체 인생까진 아니고 짧은 기간이라도 우리의 삶이 목표했던 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현실에 몰두했던 시선을 잠시 거두고 메타-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공백과 여유가 없는 삶과 비즈니스는 꽤 위험하다. 아니 어쩌면 위험하다고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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