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Communicate with Data. 생각의 建築

인문학으로 MBA하다 (18)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18)
Thinking and Communicating with Data. 생각의 建築
2024 Fall - Mod 1
#커뮤니케이션, #예술, #보고서, #생각의건축, #하임수틴



오퍼레이션을 가르치는 애덤 교수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패트리샤 교수가 공동으로 개설한 <Thinking and Communicating with Data> 수업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나는 이 수업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것을 알았다.


애덤 교수는 MBA에서 만난 여러 교수 중 가장 좋아하는 교수 중 한 명이었다. 사실 시작은 그저 그랬다. 우리는 8월부터의 정규 MBA 과정이 시작되기 이전에 미리 온라인으로 재무, 회계, 통계 세 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학부에서 경영학을 배운 학생도 있고 다 년 간 직장생활을 하며 비즈니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도가 높은 학생이 많았지만 경영학 자체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도 분명 있었기 때문에 정규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 주요 경영학 개념에 대해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는 학교 측의 의도가 있었다. 넉넉하게 넉 달 정도 사전과제를 할 시간이 주어졌는데 모두가 그렇듯이 세 달 반 정도는 아무 생각없이 놀다가 (심지어 사전 과제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마지막 2주 동안 부랴부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약간의 시험도 봐야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지 꽤 오래되었지만 재무와 회계는 온라인 수업을 들으니 어느 정도 기억이 되살아나 어렵지 않게 과제를 마무리했지만 문제는 통계였다. T검정, P값, 회귀분석과 같은 통계 용어들이 너무 낯설었고 또 학부 때부터 상대적으로 경영통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도 한 몫했다. 그때 온라인으로 통계를 가르치던 이가 애덤 교수였다. 그는 어려운 개념을 명료하고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비록 통계라는 과목은 크게 재미있진 않았지만 통계를 가르치던 애덤 교수를 인상깊게 기억하게 된다. 저 교수님이 직접 가르치는 과목이 있으면 한 번 들어보고 싶다며 말이다.


그래서 나는 MBA 1학년 때 애덤 교수가 개설한 <DADM: Data Analytics & Decision Making> 수업을 듣게된다. (생각해보면, 저 교수님 수업을 한 번 더 듣고싶다고 생각해서 수업을 듣게 된 첫 번째 경우였다) 그로부터 나는 완전히 이 교수님의 팬이 되었다. 정확한 영어 발음, 수시로 나오는 유머, 데이터 분석과 오퍼레이션 분야에 해박한 지식, 강의에 대한 열정 등은 내가 여기에서 만났던 교수 중에서 가장 압권이었다.


애덤 교수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DADM> 수업은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지 방법론에 대해 배운 뒤 어떻게하면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다루었는데, 첫 번째 Module에서 배운 경영통계 심화 수업에 가까웠다. 통계학 특성 상 자칫 어렵거나 지루할 수 있는 수업은 늘 재미있었는데, 애덤 교수는 학생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며 수업을 이끌었다. 아무래도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20대 후반, 30대 초반 남자들이 많기 때문에 NBA나 NFL과 같이 스포츠 경기와 관련한 데이터를 예로 들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왜 어느 날 캐나다 전역의 물 사용량은 특정 몇 분에 몰려있는가? 왜냐하면 그날은 캐나다와 미국의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20분 경기 뒤 몇 분 간 휴식 시간이 있는데, 집에서 TV로 경기를 보던 시청자들이 얼른 화장실로 가서 볼 일을 봤기 때문이다. 화장실 사용량이 늘어나 물 소비량이 특정 몇 분에 급격히 증가하는 패턴을 보였다. 데이터 이면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스토리가 숨어있고 이런 스토리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좋아하지 않을 학생은 없었다.


그런 애덤 교수가 2학년 학생들을 위해 새로운 강의를 개설했다고 하니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수업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무작정 수강 신청부터 했다. 사실 애덤 교수가 <DADM> 수업에서도 몇 번 이야기한 것인데, 데이터 분석도 물론 중요하지만 분석 이후에 그 결과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것인가도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아무래도 몇 번이고 모델을 돌리며 데이터를 분석하다보면 누구라도 그 데이터에 대해 빠삭해질 수 밖에 없는데, 문제는 나만 이 분석 결과에 빠삭할 뿐 일반 청중은 금시초문이라는 점이다. 데이터를 분석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도 나만큼 이 데이터에 대해 잘 알것이라고 가정하고 최대한 상세하고 자세하게 분석 결과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두의 눈높이가 발표자와 같지 않기 때문에 종종 보고나 발표는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해프닝은 회사나 여러 단체에서 늘상 반복되는 일이다. 나는 100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100을 다 전달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사실 청중이 100을 다 원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 발표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애덤 교수는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패트리샤 교수와 공동으로, 데이터 분석하는 법과 분석결과를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법을 동시에 가르치는 수업을 개설하기로 했다. 일종의 융합 과목인 셈이다. 애덤 교수와 함께 수업을 패트리샤 교수는 학부 때 Nursing을 배운 뒤 커뮤니케이션으로 전공을 옮긴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녀가 생각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말을 잘하거나 발표 슬라이드를 외형적으로 잘 디자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패트리샤 교수는 우리 뇌의 ‘인지 과정’을 잘 이해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단기 기억 능력과 장기 기억 능력, 순간적인 판단 능력과 다소 길지만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고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끊임없이 정보가 오고가는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특정 인지 능력에 더 초점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슬라이드에 표현된 선의 길이는 얇은지 두꺼운지, 원의 크기는 큰지 작은지, 파이 차트와 바 파트 중에 어떤 차트를 사용할 것인지 등에 따라 사람들이 정보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향이 달라질 수 있고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여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80분 동안 애덤 교수와 패트리샤 교수가 시간을 나눠 각자의 분야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수업은 이루어졌는데, 데이터 분석보다는 그것을 잘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패트리샤 교수는 단순히 슬라이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디자인 규칙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능력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수는 내가 자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가 상대방이 어떻게 정보를 인지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발표 슬라이드에 정사각형 박스 도형 7개가 수평으로 나열되어 있다고 해보자. 만약 이 7개의 박스 도형을 왼쪽부터 오른쪽 순서로 옅은 파란색에서 진한 파란색으로 Color Intensity를 높인다면 청중은 이 박스의 관계를 순차적인 것(Sequential)로 받아들인다. 뭔지 모르겠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좀 더 중요한 정보가 담기거나 아니면 인과관계에 따라 점차적으로 정보가 연결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반면 7개의 도형 모두를 연회색으로 표현한 뒤 어느 하나의 도형만을 진한 파란색으로 표현하면 이는 강조(Highlight)의 의미로 이해된다. 색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도형이 구성된 원리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한다. 색뿐만 아니라 사용된 차트의 종류, 도형의 크기와 위치, 글씨의 크기와 서체의 무궁무진한 조합에 따라 우리가 발표 슬라이드를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바는 다채롭게 바뀔 수 있다.


그러니까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 해석 결과를 전달하려는 발표자는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이 의도와 목적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슬라이드를 디자인해야 한다. 누군가 “혹시 이런 건 검토해보셨나요?” 라고 물어봤을 때 “아, 슬라이드에 이미 다 관련 정보가 있잖아요.” 라고 답할 수 없는 것이다. 상대방은 정보를 처음 마주하기 때문에 정보를 느리고 수동적으로 인지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최대한 쉽고 직관적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자료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 화자의 몫이다. 패트리샤 교수는 끔찍하게 복잡하거나 온갖 색으로 도배된 슬라이드나 인포그래픽 예시를 보여주며 어디가 잘못 표현된 것인지 학생들이 찾아내는 것을 반복했다. 그녀는 이 잘못 표현된 점을 “다람쥐(squirrel)”라고 불렀는데 최대한 다람쥐를 많이 잡아내는 훈련을 수업 내내 하곤 했다. 그 다람쥐들은 인간의 인지 과정을 방해하며 돌아다니는 귀여운 악당들이었다.


나는 이 수업을 듣는 두 달 내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을 느꼈다. 그건 지난 15년 동안 내가 회사에서 했던 일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 과정과 연결되어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해왔던 것임을 인정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리 집 서재 한편에는 내가 2012년 받은 크리스탈 명패가 하나 놓여있다. 대단한 상은 아니다. 드라마 <Office>에서 지점장인 마이클 스콧 (스티브 카렐 배우)은 연말에 직원들에게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에게 <던디 어워드(Dundie Award)>라는 상을 준다. 이 드라마는 던더 미플린이라는 제지회사를 배경으로 하는데 던디 어워드는 회사 이름을 딴 일종의 연말 공로상이다. 2012년 내가 소속된 부서에서는 모든 직원들에게 한 해 수고했다며 직육면체 모양의 크리스탈 명패를 선물했는데, 내가 받은 상은 <피카소 Award>였다. 각 Award에는 그 사람이 이 상을 받는 이유가 간략히 적혀 있는데 나는 “전통양식을 거부하며 예술적인 감각으로 SK PPT 보고서의 새로운 화풍을 개척함” 이라고 적혀있었다.


AD_4nXd-cXcFLN4myeCW2Ixy2WpekbLsGJpGXP4dwNyurjkJ0xQISLrUFAt6P9u9XwM_l0C-wfJ2PHidH_ZEnmDMzojvnSKtWppa7tVT3pucXyc_Ha-tvDvjLpDtIN9Oh2CEEhNb7uluRA?key=HleT9V4Qf1i5dl--mQPeNTtw


돌이켜보면 나는 신입사원 때부터 15년 간 끊임없이 보고서를 만들고 있었다. 모든 회사가 보고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맞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유난히 보고서 작성과 보고서에 기반한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나는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즐겁다고 느낄 때가 더 많았다.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며 이런저런 공모전에 나갔는데 비록 상을 받은 건 몇 개 없지만 그때마다 다양한 스타일의 보고서, 기획서, 제안서를 만드는 훈련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에 가장 열심히 참여했던 공모전은 광고회사에서 주최하는 광고 아이디어 기획 공모전이었다. 제일기획, HSAD, 대홍기획, 이노션 등 국내 굴지의 광고회사 공모전은 빠짐없이 다 참여해봤다. 공모전을 많이 하며 얻어지는 좋은 점이 분명 있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광고 기획 제안서를 만들면서 슬라이드마다 메시지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배치할 것인지, 어떤 디자인으로 표현해야 심사위원이 인상적으로 볼것인지 등을 고민하는 힘을 체화할 수 있었던 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 파워포인트라는 제작 도구에 무척 익숙해지는 점은 덤이다.


반면 광고 공모전에 푹 빠지면 안 좋은 점도 있다. 15초 안에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광고처럼 광고 아이디어 공모전도 심사위원의 시선을 끊임없이 사로잡아야 하기 때문에, 맥킨지나 BCG 같은 일반적인 컨설팅 보고서보다는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감을 사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습관을 버리지 못한 채 직장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2010년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몇 달 전까지 광고 공모전에 빠져있던 색채가 다 빠지지 않았던 무렵이라, 나는 회사에 들어와서 보고서를 만들 때 나도 무의식적으로 기존에 회사가 사용하던 일반적인 보고서 양식과는 살짝 다른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업 문화에 맞게 꽤 정제된)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같은 팀 선배들은 내가 만드는 보고서 디자인을 신선하다고 생각했고 꽤 빨리 보고서를 만든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부서 내 보고서를 도맡아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부서에서 3년 정도 있으니 함께 일했던 선배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새로운 동료들이 내가 일하던 부서로 전입해왔는데 이 부서에 오래 있었다는 이유로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있어 나의 입지와 입김(?)은 점점 강해졌다. 당시에 내가 만들던 보고서는 무채색과 진한 청색만 가끔 사용하던 기존의 보고서 양식과는 정반대로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이 곳곳에 가득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광고 공모전에서 입상하지 못한 한을 이 회사에서 푼다는 마음으로 독하게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10년 전 그때 만든 보고서를 지금보면 헛웃음이 나오고 만약 내 후배가 이런 식으로 보고서를 만들어온다면 지금의 나라면 분명히 한 소리 할 것 같지만… 운이 좋게도 내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보고서를 만드는 것을 선배들은 용인해주었다. 부서를 이끌던 임원이 적극적으로 환영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해 말 피카소 Award를 받으며 전통양식을 거부하고 보고서의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았던 것이다.


연차가 쌓이면서 나는 점점 대학생 시절의 색채가 빠지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보고서 스타일에 익숙해졌는데 워낙 신입사원 때부터 보고서를 자주 다루다보니 보고서를 빨리 잘 만든다는 평판이 쌓이기 시작했다. 부서에서 보고서를 도맡아 만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여러 용어가 있었는데 메인으로 보고서를 만든다고 해서 주필(主筆), 보고서팩을 만든다고 해서 팩사(팩士)라고 불리기도 했고, 때로는 일본어식 표현이지만 마도를 잡는다는 식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다른 팀으로 이동해서도 보고서를 만드는 일은 대개 내 몫이었다. 갑자기 자료를 정리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상사는 주로 나를 찾았고 심지어 내가 소속된 부서가 아니라 옆 부서에서도 중요한 보고가 있는데 나를 잠시 차출해도 되겠냐는 질문을 우리 쪽에 하기도 했다. 보고서 만드는 것이 즐겁기도 하며 또 입사 후 5-6년 정도라 한창 일할 때이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마치 보고서 제작업체처럼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끊임없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 시간에 대해 후회는 없다. 자부심도 있다.


그런데 가끔 나도 견딜 수 없는 지시가 있긴 했다. 그건 이미 어느 정도 만들어진 보고서를 나한테 던져주면서 “예쁘게 다듬어봐.”, “내용은 다 된거니까 그냥 예쁘게만 정리해.” 라는 지시를 받을 때였다. 뭐, 어린 연차의 내가 봐도 그들이 만든 보고서는 끔찍할 때가 많았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레이아웃과 디자인이 일관성이 없다거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하나의 슬라이드에 빼곡하게 데이터를 넣는다거나, 혹은 데이터만 넣고 아무런 부연 설명이 없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슬라이드도 있었다. 나는 빼곡한 슬라이드는 간결하게 정리하거나 몇 장의 슬라이드로 분할하고, 레이아웃을 조정하고, 통일된 디자인을 적용하며 최대한 빨리 슬라이드를 정리해서 다시 넘겨주었다. 그들 말대로 이 보고서는 내용은 다 된거고 그냥 예쁘게만 정리하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말하는 “예쁜” 이라는 단어를 곱씹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보고서를 만들때 이 보고서가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목적으로 만드는 것인지, 그 목적에 맞게 각 슬라이드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는지, 그 메시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식으로 레이아웃과 디자인이 잘 구성되어 있는지를 계속 고민한다. 나는 보고서를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한 상대방을 먼저 떠올렸고 그들과 공유할 스토리라인을 떠올린 것이고, 디자인과 레이아웃처럼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요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에게 “예쁘게 다듬어봐”라고 말하는 저들은 나의 그러한 고민 중에 가장 부차적인 디자인만을 염두에 두는 셈이었다. 물론 남이 만든 보고서를 예쁘게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보고서의 본질은 ‘생각의 구조’였고, 어쩌면 디자인조차 구조의 일부분이었다. 나는 그들의 “예쁘게” 라는 단어에서 보고서의 본질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확인했고 때로는 무력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나는 생각의 <구조>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그들이 보는 나는 가장 말단의 <표현>에 치우쳐져 있다는 생각은 때로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내가 나의 언어로 보고서의 본질,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해 정의할 수 있었던 건 2017년이었다. 당시 내가 소속된 부서에서는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다른 구성원에게 자신만의 지식을 공유하는 세션을 순차적으로 열었는데 나에게는 ‘보고서를 잘 만드는 법’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보고서를 잘 만드는 법이란 따로 없소! 무조건 많이 고민하고 많이 만들어보는 방법 밖에 없소!’ 라고 속으로 외쳤지만 이내 하겠다고 수락했고 다만 강의제목을 <생각의 建築: 보고서에 대한 오래된 생각>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나는 마르크스처럼 보고서나 커뮤니케이션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분할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 디자인과 프리젠테이션 스킬이 표면적인 상부구조에 관한 것이라면, 하부구조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깊은 고민, 즉 생각이었다. 나는 하부구조가 없으면 상부구조가 성립되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을 잘 하려면 생각을 정말 잘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자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1) 쓰는 것, 2) 그럴듯하게 쓰는 것, 3) 그럴듯한걸 예쁘게 쓰는 것 이 세 가지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쓰는 것을 좋아했다. 2004년에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김훈의 <화장>을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고 나도 김훈처럼 이런 소설을 한 편 써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고 2006년에 최명희청년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응모도 해보고 여러 신문사 신춘문예에도 응모해보기도 했다. 물론 작게나마 입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심사평에서는 ‘올 해 투고한 작품들은 전체적인 서사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 특정 장면에 대한 묘사, 그럴듯한 문장과 단어를 만드는 것에만 몰두한 경향이 있어 아쉬웠다’ 라고 응모자들을 비평했는데 꼭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이왕 쓰는 김에 그럴듯하게 쓰는 것이 좋다고 느꼈다. 대학 졸업 말미에는 당시 유명해지기 시작한 TBWA 박웅현 씨를 따라 광고회사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광고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의 매력은, 제품의 속성 중 핵심을 캐치해서 이걸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말이 되게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제일기획, 이노션, HSAD 등 다양한 광고회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나가 내 생각을 몇 글자에 꾹꾹 압축해서 선보였지만 이 역시 입상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 거대한 스토리와 짧은 몇 줄의 광고 카피는 본질적으로 같고 결국 중요한 건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내러티브임을 배웠다. 또 이왕 그럴듯하게 쓰는 김에 그 결과물이 시각적으로 보기 좋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적록색약인 것이 작은 콤플렉스 중 하나였는데 적록색약을 검사하는 색각검사표에 적힌 숫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을 꾸준히 가졌던 것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아주 작은 안목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럴듯한 걸 예쁘게 쓰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보고서란
내 이야기를 들을 상대방이 누구인지 고려한 다음
글을 쓰기 위한 글감을 모으고

가장 설득력 있는 Message를 만들어서

그 Message를 읽히기 쉽게 만들고 꾸미는 전체 과정이다.
보고서는 Powerpoint가 아니라 생각의 건축이다.


이중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글감을 모으고 가장 설득력 있는 Message를 만드는 것, 즉 가장 바탕이 되는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보고서를 만들면서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끊임없이 나와 이야기하며 인과관계, 교집합,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 일관성으로 글감과 글감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모아진 글감의 전부는 Fact이지만 엮어진 일부의 글감은 Message라는 이야기도 했다.

강의 시간은 1시간이었지만 자료는 스무 페이지 남짓으로 짧은 편이었는데 강의가 끝났을 때 모두가 환호하는 …… 그런 일은 당연히 없었지만 나는 너무나 속이 후련했다. 나에게 보고서를 잘 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보고서를 예쁘게 다듬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보고서를 잘 쓴다는 것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도형과 색감을 어떻게 바꾸고 배치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내러티브를 얼마나 그럴듯하고 말이 되도록 만들어내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라고, 나는 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다 해버린 기분이었다. 연극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신나게 1인 모놀로그 연기를 선보인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강의자료 가장 마지막 장에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남기며 강의를 마쳤다.


보고서는 생각의 건축이다.

건축은 과정이다.

과정엔 시작과 끝이 있다.

시작은 무수한 생각으로 시작한다.

끝은 한 장의 종이로 남는다.

남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이 담긴 종이다.

그래서 보고서는 생각의 건축이자 건축물 그 자체다.


그때 <생각의 건축> 강의를 하며 발표했던 내용은 지금까지도 내 신념으로 남아있다.


보고서나 커뮤니케이션의 본질과 시작점은 ‘생각’이며 나의 생각을 상대방이 어떻게 인지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보고서에 대한 나의 신념과는 별도로, 각박한 회사 생활 속에서 보고서는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예쁘게 표현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늘 “시간이 없다! 이 보고서 빨리 예쁘게 정리해봐.” 라는 말을 종종 들었고 저 강의 이후로도 여러 번 다른 조직에 가서 비슷한 주제로 강의를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 회사 내에서 꽤 중요하다고 믿었고 보고서를 만들 때 즐거웠다. 보고서에 진심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내 생각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보고서에 진심인 사람이 회사 내에 많지 않았다는 것인가… MBA에 오기 전 회사에서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애덤 교수와 패트리샤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으면 “그렇지 않아, 보고서나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겉으로 보여지는 디자인과 발표 스킬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그 정보를 이해하는 상대방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거든.” 이라고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올바른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 회사 밖에는 훨씬 많았고 그것을 단순히 주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이나 뇌과학처럼 학술적인 측면에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이 놀랍도록 많이 쌓여 있다는 점도 신선했다. 그래 교수가 강조하는 저 포인트는 나도 보고서를 만들 때 계속 신경썼던 부분이야, 나도 딱히 이론을 배워서 그렇게 신경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인간의 인지 특성에 부합하는 것이었구나, 라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그 점이 MBA의 매력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길든 짧든 직장생활을 하다가 커리어와 삶에 변화를 만들고 싶어서 MBA를 선택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분야를 공부할 수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커리어를 전환하는 경우도 분명 생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지금까지 자신이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어 가졌던 나름의 신념이라는 것이 결코 무용하지 않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내가 경험했던 조직에서 잠시 벗어나보면 나의 신념에 동조하는 개인과 단체가 많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단순히 가설에 지나지 않고 학술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MBA는 새로운 내일을 설계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의 나를 재구조화하며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애덤 교수와 패트리샤 교수 수업을 들으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내가 지금까지 건축했던 생각이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더 쌓아갈 수 있다고 느낀 것이다. 중요한 건 지난 15년 동안 내가 보고서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생각했던 나만의 신념이랄까, 스타일을 꽤 흔들림없이 지켰다는 점이다.


나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고 그것을 지키는 삶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게 된다.


그 동안 회사에 있으면서 여러 CEO를 모시고 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어떤 CEO가 아직 중간 임원일 때 바로 그 밑 부서에서 그분과 함께 일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임원이었던 그분은 비록 깐깐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와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할만큼 참 대단했는데, 그분은 우리가 보고서를 설명하려고 집무실을 찾으면 매섭게 몰아붙이다가도 마지막에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때 OOO(그 임원 이름) 밑에서 일을 했다는 꼬리표를 달고 일을 할텐데 그 꼬리표에 어울리는 실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야.” 라고 우리를 다소 위로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임원이 지시하는대로 그의 스타일에 맞춰 보고서를 다듬고 자료를 정리하였는데 그건 정말 그 임원을 다른 임원과 차별적으로 기억하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회사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프랑스 파리를 찾았던 2014년 여름이 생각난다. 이십대 후반의 우리에게 파리는 대부분 명소를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도시였는데, 파리 도착 이튿날 나와 아내는 숙소에서 나와 Pont Neuf 다리를 건너 시내 남쪽을 둘러 보았다. 그 부근에는 몽파르나스 묘지가 있었다. 몽파르나스 묘지는 파리 3대 공동묘지 중 하나이며 샤르트르(Jean-Paul Sartre),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와 같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워낙 묘지 크기가 방대해 묘지 입구에서 나눠주는 지도 없이는 어디에 누구의 묘지가 있는지 알기란 불가능했다. 그 지도에도 모든 이들의 무덤이 표시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촉박한 시간과 거대한 미로 같은 공동묘지 속에서도 꼭 찾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하임 수틴 (Chaim Soutine, 1893-1943).


사실 수틴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없었다. 프랑스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리투아니아 출신이면서 모델리아니, 샤갈과 더불어 고향을 등지고 파리에 정착해 에꼴드파리의 한 사람으로 살다간 화가다. 에꼴드파리 화가들이 대개 그렇듯 늘 빈곤하고 가난하게 평생을 살다가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비슷한 연배지만 1985년까지 살았던 마르크 샤갈에 비해 꽤 단명한 셈이다. 예전에 국내 한 미술관에서 에콜드파리의 작품을 모아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몽환적인 샤갈, 눈이 그려지지 않은 모델리아니의 작품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거친 터치에 격정적으로 일그러진 그의 작품이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임 수틴의 묘가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다는 걸 알게된 순간 나는 이유없이 그의 묘를 꼭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묘지에 도착해 아내와 갈라져 각자 지도를 손에 든 채 서로 찾고 싶은 묘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이윽고 수틴의 묘비를 발견했는데 며칠 전 찾았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 sur Oise)의 고흐 형제의 묘비보다도 훨씬 작았고 주변에 흡사 석굴처럼 조성된 묘지에 숨어 있어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AD_4nXdW5aYnjlGVKI_n47ymMVHJlWz3BcEjrLZVRlFYsEZmh3ROKGNZoMCqbiojuwn2Z9vIhG90xnXdyZTxx--Rp_2mKEcEZjH70DU_2rjNoMc2vkXvimlHpqdARY54qtWepD4O7wMoDA?key=HleT9V4Qf1i5dl--mQPeNTtw


묘지를 보니 누군가가 수틴의 묘비 앞에 붓 하나를 올려 놓고 갔다. 별다를 것도 없는 묘비석에 파란색의 작고 기다란 붓이 놓여져 있었다. 묘비는 시간의 질감으로 거칠어져 있는 데 붓만큼은 선명한 파란색으로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초월성이 생경했다. 수틴은 20세기 초 파리에 활동하던 수 많은 예술인들 중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비슷한 시기의 작가인 샤갈이나 모딜리아니에 비해서도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유명세를 얻고있진 않다. 일생을 가난으로 고생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대부분 어둡고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데, 그의 예술 세계를 고흐와 같은 무서울 정도의 정념이니, 마티스처럼 색을 향한 열정이니 하는 수식어로 화려하게 포장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는 다른 수많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단 한 줄도 소개되지 않는, 그런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수틴은 궁핍과 가난을 오히려 그가 세계를 예술로 옮겨담는 그의 시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수틴은 현실을 비극적으로 이해했고 그것을 그림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죽음, 동물의 사체, 기괴한 인간의 신체 등을 소재로 어둡고 짙은 색채로 매우 격정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수틴는 큐비즘과 포비즘이 대세를 이루던 20세기 초 예술사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현실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지켜나간다. 죽음에 대한 인식, 거친 터치, 왜곡된 표현은 수틴이 끝까지 유지했던 자신만의 스타일이었다.


<서양미술사>에 소개되지 않지만, 자신만의 격정적인 화풍을 지킨 수틴은 결국 기억되는데 성공했다. 그는 다른 위대한 예술가와 어깨를 나란히하며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혔고, 누군가는 샤갈과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서 그의 그림에 시선을 멈출 수 없어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날아와 그의 묘지를 직접 찾아가며, 누군가는 붓 한자루로 수틴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한다. 시발점과 계기는 달랐으나 수틴이라는 이름을 누군가는 기억하는 셈이다. 어떻게든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는 법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불운하게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더라도 나의 스타일, 나의 신념, 나의 가치관에서 손을 놓지 않을 때 누군가는 언젠가는 치열한 나의 분투를 기억해 줄 거라는 말이었다.


수틴이 당시 유행한 큐비즘과 포비즘을 따라 자신만의 거친 스타일을 버리고 예술 사조를 바꿨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아니, 기억되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회사에서 보고서를 만들며 분투했던 15년을 조금은 긍정적으로 돌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스타일과 나만의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어야 했다. 생각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 예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했다. <Thinking and Communicating with Data> 수업을 듣다가 많은 것들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사회인으로서의 내가 쌓아올린 이런저런 생각들을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Project Management. 기획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