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Strategic Econ. 하지만 하나가 된다면

인문학으로 MBA하다 (19)

by 피터 화엉
인문학으로 MBA하다 (19)
Strategic Economics. 하지만 하나가 된다면
2024 Fall - Mod 3
#전략경제, #문학, #게임이론, #도자기, #여물위춘



‘도망쳐!’


MBA에서 모든 수업은 Module이 시작되기 훨씬 전 수강신청을 미리 하며 다음 Module에 들을 수업이 정해지지만, Module이 시작한 첫 주에는 원래의 커리큘럼을 바꿀 기회가 부여된다. 수강정정기간인 셈이다. 자신이 원래 들어보려고 했던 수업을 들어보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Drop을 하고 대신에 다른 학생들을 통해 괜찮다 싶은 수업이 있으면 그 수업을 대신 듣기도 한다. 나는 MBA에서 들었던 41개 수업을 원래 생각했던대로 듣는 편이었고 수강정정기간에 수업을 바꾼 경우는 없었는데 유일하게 한 과목을 포기하고 다른 과목으로 바꾼 적이 있었다. 2024년 가을이었다.


원래는 중간 관리자로서 갖추어야 할 리더십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 재미있을 것 같아 신청을 해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Module이 시작되고 첫 수업시간이 되어 강의실로 갔는데 느낌이 살짝 좋지 않았다. 강의실로 가보니 강의실 문에 “일반적인 강의실이 아닌 넓은 홀에서 첫 수업을 하겠다”는 교수님의 공지가 붙어 있었는데 홀로 가보니 테이블마다 다양한 교구가 올려져있고 오늘은 아주 즐겁게 학생들의 협동심과 리더십에 대해 토의할 수 있는 조 별 액티비티를 할 것이라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 학생들이 다 도착하지 않아서 나를 포함해 몇 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교수는 대단히 재미있는 수업이 될 것이라는 듯한 눈길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는데 리더십에 대해 다양한 이론을 차분하게 배우는 수업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시계를 보니 수업이 시작하는 오후 2시까지는 5분 정도 남았다. 수업을 바꾸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도망쳐!’를 외치고 가방을 챙겨 홀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건물을 빠져나오자 원래 같이 수업을 듣기로 했던 다른 학생을 만났다. 친구는 자신이 약간 늦었다며 내 팔을 잡고 다시 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길래 나는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나 이 수업 말고 다른 수업으로 들으려고.”

“엥, 왜?”

“왠지 나랑 안맞는 것 같아서… 혹시 추천해줄만한 수업 있어?”

“그럼 Strategic Economics 수업 한 번 들어봐! 내가 지난 Module에 들었는데 진짜 괜찮았어.”

“Strategic Economics? 경제학 수업이야?”

“응, 대부분 게임이론에 대해 다루는데 되게 재밌었어.”

“아 그래? 그럼 그 수업 들어야겠다. 이 수업 잘 들어! 나는 도저히 못 들을 것 같아.”


나는 친구와 대충 이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고 서둘러 Strategic Economics 수업이 열리는 강의실을 검색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실에 도착해보니 서른 명이 조금 안되는 학생들이 이미 수업을 듣고 있다. 조심스럽게 뒷자리에 앉았는데 살펴보니 학교에서 가장 친한 친구 다니엘도 이 수업을 듣는 것 같았다. 이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강의가 시작되었지만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원래 생각했던 리더십 수업을 너무 서둘러 포기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운 마음도 살짝 들었지만 말이다.


2017년 UNC-Chapel Hill에 부임한 윤지 후 교수가 가르치는 <Strategic Economics> 수업은 게임이론(Game Theory)을 다루는 수업이다. 게임이론은 1학년 때 배운 미시 경제학과도, 2학년 첫 Module 때 들었던 행동 경제학과도 조금 다르다.


주류 경제학이 경제적 주체로서의 한 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다룬다면, 그리고 행동 경제학이 무의식과 심리적인 요소가 어떻게 경제적 주체의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다룬다면, <Strategic Economics> 수업에서 다루는 게임이론은 한 경제적 주체의 의사결정과 다른 주체의 의사결정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다룬다. 한 사람의 의사결정은 자신이 의도한대로 결론에 도달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달려있는데, “No man is an island”라는 명제가 게임이론을 잘 설명한다. 누구도 외딴 섬에서 혼자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얽혀있는 다양한 플레이어들과 함께 전략적인 의사결정의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 수업에서는 Prisoner’s Dilemma, Nash Equilibrium, Dynamic Game, Bertrand and Cournot Competition, Repeated Games, Auctions, Adverse selection, Cheap Talk 등 다양한 게임이론의 유형을 배우고 실제 현실 속에서 게임이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다양한 사례를 연구한다. 예전에 배우 러셀 크로우가 천재 수학자 존 내시를 연기했던 영화 <뷰티풀 마인드(Beautiful Mind, 2001)>을 아주 재미있게 봤는데, 존 내시가 술집에서 균형이론의 모태가 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장면을 보며 게임이론이 어떤 것인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수업에서 우리가 배웠던 게임이론은 그 유형도 굉장히 많았고 물건 경매 참여, 차량 보험료 산정, 경쟁시장에서의 제품가격 책정, 모럴 해저드와 같이 굉장히 다양한 사례에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게임이론으로 해석하고 진단할 수도 있을것 같았다.


게임이론을 잘 몰라도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들어봤을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는 두 명의 죄수가 등장한다. 칼빈과 클레인이라고 해보자. 만약 이들이 둘 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5년 징역형을 살고, 둘 다 자신의 죄를 부인하면 1년 징역형을 산다고 해보자. 만약 한 죄수만 고백하고 다른 죄수는 범행을 부인한다면 죄를 고백한 죄수는 자유롭게 풀려나고, 범행을 부인한 죄수는 가중처벌되어 15년 징역형을 산다고 해보자. 예를 들어 칼빈은 마음이 약해 죄를 고백하지만 클레인은 끝까지 나는 죄가 없다고 한다면, 칼빈은 바로 집으로 가고 클레인은 15년 동안 감옥에 있어야 한다. 이때 칼빈과 클레인은 딜레마에 빠진다.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을 고백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실 둘 다에게 가장 좋은 것은 둘 다 죄를 고백하지 않고 가볍게 1년 징역형만 살다 풀려나는 것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둘 다 죄를 고백해서 5년 징역형을 사는 것으로 결론나게 된다. 왜냐하면 내 입장에서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는 합리적인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혹시 상대방은 끝까지 죄를 부인하고 나만 죄를 고백한다면 범행은 동시에 저질렀지만 나는 풀려나고 상대방은 15년 징역형을 살게 된다. 어느 경우에도 죄를 인정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래서 칼빈과 클레인 모두 죄를 부인하는 것보다는 인정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며 둘 다 죄를 고백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때 둘 다 죄를 고백하는 경우를 게임이론에서는 균형 지점이라고 표현하는데 균형 지점이 항상 플레이어들에게 가장 좋은 경우는 아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칼빈과 클레인에게 제일 좋은 경우는 둘 다 죄를 고백하지 않아서 1년 징역형만을 사는 것이지만, 최대한 합리적으로 고민을 하며 선택된 균형 지점은 둘 다 죄를 고백해서 5년 징역형을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로 대표되는 게임 이론이 주류 경제학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게임 이론은 주류 경제학처럼 각 경제적 주체는 이성적인 존재이며 최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런데 각 플레이어의 합리적인 판단의 합이 경제적 효용의 극대화를 가져온다고 여기는 주류 경제학과 달리, 게임이론은 각 플레이어의 합리적인 판단은 win-win이 아니라 lose-lose 경우를 가져온다고 여긴다. 이런 점이 게임이론의 매력적인 포인트다. 각자는 자신만을 생각하며 최대한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리지만 게임의 전체 구조에서는 내가 내린 결정은 나의 손해를 야기한다는 점 말이다. 플레이어들이 서로 협력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데,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결정이 무엇인지만 생각할 때 win-win에서 멀어진다.


두 달 가까이 정말 다양한 게임이론을 배우는 동안, 한편으로 나는 ‘게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PC 게임을 정말 좋아했던 편이었다. 486 컴퓨터를 처음 샀던 것이 아마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낮은 성능에 그보다 더 말도 안되는 높은가격 이었지만 PC가 집에 온 순간부터 나는 PC 게임의 노예가 되다시피했다. 우리가 집에 들인 PC는 5.25인치와 3.5인치 플로피디스크뿐만 아니라 4배속 시디롬이 달린 최신 모델이었는데 대부분의 게임이 플로피디스크에서 시디롬으로 바뀌던 시기라 용돈을 몇 달 모아 집 근처 세진컴퓨터랜드에 가서 게임을 사는 게 꿈이자 낙이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용돈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하나에 50,000원이 넘는 게임은 너무나 비쌌던 이유로 점점 나는 다른 경로로 게임을 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처럼 집에 PC를 장만한 친구로부터 게임을 빌려서 플레이하기도 했지만, 다들 나처럼 게임을 구하는 것이 쉽진 않았기 때문에 자기 돈으로 게임을 사서 가지고 있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교환할 수 있는 게임은 모두 다 교환했고 새로운 게임에 목말라했다. 그러다가 내가 살았던 7단지 아파트 옆 10단지 상가 2층에 게임을 아주 싸게 판매하는 아저씨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아저씨는 다양한 게임을 미리 준비한 다음 650MB 용량 시디 한 장에 최대한 많은 게임을 넣어서 그 시디를 단돈 10,000원에 판다고 했다. 50,000원을 줘도 게임 하나밖에 살 수 없는데 10,000원만 내면 시디 안에 게임 십 수 개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은 정말 혁신적이었다.


주말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상가 2층의 아저씨를 찾아갔던 날이 기억난다. 아저씨는 주위를 두리번 살피더니 게임 목록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 몇 장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종이에는 게임 이름과 게임 용량이 적혀있었다. 어떤 게임은 300MB, 어떤 게임은 20MB 이런 식이었는데, 요모조모 산수 계산을 잘 해서 내가 고른 전체 게임 용량의 합이 650MB이 넘지 않는 선에서 마음껏 게임을 선택할 수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아저씨 가게 소파에 파묻혀 하염없이 게임 목록을 보며 다른 한 손으로는 게임 용량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650MB에 가깝게 게임을 채워넣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최대한 낭비되는 용량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Optimization의 한 부분을 미리 공부했던 셈이다. 물론 상가 2층 아저씨의 일명 ‘게임방’은 게임 저작권을 무시하는 엄연히 불법이었지만, 돈은 없고 게임은 하고 싶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그 어떤 곳보다 즐거운 해방구였다. 1990년대의 한 단면이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물론 페이커 이상혁이 플레이하는 LoL(League of Legend)처럼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협동하며 상대방과 싸우는 게임도 있지만, 내가 했던 대부분의 PC 게임은 주인공인 내가 강해져서 다른 경쟁자를 압도하고 결국 그들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임은 다 내가 강해져 1등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드 소프트웨어에서 발매한 <둠2>와 같은 1인칭 슈팅 게임은 맵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몬스터를 물리치고 출구를 찾아 다른 맵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고, 코에이에서 발매한 <삼국지4>와 같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은 내가 정한 세력(나는 보통 207년의 유비로 플레이했다)이 경쟁 세력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모든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고, 블리자드에서 발매한 <디아블로2>나 넥슨에서 발매한 <바람의 나라>와 같은 액션 롤플레잉 게임도 결국 내가 레벨을 올려 강해지고 최종보스 디아블로와 그의 수하 악당들을 죽이고 좋은 무기와 갑옷을 계속 얻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강해지고, 상대는 약해진다. 아니 상대는 약해지다 못해 게임의 판 위에서 없어진다. 사라진다. 분명 처음에 나는 수많은 다른 존재들과 함께 게임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그들을 물리치고 나 혼자 살아남아 생존하는 것을 쫓았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거나 잠시 싸움을 멈추고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 끝에 가서 존재하는 것은 나 혼자였다. 결국에는 마지막에 홀로 남는 승자가 되는 것, 그것이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배운 게임의 법칙이다.


그런데 윤지 교수가 <Strategic Economics> 수업을 가르치며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플레이어1, ‘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한다면 상대방인 플레이어2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나의 선택과 상대방의 선택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질문이 수업 내내 가득했다. 게임이론은 나와 다른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해(解)의 조합을 검토하고 그중 가장 최적의 해가 무엇인지를 따진다. 최적의 해를 얻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플레이어가 모두 존재해야 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을 배려하는 나의 선한 마음이나 이타심 때문이 아니다. 나와 경쟁하는 다른 플레이어가 존재하고, 그들의 의사결정과 나의 의사결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없다고 가정하고 나에게만 가장 유리한 경우의 수가 무엇인지를 아무리 합리적으로 고민하여도 그것이 나에게 가장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칼빈과 클레인은 자신이 어떤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것인지에만 몰두하다가 결국 5년 징역형을 살았다. 1년만 감옥에 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게임이론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게임이론은 나만 독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존하는 최적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비즈니스 세계의 게임의 법칙은 어렸을 때 내가 했던 PC 게임과 MBA에서 배운 게임이론 중 어느것에 더 닮아있을까? 회사에서의 짧은 경험을 돌이켜보면 분명 우리도 회사의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면서 경쟁사 분석이라는 것을 했다. 경쟁사가 가진 설비는 우리 회사가 가진 설비에 비해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지, 경쟁사는 지금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며 전략을 수립하고 있고 그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시사점은 무엇인지를 종종 따진다. 그러나 경쟁사 분석은 언제나 그래서 내가 강해지려면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경쟁사의 전략에 호응하여, 또는 경쟁사와 함께 전체 시장이 함께 성장하는 측면에서 라는 관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회사라는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내가 그들보다 강해지고 그들을 이기는 것이 비즈니스에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이다. 우리는 종종 비즈니스 현장에서 다른 플레이어가 있다거나, 혹은 다른 플레이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우리는 내 물건을 사주는 소비자에 대해서만 골똘히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비즈니스에서 우리가 배운 게임이론처럼 다른 플레이어와 그들의 플레이를 생각할 때 더 높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대학생 때 읽었던 <도자기> 라는 만화책이 생각난다.


<도자기> 만화책은 호연이라는 필명의 작가가 온라인으로 연재한 동명의 웹툰을 모아 단행본 책으로 낸 것인다. 작가는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하며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문화재를 직접 공부하고 연구하곤 했는데 그런 옛 도자기들을 담담한 그림체로 소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도자기>에 수록된 에피소드 중에는 청자상감진사채 운학문 분합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다. 청자상감진사채 운학문 분합은 현재 호암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는데 12세기 고려시대에 제작된 뚜껑이 있는 납작한 항아리로, 뚜껑 가장자리에 흑백 상감 연판문대를 두르고 가운데는 백상감된 운학문이 장식된 귀한 작품이다. 청자상감진사채 운학문 분합 뚜껑에는 두 마리 새가 한쌍으로 그려져있는데 이 에피소드는 이 뚜껑에 그려진 새 두마리리를 소재로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명이 등장하는데 할머니는 병이 깊어 병상에 누워있고, 할아버지는 곁에서 할머니를 간호한다. 어느 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깎아주는 사과를 먹으며 이런 말을 한다.


“난 하느님이 세상을 영 잘못 만든거 아닌가 생각했다우. 사람은 서로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하고 곁에 오래 있더라도 결국 혼자잖아요? 그렇게 서로 좋아한다면 왜 “짝!” 하고 두개가 하나로 되지 않을까요?”


할머니의 이 말에 할아버지는 글쎄, 라고 답한다. 이윽고 시간이 지나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할아버지 혼자 세상에 남겨진다. 할머니 묘를 찾은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사과를 깎아 할머니 묘비 앞에 올려 놓고는 예전에 할머니가 자신에게 물어봤던 것에 대해 답을 늦게나마 전한다. 그렇게 서로 좋아한다면 왜 “짝”하고 두개가 하나로 되지 않냐면… 하지만 하나가 된다면 또 다시 하나라서 외로울거라는 것이 할아버지가 늦게 전한 답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도자기>에 실린 여러 에피소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였는데,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PC게임을 하면서 모든 적을 물리치고 모든 미션을 해결해서 엔딩에 도달하면 내가 이겼다는 만족감이나 게임을 끝냈다는 후련함보다 이유없는 심심함과 외롭다는 기분이 들때가 많았다. 모든 몬스터를 물리치고 가장 좋은 무기와 갑옷을 얻고 나를 제외한 세력을 물리치고 중국의 모든 도시를 점령한 뒤 주위를 둘러봤을 때 보이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사라져 없었다.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나는 마지막 자리에 섰지만 정작 더 이상 물리칠 경쟁자들이 없어지자 게임이 즐겁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경쟁하던 몇 시간 전이 그립기까지했다. 나는 여럿이 있을 때 더 즐거웠다.


둘에서 하나가 된다면 결국 외로워진다는 <도자기> 속 할아버지의 말은 비즈니스에도 의미를 지니는 말이었다. 다른 플레이어를 생각하지 않고 나한테 가장 합리적인 선택만을 생각 때 나는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도 없지만, 다른 플레이어를 모두 물리치고 마침내 Last standing man이 되었을 때 밀려오는 공허함이라는 것이 분명 비즈니스에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지만 동시에 타인이 있어 우리의 정체성이 규정된다고 했던것처럼 말이다.


여물위춘(與物爲春). 다른 이들과 더불어 봄을 맞이한다는 장자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이 게임이론과 현실 비즈니스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많은 이해관계자와 함께 조화를 추구할 때 비즈니스가 지속가능할 수 있다는 이타심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다른 플레이어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들과 나의 의사결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을 이해할 때 내가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이기심도 담겨있다. 그게 다같이 이기는 길이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시는 균형이론을 떠올리곤 미소를 지으며 남긴 한 마디 처럼 말이다.


That's the only way we win.

그게 다같이 이기는 길이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Communicate with Data. 생각의 建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