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MBA하다 (20)
인문학으로 MBA하다 (20)
Old School. 페르미온과 보손
2024 Fall - Mod 3, Mod 4
#노교수, #과학, #지식의최전선, #페르미온, #보손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고 만약 다음의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가 어떤 직위와 나이의 교수인지를 한 번 맞춰보라고 한다면 대부분분 어떻게 추측할까?
<Technology Strategy and Business Innovation>
<Topics in Financial Reporting>
<Current Topics in Finance: Financial Technology Tools>
이런 과목들은 재무나 회계의 기초 전공필수 과목도 아니고 또 비즈니스에 적용되는 최신의 기술을 다룬다는 점에서 30-40대의 젊고 패기있는 교수가 가르칠법한 수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 수업은 모두 1950년대생의, 60대 후반 노교수들이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세 교수 모두 머리에 백발이 성성하여 나이가 지긋하신 모습에, UNC 경영대학에서 3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쳐왔고, 조교수나 부교수의 직위는 몇 십 년 전에 거친 뒤 지금은 Distinguished Professor(명예교수)로 불리고 있고, 강단으로부터 퇴임이 얼마남지 않았지만 지식의 최전선에서 여전히 비즈니스의 최신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학자였다.
<Technology Strategy and Business Innovation> 수업을 가르친 알버트 교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겉으로 보면 인상좋은 동네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백발의 머리와 무성한 흰수염과 함께 넉넉한 풍채에 기본적으로 유머를 탑재한 말솜씨를 듣다보면 이것이 수업인지 아니면 만담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알버트 교수는 수업 첫 시간에 자기 소개를 하며 오래된 사진 하나를 스크린에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알버트 교수가 자신이 일했던 회사의 다른 직원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인데 놀랍게도 사진 속에는 스티브 잡스가 보였다. 교수는 “이쯤되면 다들 오- 하면서 한 번쯤 감탄해야 하는거 아니니?” 라고 농담을 건넸는데 실제로 그는 애플의 초창기 멤버 중 한 명으로 엔지니어로서 해박한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애플의 여러 제품을 직접 설계하는데 역할을 했다.
알버트 교수가 대단한 점은 단순히 위대한 인물과 함께했던 왕년의 자신을 자랑하거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식의 최전선에 서서 최신 기술에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을 드러낸다는 점이었다. 그는 3D Printing, Robotics, Mesh Networking, Machine Learning, Pervasive Computing, Bio Technology, Nano Technology 등 7개의 영역의 기술을 소개하고 현재 진행 중인 기술 개발 현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이런 기술은 몇 년 전에 한 번 강의 자료를 만들고 난 뒤 자료를 크게 고치지 않고도 수업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지식이 아니었다. 비즈니스와 연결된 기술은 몇 년이 아니라 몇 개월만 지나도 흘러간 구형 지식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지식의 최전선에 서서 현재 세상을 혁신시키는 기술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해주었다.
알버트 교수는 언제나 유쾌한 말투와 초롱초롱한 눈빛을 빛내며 수업을 이끌었는데, 학생들은 알버트 교수에게 기술과 관련한 어떤 질문을 해도 그가 대단히 세부적인 내용을 대단히 쉽게 답할 수 있다는 점을 알자, 앞다투어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McColl 2650 강의실은 늘 열기로 가득했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내 아버지와 같은 연배의 호호 백발 할아버지가 나노 기술이 어떻고, 블록체인의 원리는 무엇이고, 헬스케어 분야에서 혁신을 가져오는 최신 바이오 테크놀로지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고 강의실에 가득찬 젊은이 중 그 누구보다도 가장 지식의 최전선에 가깝게 서있다는 점이 말이다. 알버트 교수와 비슷한 연배의 내 아버지는 휴대폰으로 송금하는 법도 모르시는데 말이다!
알버트 교수에 이어 노병도 지식의 최전선에 가장 가깝게 있을 수 있다는 걸 직접 증명한 건 <Current Topics in Finance> 수업을 가르친 에릭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부끄럽지만 이 수업을 선택한 건 일주일에 두 번 듣는 다른 수업과 달리 월요일 하루만 들으면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실라버스를 미리 읽어보았지만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가 누구인지는 몰랐고 Finance 관련한 최신 경향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라고 생각할뿐이었다. 첫 수업에서 마주한 에릭 교수의 첫인상은 연배가 지긋한 모습에 말씀도 천천히 하시는 것이 재치넘치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알버트 교수와는 영 다른 느낌이었는데, 수업이 시작되자 에릭 교수는 금융 비즈니스에 적용되고 있는 첨단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양자 컴퓨터, 블록체인, 머신러닝 등의 첨단 기술이 가장 활발하게 적용되며 활용 분야에 대한 논의가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산업이 금융산업이라고 강조하며 이 수업의 목적은 금융산업에서 적용되고 있는 기술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라고 말했다. 교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조금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전 세계 금융위기를 야기한 것처럼 최근의 금융산업이 당면한 현안과 이슈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라고 생각했는데 금융은 커녕 처음부터 끝까지 기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당황할 수 밖에 없던 건 이 모든 테크놀러지 이야기를 아무런 위화감없이 그리고 뒤쳐짐없이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사실 계량경제학과 금융기술에 있어 세계적인 석학 중 한 명이었는데 (이런 점도 모르고 수업에 들어왔다니 뒤늦게 무척 부끄러웠다) 실제 금융산업에서 일하는 지인들을 온라인 연사로 초청해서 금융과 기술이 접목되는 현장에 대해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역시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두 달 동안 Orange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머신러닝 모델을 설계하는 과제를 해야했는데 에릭 교수가 직접 이 프로그램 사용법에 대한 가이드 영상을 만들어 공유해주었다. Orange 프로그램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을 위한 배려가 감사했고, 한편으로는 아버지 혹은 그 이상 연배의 교수로부터 머신러닝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운다는 점도 뭔가 알쏭달쏭한 기분이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주인공인 유정원 (한석규 扮)이 아버지 (신구 扮)에게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 조작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보통 최신기술은 젊은 세대에서 그 윗세대로 전파되는 법 아니던가!
나이와 지식의 최전선과의 거리는 반비례함을 알버트 교수와 에릭 교수가 보여주었다면 <Topics in Financial Reporting> 수업을 가르친 랜즈먼 교수는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노교수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 수업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회계적인 이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다룬다. 직원에게 스톡옵션을 부여했을 때, 선물이나 옵션처럼 파생상품을 이용해서 판매상품에 대한 가격변동을 헷지했을 때, 회사에서 직원을 위한 직장 건강보험을 도입했을 때, 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처럼 자산유동화 상품을 발행했을 때 기업은 이를 회계적으로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지를 배우는데 실제 비즈니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적용 가능한 현실적인 회계 이슈를 고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인 수업이었다.
랜즈먼 교수는 열정으로 가득한 분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회계학을 연구해오며 머리 속에 축적된 방대한 지식을 모조리 학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처럼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는데 그의 강의는 회계학의 구루가 보여주는 원맨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열정은 강의뿐만 아니라 삶에도 녹아있었다. 랜즈먼 교수는 비틀즈의 대단한 팬이었는데 매 수업마다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 비틀즈의 음악을 틀어놓고서는 이 음악과 관련한 즉석 퀴즈를 내기도 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비틀즈 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퀴즈를 맞추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지만 덕분에 수업은 늘 유쾌하게 시작했다. 랜즈먼 교수는 언제나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모습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자세히 보니 모든 넥타이에 비틀즈 그림이 그려져있었고 그는 한 번도 똑같은 비틀즈-넥타이를 매고 오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그와 관련한 물건을 계속해서 수집하는 모습에서 ‘이 교수는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주관’이 있으신 분이구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넥타이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조지 해리슨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이다.
린즈먼 교수가 보여준 노교수의 저력은, 수십년간 축적된 지식을 무미건조하게 전달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담아 더 올바른 방향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도록 한점이다. 그가 가르치는 회계학은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정립된 학문이다. IFRS나 GAAP과 같은 회계기준은 우리가 어떤 회계계정에 어떤 값을 기입해야 하는지에 대해 국제적으로 약속한 규칙이다. 그런데 린즈먼 교수는 가끔은 이 회계기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GAAP 회계기준에서 A라는 방식으로 정리를 하라고 규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게 정리해야하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A가 아니라 B 방식이 더 직관적으로 올바른 회계 기준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가끔은 그런 점을 퀴즈로 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똑같은 문제를 두고 GAAP을 적용한 일반적인 방식으로도 문제를 풀어보고, 린즈먼 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B 방식을 적용해본다면 답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같이 고민해보는 식이었다.
린즈먼 교수의 이런 강의 스타일 때문에 초반에는 다소 애를 먹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회계학 수업을 들어서 기본적인 개념은 알고 있지만 어쨌거나 비즈니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회계 이슈가 생소했는데 그는 기초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초에 자신의 생각을 더한 응용까지 함께 가르쳤기 때문에 기초와 응용 중 무엇이 맞는 답인지, 무엇을 내 머리 속에 지식으로 밀어넣어야 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게 맞다는 거야, 아니면 저게 맞다는 거야…’ 집에 돌아와 수업을 복기하며 다시 개념을 공부하느라 꽤 애를 먹었는데, 생각해보면 기초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 젊은 교수가 할 수 없는, 노교수만 할 수 있는 접근법이기도 했다. 그건 세상 규칙 따위는 잘 모르겠고 내 생각은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괴짜스러운 마인드는 아니었다. 랜즈먼 교수는 미국 회계 협회의 재무 회계 및 보고 부문 회장을 지낼만큼 이 분야에 정통한 석학이었는데, 바로 그 점때문에 정해진 틀을 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세상에 약속된 기초는 이것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또다른 해석 가능성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도(학생들도) 함께 그런 점에서 고민해보라는 점은 정형화된 회계 기준에 계속해서 주먹을 두드리는 창조적인 행위처럼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가르치는 약속된 규칙보다, 조금은 다르게 회계 기준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
알버트, 에릭, 그리고 린즈먼 교수가 보여준 건 노교수의 품격, 비즈니스 언어로 표현하면 리더의 자격이었다. 백발을 휘날리며 지식의 최전선에 가장 가깝게 서서 최신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정형화된 학문적 틀에 얽매이지 말고 폭넓게 고민을 해보라고 격려하는 건 나이와 무관했고, 오히려 젊은 교수들이 보여주지 못한 노교수들만의 멋진 모습이기도 했다.
MBA에서 만난 노교수들은 내가 20년 전 학부에서 단편적으로 겪었던 노교수들의 모습과는 꽤 달랐다. 경영학과에 입학하고 첫 1년을 보낸 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입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 한 학기 동안에는 경영학과 수업과 함께 다른 단과대학에서 개설한 전공과목을 교양과목으로 들어보고 싶었는데,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내가 선택한 건 법학과에서 개설한 <법학총론>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진학할 때 어느 과를 선택할지를 두고 크게 의심하지 않은 채 경영학과를 선택했는데, 대학에 다니면서 ‘만약 내가 그때 경영학과가 아니라 비슷한 점수대의 법학과에 갔다면 어땠을까?’를 종종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경영과 달리 법이란 과연 무엇인지 감이라도 잡고 싶어서 법학과 학생들이 가장 초반에 수강하는 <법학총론>을 한 번 들어보자고 했다.
법학과 건물은 경영학과 건물에서 좀 더 높은 언덕 위에 있었는데 1교시를 마치고 언덕을 올라 법학과 건물로 향했다. 수업은 1980년대에 지어진 법학관 구관 강의실에서 열렸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이 수업을 들으러 온 경영학과 친구들이 몇 명 보였다. 나처럼 호기심에 법학과 수업을 신청한 학생도 있었고, 행정고시 준비를 앞두고 몸을 풀려고 수업에 들어온 친구도 있었다. 이윽고 나이가 지긋하신 법학과 교수님이 두꺼운 교재를 옆에 들고 강의실로 들어오셨는데 몇 번 수업을 듣지 않아도 나는 이 수업이 꽤 오래 전에 박제되어 지금까지 큰 변화없이 계속 반복되어왔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뭐라고 정확히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분이 사용하는 교재, 강의자료, 말의 높낮이와 빠르기 등은 지루했고 과거에 멈춰져있는 듯 했다. 법이란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합의를 텍스트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특징을 반영한 것일까?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때 내가 기억하는 강의실의 정경은 노교수의 수업은 이런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군대에 다녀와 경영학과로 복귀해 겪었던 몇몇 노교수들의 수업도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물론 내가 학부에 다닐 때에도 지식의 최전선에서 열정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노교수들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나는 그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고 20년이 지나 MBA에 와보니 이곳에서 만난 나이 70살을 바라보는 노교수들의 수업은 분명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나이는 정말 숫자에 불과하다. 내가 느낀 점을 시간이 지나 UNC 어느 경영학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도 내 생각에 크게 공감한다고 했다. 이곳에 계신 교수들은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열정적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그리고 선배 교수들은 후배 교수들에게 지식의 최전선에서 계속 머무르는 ‘학자로서의 열정’을 잃지 말라는 점을 조언한다고 내가 만난 교수는 이야기해주었다.
세 명의 노교수들을 떠올리며 나는 물리학의 기본입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살았던 집에는 1층에 부엌과 거실이 있고 한편에 작은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 벽 한편에 그 즈음에 관심있게 생각하는 주제를 종이로 출력해서 붙여두곤 했다. 화장실에 드나들어 손을 씻을 때마다 고개를 들면 자연스럽게 벽에 붙인 종이를 볼것이고 그런 식으로 그 내용을 자연스럽게 계속 환기하자는 취지였다. 한동안 화장실에 오래 붙어있던 건 물리학 기본입자 표준모델 (Standard Model of Elementary Particles)을 정리한 일러스트레이션이었다. 비록 고등학교 때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을 배우는 공통과학 영역에서 물리학을 가장 어려워하고 가장 많이 틀렸지만 물리학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동경하는 학문 중 하나였다. 누구나 그런 것이 하나씩 있지 않은가, 스스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히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기를 희망하는 이른바 멋진 학문같은 것 말이다. 나에게는 그 멋진 학문이 물리학이었는데 한 해에 몇 권씩은 꼭 최신 물리학 책을 읽으며 (책을 읽어도 모르겠지만) 생각의 견문을 넓히고, 다시 태어나면 MIT 공과대학 물리학과 신입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언젠가는 <Quantum Mechanics> 교과서를 원서로 독학하며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MBA 과정 중에도 물리학 책을 틈틈이 읽었는데 노교수들의 수업을 듣던 2024년 가을에는 유독 ‘물질’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여기서부터는 문과 남자의 머리로 이해한 물리학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해보자.
기본입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다.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자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분자는 다시 원자들의 조합으로 분해된다. 원자는 가운데에 존재하는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로 나뉘는데 사실 여기까지가 물질의 기본 단위에 대한 문과생 지식 수준의 마지노선이다. 다들 그런 그림을 한 번은 본적이 있을 것 같다. 가운데 원자핵이 야구공처럼 놓여져있고 전자가 파리처럼 그 주위를 돌아다니는 초기의 원자구조 설명 그림 말이다.
그런데 원자핵도 몇 개 계층으로 더 쪼갤 수 있다. 원자핵은 양(+)전하를 갖는 양성자와 전하를 갖지 않는 중성자로 다시 쪼갤 수 있다. 그리고 방송 <세상에 이런일이> 처럼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쿼크라는 단위로 쪼갤 수 있는데 양성자는 업쿼크 두 개와 다운쿼크 한 개가 모여 이루어지고, 중성자는 다운쿼크 두 개와 업쿼크 한 개가 모여 구성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쪼개고 쪼개다보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쿼크나 전자와 같은 것들이고 이들을 기본입자라고 부른다.
기본입자는 모두 17개가 있다. 12개의 페르미온(Fermion)과 5개의 보손(Boson)이다. 아무래도 물질의 특징을 결정짓는 요소들은 12개의 페르미온이다. 페르미온은 6개의 쿼크와 6개의 렙톤으로 나뉘는데, 쿼크는 아까 언급되었던 업쿼크와 다운쿼크 등을 말하고 렙톤에는 전자가 속해있으니 페르미온에 속하는 기본입자들이 모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모여 원자핵을 이루고 원자핵과 전자가 모여 원자를 구성하고 그들이 모여 분자를 구성하고 … 이윽고 물질이 된다. 그래서 물질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기본입자 중에 페르미온에 좀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반면 보손은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보손은 페르미온처럼 입자 간의 결합을 통해 물질의 기본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서로 결합되는 힘을 매개하거나 그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일종의 도우미 역할을 한다. 우주에는 입자와 입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이렇게 네 개의 상호작용 힘이 존재하는데 이 힘을 바탕으로 입자들끼리 서로 밀어내고 끌어당기는 과정을 통해 물질이 구성된다. 다시 말해 페르미온이 서로 결합하는 과정에선 네 개의 상호작용이 필요한데 이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도록 매개하는 것이 보손의 중요한 역할이다.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는 보손을 Interaction(상호작용)과 Force(힘)의 매개체(Carrier)라고 정의한다.
혹은 힉스 보손처럼 질량이 없는 기본입자들에게 질량을 부여하는 보손도 있다. 우주에는 마치 끈끈이같은 보이지 않는 막이 사방천지에 깔려있는데 기본입자들이 이 끈끈이 막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질량을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주에 깔린 끈끈이 막이 힉스 장이고 다른 기본입자들이 힉스 장과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에서 질량을 얻게 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보손은 그 자체로는 다른 보손들과 결합하여 우리가 알고있는 물질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기본입자들이 결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질량까지 부여한다. 존재의 가능성을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원자에 비해 양성자나 중성자를 덜 들어봤겠지만, 양성자나 중성자보다 쿼크에 대해 덜 들어봤겠지만, 그리고 쿼크나 전자와 같은 페르미온보다 보손이라는 기본입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손은 페르미온을 보조하여 그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을 구성하는 17개의 기본입자 중 하나인 것이다. 보손이 없으면 페르미온은 아무리 뛰어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도 결합하지 못하고 흩어진다.
페르미온이 뭔지, 보손이 뭔지 나는 머지않아 잊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화장실을 갈때마다 기본입자 표준모형 표를 들여다보지만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더 많다. 그러나 노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며, 나이와 상관없이 지식의 최전선에 서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아낌없이 전달하여 우리가 MBA를 떠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무엇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그분들의 열정을 보며, 나는 그들이야말로 학생이라는 페르미온이 성숙한 물질이 되도록 도움을 주고 매개가 되는 보손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MBA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 과정을 통과해 다시 비즈니스 세계로 나아가는 MBA 학생들이다. 결국은 학생들이 얼마나 훌륭한 포텐셜을 지닌 새싹들이었는지, 그리고 2년이 지나 그 포텐셜을 만개하며 각자의 필드에서 훌륭한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해나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교수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교수의 가르침은 꼭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 내용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교수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정한 가르침은 진심으로 지식과 배움을 대하는 태도였다.
나이나 직위에 관계없이 계속해서 지적 호기심을 잃지 않을 것, 자신이 다루는 영역에 익숙해질수록 안주하지 않고 더 지식과 정보의 최전선에 서도록 노력할 것, 반짝이는 눈빛을 놓치지 않을 것, 과거에서 배우되 과거에 머물지 말 것… 그런 가르침이 없다면 우리는 MBA에서 지식은 얻을지언정 소위 세상을 바꾸는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질량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가능성을 지닌 페르미온이었던 우리가 물질로 변하기 위해 보손이 반드시 필요했고, 그들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혼자의 힘만으로 비즈니스맨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도 나이가 들어갈 것이고 늙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후배들이 서로 결합하여 새로운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탄생시키고 무게감 있는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하기 위해 매개하는 보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까? 내가 만났던 노교수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나 다음 세대에 대해 도움을 주고 있을까? 그러기 위해 나는 얼마나 지식의 최전선에 여전히 가깝게 나를 위치시키고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된것만으로도 ‘올드스쿨’들의 수업은 들을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