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MBA하다 (21)
사람의 기억은 늘 부정확하고 쉽게 왜곡되는 법이라서, 나는 지금까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는 논어의 구절을 '길을 나서면 반드시 세 명의 귀인을 만난다' 정도로 엉터리로 기억하고 있었다. 길을 간다는 것과 세 명이라는 숫자를 기억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의미는 정 반대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길을 나서면 세 명의 귀인을 만난다는 그 말처럼, 2년 전 미국으로 오는 먼 길에서 나는 세 명의 귀인을 만난 것도 사실이다. 미국 공항에 도착해 캐리어를 찾기 위해 수화물 코너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보고 "혹시 S기업에서 오지 않았나요?" 라고 한국어로 물어본다. 아니? 내가 한국인처럼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S기업에 다니는 것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알고보니 그때 나는 S기업 로고가 새겨진 반바지에 S기업 로고가 새겨진 양말까지 신고 있었는데, 내게 말을 건넨 사람도 S기업에 다니는 직원이었다. 내가 머무를 지역 인근에 S기업에서 투자한 미국 현지기업이 있는데 그 현지기업에 파견된 한국 사람이었다. 한국과 시차가 14시간이나 차이가 나는 미국에서 S기업의 로고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다니, 나는 그래서 그 사람을 두 번째 귀인으로 생각한다.
세 번째 귀인은 수화물을 찾고 공항을 빠져나오며 만났다. 캐리어 3개에 검찰박스 4개 그리고 유모차까지 가져왔기 때문에 가장 큰 우버 승합차도 이 짐을 다 싣지 못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우리 짐을 일부 나눠 집까지 배송해주겠다는 어떤 한국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알고보니 내가 MBA로 다닐 학교의 학생이었는데 그분 덕분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고 집까지 안전히 모든 짐을 싣고 올 수 있었다.
첫 번째 귀인은 미국으로 넘어오는 도중 비행기 안에서 만났다. 옆자리에 앉은 아이와 함께 비행기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세우더니 "혹시 OO 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라고 물어본다. 아니? 거의 20년 전에 졸업한 OO 고등학교를 내가 졸업한 것을 어떻게 알지...? 순간 놀라며 상대방 얼굴을 보았는데, 20년이 지나도 반가운 얼굴은 한눈에 알아보는 법인지 내게 말을 건넨 분은 내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연락이 끊긴 고3 담임을 MBA를 하러 미국으로 넘어오는 비행기 안에서 만날 확률이라는 것이 참 얼마나 높을까 싶었는데, 나중에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생님의 따님이 옆 주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당신의 딸을 보러 미국에 가는 길이라고 하신다. 나는 쑥스럼이 많아서 선생님의 번호를 물어보진 못했다. 사실 물어봤어도 2년 전의 나는 뭔가 "이제 미국인이 될 것이다..." 라는 마인드였기 때문에 거의 연락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셋의 귀인은 마주한 시간 순서대로 보면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비행기에서 만난 첫 번째 귀인은 고등학생이던 나를 아는 사람이고, 짐을 찾을 때 S기업 로고를 알아본 두 번째 귀인은 현재 직장인으로서의 나를 아는 사람이고, 공항에서 집까지 짐을 옮기는 걸 도와준 세 번째 귀인은 미국에서 학생으로 살아갈 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세 명의 존재와 그 만남을 지난 2년 내내 꽤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러면 지난 2년 동안 나와 아내와 아이, 우리 세 명은 각자 또 여기에서의 귀인을 새롭게 찾고 만났을까?
분명 그런것 같다.
나는 학교에서 같이 MBA 수업을 듣는 250년 학생들 중, 우연히 2000년생 근육질의 훈남과 친해져 2년 내내 단짝처럼 지냈고 아내는 자주가는 도서관에서 개최한 어떤 행사에 갔다가 우연히 미국인 아주머니를 만나 통성명을 하였는데 2년 내내 매주 만나며 우정을 쌓았다. 아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미국에 온 아이는 다행히 학교에 잘 적응하며, 그리고 내가 기대한대로 나보다 훨씬 영어를 잘하는 아이로 거듭났다. 미국 초등학교에서 1학년과 2학년을 만 2년 동안 온전히 다니며 몇 명의 아이와는 2년 연속 같은 반을 하기도 했는데 그 아이들과는 서로 집에 초대해서 같이 놀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에게 2년 동안 찾아온 가장 소중한 귀인은 아마 아이 자신의 부모인 나와 아내였을거다. 한창 직장에서 체급이 무거워지고 책임이 많아지기 시작하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나이를 나와 아내는 한국에서 잠시 도피해 미국에서 보냈는데, 그 덕분에 일주일에 아이 얼굴을 몇 시간도 채 보지 못하는 삶을 잠시 유예했고, 아이가 어디를 가든 꼭 함께 따라가며 그것이 무엇이든 - 도서관이든, 운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 만7세에서 만9세의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볼 수 있었다.
MBA에 오기 전 나는 정말이지 회사에 밤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하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상사와 갈등을 겪으면서도 일단 회사에서는 집으로 오고 남은 일을 집에 와서 하는 버릇이 생겼다. 2010년부터 시작된 직장생활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최대한 퇴근시간을 지키려고 했고, 그것이 가능해서 다행이었고, 동시에 "언제까지 이런 퇴근이 가능할까..." 내 시간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이것이 과연 언제까지 가능할까?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집 사이의 밸런스를 두고 나는 늘 "유예" 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올해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버텼는데, 내년부터는 좀 더 회사에서 오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라며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유예"라는 단어를 마음에 품고 살아왔는데 유예는 중단되지 않았고 2년 동안 MBA를 겪으면서 오히려 연장되기만 했다. 이것도 감사한 일이라면 더없이 감사하다. 계속해서 유예된 부모와 아이의 하나된 시간이라는 것이, 아이에게 찾아온 가장 귀한 귀인 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는 예전 한국 나이로 10살이 되더니 예전처럼 동요를 부르거나 겨울왕국 렛잇고를 부르지 않는다. 어느덧 내가 흥얼거리는 한국 가요(!!)를 같이 부르거나 가사를 외우는데 요새 우리는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자주 들었다.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하나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미국에서의 2년 생활을 정리하면서 드는 생각은, MBA를 잘 마무리해서 후련하다는 생각도 아니고, 한국이 무척 그립다는 생각도 아니고, 헬코리아로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도 아니다. 마흔이 갓 넘은 이 시점에 어떻게 하면 오래오래 내가 지치지 않고 오래 사회인으로서 기능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생각은 동갑내기 아내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15년 동안 같은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가 지금 오르고 있는 이 산이 유일한 산이기 때문에 더 높이 정상까지 무탈하게 올라가는 것만을 생각했다. 근데 미국에 와보니 내가 오르던 산이 유일한 산도 아니고, 오를 수 있는 산은 너무나 많고, 저 사람이 저 산을 오른다고 해서 욕하는 이도 없고, 남이 더 높은 산을 오른다고 해서 그것을 애써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회사 생활과는 별도로 어떤 목표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이런저런 공부를 한다. 가끔 기분 전환을 위해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을 듣는다. MBA라는 사건은 분명 끝이 났지만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길모퉁이를 계속해서 상상하게 되는 요즘이다. 채플힐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하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지난 2년이 축적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갈때다. 또 누가 알겠는가,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들어간 순간 우주의 진실을 발견해버린것처럼 우리도 모르는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여정에서도 또 귀인을 분명 만날 것이라고 나는 가만가만 생각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T0JI13mVhME&ab_channel=%EB%9D%BC%EB%94%94%EC%98%A4%EC%8A%A4%ED%8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