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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화엉 Nov 28. 2023

누가 사랑하고 누가 사랑받았는가

이운진 시인의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를 읽고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
이운진 지음
소월책방 펴냄



말을 한다는 건 시시포스의 굴레에 갇힌 운명과 같다. 대상에 대한 지식, 경험, 감정을 틀림없는 언어에 담아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은 늘 실패하는 법이다. 간신히 쌓아 올린 언어의 바위는 그 본질에서 쉽게 미끄러지곤 한다. 언어의 슬픈 운명이다. 가파른 운명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실험을 한다. 언어의 끝을 날카롭게 갈아 상대가 그 언어를 수용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거나, 수 십 년 동안 우주의 심연을 향해 같은 전파를 발산하듯이 지치지 않고 같은 언어를 반복하거나, 또는 미끄러지는 언어를 비언어로 단단하게 고정시키기도 한다. 


이운진 시인이 표현하는 디카시 역시 단순히 이미지에 종속된 부차적 텍스트로만은 이해되어선 안 된다. <고흐 씨, 시 읽어 줄까요 (사계절, 2016)>을 펴내며 시가 그림과 비슷하다는 것, 그림이 점점 저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어쩌면 시보다 그림이 더 먼저 온 것 같다며 1) 작가가 고백한 것처럼 언어와 비언어는 서로 경쟁하며 가파른 비탈길을 함께 올라간다. 보다 정확한 방법으로 대상을 상대에게 전달하려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운진 시인이 전달하고 싶었던 건 작품 제목에 함축되어 있어 보였다.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라는 질문은 일견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묻던 상우의 고백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떠나다’ 라는 동사를 ‘변하다’ 라는 동사로 바꾸어 읽어본다면, 우리는 사랑에게서 떠날 수 없고 혹은 사랑에게서 떠나는 존재로 변화할 수 없다는 것처럼 읽힌다. 그렇다면 이 문장에서 작가가 떠올린 ‘어떻게’ 라는 단어는 조금은 단정적으로 다가온다. 당신은 과연 혹은 감히 사랑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데,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나는 사물에서(사물의 시선), 풍경에서(풍경의 초대), 여행에서(여행의 기록) 증명하였는데, 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작가가 기록한 사진을 바라보면, 그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해 붙드는 것이 사랑임을 생각하게 한다. 


길에서 발견한 나비를, 흐린 빗 속 날씨를, 낡은 정동진 기차역을 포착한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단어와 함께 다가온다. 작가는, 문학이라는 것은 너무 많이 저장된 슬픔을 퍼내는 도구였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쓸쓸함과 상처가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를 채우고 있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려는 노력 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나를 포함한 독자를 납득하게 만든다. 이때의 우리는 이 경이로움을 먼저 발견해내기 위해, 다시 말해 먼저 사랑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우리는 사랑의 주체가 된다.


조금 더 시선을 확장해보자. 작가는 “우리가 한때 우리였다는 걸 말하려고 나무는 모든 잎을 버리나" 2) 라고 한다. 맞다, 모든 것은 한때의 흔적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흔들리고 변화하고 소멸하고 잊혀진다는 것이 삶의 본질이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그런 시선에서라면,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한 보 후퇴하고 ‘어떻게’라는 단어가 한 보 전진한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어떤 태도로, 어떤 자세를 갖추면서 사랑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을 떠날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꿔 보는 것이다. 


작가가 포착한 사물, 풍경, 여행 모두 영원히 결박되어 있지 않다. 사물은 낡아 소멸되고, 풍경은 수 년도 되지 않아 변화한다. 작가가 마지막에 배치한 여행의 본질은 헤어짐이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의 숨가쁜 설렘으로 여행을 기억하지만, 사실 그것의 본질은 새로운 시간과 장소로부터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것, 돌아와야 한다는 것,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멸, 변화, 이별. 이러한 생의 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며 어떤 예의를 상대에게 갖추어야 하는 것일까. 바로 그것이 삶의 중요한 질문이며, 이 질문을 떠올린 사람 이야말로 사랑에게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삶(사랑)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삶(사랑)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니. 이때의 우리는 나를 둘러싼 수 많은 존재와 공동체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았던가 …… 사랑의 수혜를 기억해내는 사랑의 객체가 된다.


당신은 어떻게라는 단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오래 들여다본다. 기실, 일상의 사이 속에서 발견한 사랑에게서 떠날 수 없다는 사람과,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것들로부터 떠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그렇게까지 다르진 않다. 우리의 삶은 모두 유한하다. 삶은 시작점에서 끝 지점으로 비가역적으로 흐른다. 삶의 태동에 보다 가까웠을 때는 사랑이란 불변한 것이며 어디에나 새겨져 있으며 그것들을 발견해내려는 노력이 삶의 정언명령임을 기꺼이 믿는다. 삶의 종료 지점에 조금씩 가까워져 갈수록 어떤 자세와 태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함을 인식할 것인지, 그런 생각에 가까워져 갈 것이다. 


다만, 삶과 달리 사랑을 인식하는 태도의 변화는 비가역적이지 않다. 우리의 삶 역시 사물, 풍경, 여행과 같이, 계속해서 좌우로 교차하고 앞뒤로 변주하며 끊임없이 흔들리며 나아간다. 그렇다면, 사랑의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택일할 필요도 없고, 시간이 흐르며 자연히 변화하는 삶의 태도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느슨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어떻게 라는 단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도 좋겠다. 


사랑에서 떠나거나 떠나지 않거나 결국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았는지 계속해서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 3), 결국 그것이, 그것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1) 이운진, <<시와 그림은 슬픔을 퍼내는 도구>>, 채널예스 인터뷰, 2016.11.25

2) 이운진, <<11월의 끝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中)>>, 천년의시작, 2020

3) 이운진,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떠날 것인가>>, 소월책방, 2023,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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