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판적 사고에 대한 경계
#1. 처음 도그마란 단어를 접한 건 영화에 한참 관심이 많던 90년대 말 ‘도그마 선언;Dogma 95’이었다. 2000년 칸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를 중심으로 몇몇 덴마크 출신 감독들이 주창한 열 가지 영화원칙이었다. 사운드의 후시녹음은 안되고,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찍어야 하며, 필름 규격은 35mm로만 해야 한다는 등의 그야말로 ‘교조적’인 원칙들이었다. 물론 95년에 주창한 너무나 순수했던 이 원칙은 현재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2. 도그마란 단어는 사실 기독교에서 파생된 단어다. 굳이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교의, 교조, 교리’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성적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며 신자라면 누구나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하는 개념이다. 십 수년을 교회 다닌 본인은 이제 슬슬 왜 ‘도그마’라는 단어나 ‘교조적’이라는 표현이 존재하는 지 알 것 같다. 활자술이 없던 시대에 성경의 해석을 독점하던 교황과 신부님들,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 이후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을 필두로 설교권과 성경해석권을 쥐고 있는 일부 목사님들, 그로 인해 파생된 통일교,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 비판은 있을 수 없고, 맹목적 믿음만을 강조하는 분위기. 시대가 아무리 진보 한들 변하지 않는 종교계의 단어가 있다면 이 ‘도그마’ 일 것이다.
#3. 20세기에 대한 책을 읽던 중 근래 발생하는 극단적 이념의 문제들이 꼭 현재, 그리고 한국만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된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날까지도 일본 정부는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태평양전쟁은 의심의 여지없이 승전보를 거듭한다고 왜곡하였다. 냉전이 지속되던 50년대 미국 역시 메카시즘으로 불리는 극단적 반공주의로 멀쩡한 군인, 국회의원, 등을 빨갱이로 몰아 매도하였다. 이때 상대적으로 부유한 이들의 일부를 매도함에 따라 열광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소수민족들이었다. 물론 매카시즘 광풍이 끝난 후, 미국은 20세기에 중세 마녀사냥과 같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자성하게 된다.
#4. 리영희 선생의 ‘대화’라는 책을 읽으며 남한의 친일파 성향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알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되는 냉전시대의 한반도는 소련-중공-북한의 공산주의 대 미국-일본-남한의 자본주의 전선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친일세력이 남한에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시대 일본 공직자들은 북한에 가면 공산주의 진형에 의해 처형당할 것이 분명하니 남한으로 이주했다는 설이다. 책에 따르면 해방 후 남조선 경찰 최고사령관이 일제 경찰 봉직자였으며, 그 밑 총경의 83퍼센트, 경감은 75퍼센트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고 한다. (82p.)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 앞서 언급한 언론과 출판물의 탄압으로 인해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설마 광복하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극히 개인적 관점에선 7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때 친일 경력에 대해 강력히 처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그 과거를 덮으려 하는 시도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하는게 원칙이니 말이다.
#5. 사회가 많이 발전해 왔으며, 지금은 수많은 정보가 간단히 인터넷만 클릭해도 확인되는 때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도그마’에 갇혀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고, 때로 위협까지 가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가까이는 IU 음원 폐기, 취업 때문에 연쇄살인 암시글을 올린 쿠X맨, 멀리는 세월호, 천안함에 대한 상반된 의견, 노무현/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찬양 혹은 비하 등을 들 수 있겠다. 불의에 불같이 항거하는 것은 좋지만, 부디 차분한 이성으로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도그마’에 갇힌 ‘교조적인’ 생각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 편이 주장하는 얘기도 일단 비판적 사고로 한박자 쉬어가는 센스가 필요하다.
SNS에 글을 쓰며 나도 이러한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세상은 넓고 사람도 무지 많은데, 지나치게 내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지는 않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성;自省을 해 본다.
도그마에게 갇히지 않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