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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Aug 17. 2016

재능의 역설

얼마 전 SBS 영재 발굴단에서 어린 시절 미술영재였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 미술에 독창적 재능이 있던 그 아이는 예고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입시미술과 맞지 않아 길을 접고 인문계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화풍을 보니 과연 일반적인 순수미술이라기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만화 같은 스타일이었다. 프로그램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사회가 천편일률적 기준으로 우리 아이들의 영재성을 꺾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생각하는 바는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굳이 이 아이를 왜 순수미술의 길로 인도하려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그저 재능의 하나일 뿐이지 그게 경제활동으로 이어지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즉, 그 재능을 가지고 만화가로 먹고살려면 내러티브를 창조할 능력이 있어야 하며, 순수미술로 간다면 자기 철학이 있어야 한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20세기 초 뒤샹이 변기를 들고 나오면서 이미 미술은 시각적인 것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서울 유수의 미술대학 졸업작품전에 가 보시라. 우리가 생각하는 아주 나이스 한 펜화나 수채화는 온 데 간데없고, 그 형이상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의 향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어떠한 '기술'이 뛰어난 것이지 그게 '미술'로 진로를 정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두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나는 '영재'라는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부모가 한 아이의 재능을 키워주고 기회를 주는 건 당연하지만, 영재라고 비행기태워 사리분별을 흐리게 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영재란 무엇인가. 영재도 어디까지 상대적인 개념이다. 지능으로 따지자면 웩슬러 지능검사(WIAS) 등으로 테스트를 하고 표준편차에 따라 상위 몇 퍼센트에 드는지에 따라 판별한다. 결국 어느 표본집단 내에서 얼마나 상대적 능력이 뛰어난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 재능이 실제로 성인이 된 후 스스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암기를 남들보다 잘하면, 그림을 남들보다 잘 그리면, 노래를 남들보다 잘하면, 비행기에 태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집단에서든 1등은 항시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게 학교로, 지역구로, 서울시로, 대한민국으로 점차 그 파이가 증대되면 언제 그 1등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재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예체능의 경우엔 제 아무리 서울대나 홍대 미대를 나온다 하들 스스로 경제활동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데, 이건 역사적으로 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먹고사니즘과 다소 동떨어져 있는 유희의 영역이니 누군가 후원자가 있거나 밑에서 사교육비로 겁나 밀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게 만화나 가수의 영역으로 가면 그래도 현대미디어의 영향으로 스스로 수익활동을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승자독식의 영역이다.


아이의 영재성. 그 영재적 재능이 직업으로 꼭 이어져야 한다는 편견을 일단 버렸으면 좋겠다. 직업은 직업대로 갖고 그 영재적 재능을 취미로 즐긴다면 더없이 행복할 수 있다. 직업의 세계로 들어서면 필연적인 갑을관계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해선 자신이 원치 않는 작품이나 성과품을 계속 내놓아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러한 사람은 백남준 선생 정도 될 수 있으려나. 거의 없다. 언젠가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이 바닥은 그냥 오래 버티기가 실력인 것 같다고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도 제주도에서 한국 최고로 좋은 미대에 합격했다고 18세에 이미 동네 어귀에 현수막이 붙었던 친구다.


소년등과 부득호사(少年登科 不得好死)라는 말이 있다. 너무 일찍 출세하면 끝이 좋지 않는다는 뜻인데, 세상 모든 일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한 번쯤 되새겨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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