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안식일에 불충하게도 일을 하러 나온 날라리 신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요일에 일을 하러 나오는 날에는 출근길에라도 팟캐스트를 통해서 설교말씀을 접하려고 노력한다. 오늘 들은 설교말씀은 2016년 11월 13일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이재철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사도행전 26장 초기의 바울이 당시 유대지방의 왕이었던 아그리파스에게 변론하는 내용인데, 바울은 아그리파스 앞에서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유대인으로 성실히 살아왔고, 유대교 안에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세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느 유대인이 봐도 자신의 삶은 특별히 죄라 할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죄라 여김 받는 것은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재철 목사님이 이 설교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면 설령 추구하는 바가 다르더라 할지라도, 바울과 같이 언제든지 나의 삶에 대한 변론이 가능할 정도로 투명한 삶을 살자는 내용이다. 100주년 기념교회는 재정을 상당히 투명하게 관리하고 1원 하나까지 성도들에게 공개한다고 하는데, 이렇듯 숨기는 것 없이 생활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이라 전한다.
우리가 현재 사회에 분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앞에선 국민을 위한다고 하며, 뒤에선 비선라인을 통해 투명하지 않은 삶을 사는 어떤 분 때문에 그러하다고 본다. 본 설교는 역시 광화문 광장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투명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심판은 온당하다고.
다시 개인의 관점으로 돌아와 보자. 내가 수많은 의심을 하고 한국교회라는 보수적 집단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여전히 출석하는 이유는 지극히 내 개인을 돌아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사회 속에서 내가 저지르는 일들을 합리화하며 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내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조용히 나를 들아보는 자리가 필요해서이다.
진화론자를 지지하지는 않지만 나는 진화론의 존재를 인정한다. 진화론이 없다면 현대 과학은 그 근간부터 다시 고려해 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현대 과학이 이루어 놓은 뼈대 위에 생활하고 있다. 의학과 지질학, 천문학과 생물학 등의 과학적 업적이 없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수명이 쉰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며, 유행병에 의해 삶을 마감했을 수도, 천재지변을 전혀 예측하지 못해 고사만 지내며 아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로 인해 전파된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된 이후 중세 서유럽을 정복했고, 그 편협한 도그마로 인해 과학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다. 과학뿐만 아니라 신대륙 정복 및 십자군 전쟁 등 기독교가 과거 인류에 악영향을 끼친 것들도 셀 수 없이 많다. 나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조금 그 강고한 믿음을 너그럽게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내가 믿는 것이 꼭 완벽한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파스칼의 내기를 통한 그리스도교 변증법, 빅뱅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느 누군가는 창조자가 있었다는 논리로 나는 여전히 기독교를 인생의 종교로 갖고는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게 꼭 진리가 아니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이쯤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내가 어떠한 논리로 다른 사람을 전도하거나 설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일관성 혹은 투명성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사 옆 새문안교회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언제나 무심코 건너는 그 무단횡단. (사실 수많은 사람을 이 무단횡단을 매일같이 한다면 그곳에는 횡단보도를 놓는 것이 제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무단횡단 지점에 새문안교회는 일요일만 되면 바리케이드를 쳐 놓는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을 통해서 가까운 횡단보도로 교인들을 인도한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두 명이라도 무단횡단을 했을 때, 운전자나 행인들이 볼 기독교인에 대한 불신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지 않나 싶다. 이렇듯 사소한 것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면 그 행동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관되고 투명한 삶의 궤적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나는. 아직 나는 그러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앞뒤 좌우가 같은 사람이 되고자 계속해서 노력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 사회도 조금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