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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Dec 06. 2016

영어는 '수단'이지 '본질'이 아니다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나는 영어를 잘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업무를 영어로 하고 있는 사람이다. 매일 들어오는 수십 통의 이메일도 영어고, 매일 읽는 수백 페이지의 계약서도 영어고, 도면이나 시방서도 다 영어다. 그리고 지난 일주일 내내 회의했던 분들과도 하루 종일 영어로 이야기했으며, 한국 언론에선 전혀 다루지 않는 제3세계 현지 정치경제적 상황이나 각 기업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것도 영어로 한다. 브런치나 SNS에서 교류를 하는 분들 중에는 아이비리그 박사님, 책도 쓰시는 훌륭한 영어 선생님, 외신을 매끄럽게 소화하시는 기자님, 혹은 토익 만점자들도 즐비한데, 여기서 감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일을 하면서 영어 때문에 힘든 일이 그다지 없다.



처음 회사에 입사하고 나는 4년 정도 국내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름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기술직 치고는 영어점수가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그다지 없는 편이었지만, 감히 해외에 나가 영어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겐 조금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는 국내 현장으로 발령 내달라고 요청했다. 어떻게 영어로 계약서를 만들고 내역서를 준비하고, 도면을 보며 시방서를 검토하고, 작업자들에게 업무지시를 하고 감리와 논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처음 해외현장에서 나가서 레터를 쓰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 문장 한 문장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그렇게 어렵사리 여러 책을 참고하며 썼던 그 레터가 등록이 되고 발주처에 나가는 순간, 그 부끄러움은 가슴속 깊이 간직했어야 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내가 처음 회사에 입사하고 현장에 발령받았을 때, 서울시청에 제출하는 공문서라는 것을 쓸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던 게 기억난다. 이십오 년을 넘게 한국어만 구사했지만, 막상 공문서라는 것을 쓰려고 하니 한 문장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고에서 예전 선배들이 쓴 공문서를 찾아보고 베껴서 어찌어찌 한 장 써서 가져가니 당시 팀장님의 빨간펜 자욱으로 거의 피의 공문서가 되었더라. 그렇게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하며, 소송 때문에 로펌 변호사들과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워 멀쩡한 공문서를 스스로 작성하기까지는 근 2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이건 사실. 영어와 한글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 느낌 따위를 나타내거나 전달하는 데에 쓰는 음성, 문자 따위의 수단”이다. 영어를 아무리 잘하고 영미권에서 태어나 생활한다 하더라도, 어떠한 분야의 기본지식이 부족하다고 한다면 한국인보다 해당분야의 문서를 이해하기 어렵고, 레터나 이메일을 작성할 수 없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지금 바로 명동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서울시청에 민원을 넣을 수 있게 공문서 한 장 만들어 달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도로교 표준시방서나 콘크리트 표준시방서를 보여주고 해당 고속도로에는 어떠한 기준이 적용되었는지 찾아보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도망가버릴 것이다. 이는 미국이나 영국도 그러하다. 내가 BS(British Standard) 나 ACI(American Concrete Institute) 코드를 열심히 읽고 소화한다면, 그 어떤 앵글로 색슨 감리자나 발주자가 뭐라 해도 내가 그들의 언어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영어가 아닐 수 있다. 흔히 해외 일을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그 영어를 지적하시며, 우리나라 회사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 영어 못하는 놈들만 모여있으니 적자를 보지, 그러한 말씀들을 하신다. 물론 지나치게 영어를 못하는 분들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대략 고등학교 영어 수준인 토익 600-700점 정도 이상인 분들은 업무 하는데 영어가 큰 장애물이 안될 수도 있다. 물론 계약을 담당하거나 대관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토익 900점도 모자란 점수가 될 수 있지만, 현장에서 시공관리를 하거나 설계를 하거나 공정을 관리한다면 중요한 건 영어실력보단 기술력일 수 있다. 매번 하는 이야기지만, 영어를 잘한다고 프로젝트를 잘 수행할 수 있으면 미국이나 영국 건설회사는 막 영업이익이 쑥쑥 발생하고 주가도 쑥쑥 오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가. Kellogg Brown & Root, 그러니까 KBR이라 불리는 미국의 건설회사가 있다. 1백 년도 넘는 역사도 있고, 2013년 매출액이 7.2 billion USD니 대략 한화로 8조 원 정도 된다. 이 회사, 2013년 기준 순이익이 75 million USD다. 약 800억 원 정도, 그러니까 이익률은 대략 1% 수준인 게지. Saipem이란 이탈리아 회사가 있다. 석유화학 분야에선 글로벌 강자인데, 이 회사는 2015년 기준 매출액이 11.520 billion EUR니 대략 한화로 14조 원이 넘는 수준이다. 그 해 영업이익은 (-) 452 million EUR, 대략 5천억 원가량 손실을 기록했다. 순손실로 가자면 (-) 789 million EUR니 이쯤 되면 말 다했다.



영어를 잘 한다고, 기업의 가치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일단 내 모국어로 공부를 하고, 논리를 배우고, 엑셀이나 캐드, 프리마베라 등의 프로그램을 다루며 업무의 영역을 넓혀가며, 현업에서 업무 경험을 축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실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기 위해선 꾸준히 공부를 해야 하며, 적어도 해외일을 한다고 하면 외신이나 기술서류, 같이 일하는 회사의 Annual report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고등학교 영어를 제대로 마스터했다면 대부분 업무를 통해 친숙해지면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꼭 토익을 만점 받거나 외국에서 몇 년 동안 공부를 해야지 생기는 능력은 아니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도 아이비리그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토익 만점을 가진 기술직들도 꽤 존재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꼭 회사에서 일을 잘한다는 연관성은 그다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영어를 잘 하시기에 가능성과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결국 이 보수적인 건설업이라는 분야는 경험과 노력의 축적이 그 영어라는 것의 비중을 훨씬 상회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아쉬운 점은 존재한다. 적어도 출판시장이나 외신 들을 접하면 아마 언어에 의한 정보력의 차이는 적어도 수백 배 이상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라도, 해당분야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지 않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문해력 측면에서 결코 외국인을 따라갈 수 없다. 모두 다 영어로 된 책으로 공부하는데 SAT에서 내국인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받는 한국인, 모두 다 영어로 된 입찰서를 가지고 입찰을 했는데 영미권 회사를 제치고 낙찰을 받는 비 영미권 회사, 이런 일련의 사례들을 지켜보면 영어는 결코 학업이나 업무를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시 이도 나의 단편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종종 그 영어라는 훌륭한 ‘핑계’를 가지고 업무를 할 때나 학업을 할 때 도망갈 구멍을 만드는 것은 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지 ‘본질’은 아닐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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