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높은 사회로 가기 위한 원포인트 제안
우리 사회에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부족한 문서 문화라고 생각한다. 단독주택을 짓거나 인테리어를 하거나, 일을 하며 견적서를 받거나 계약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의 이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명료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계약을 하게 되면 이행보증증권을 끊을 것인지, 어디서 얼마에 해당하는 금액을 끊을 것인지, 하자보수는 몇 년까지 할 것인지, 그렇담 유보금은 얼마로 책정할 것인지, 증권으로 대체할 것인지. 인테리어 창호를 쓰면 어떤 제품을 어떤 크기로, 어떤 시방에 맞추어 시공을 할 것인지. 인테리어 기간은 얼마나 잡고, 지연이 되면 어떠한 페널티를 부담할 것인지, 혹시나 공사를 수행하다 회사가 망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이렇게 시시콜콜한 사항 하나하나 계약서에 명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물론 처음 이러한 일을 접하는 분들은 낯설 수도 있겠지. 그렇기 때문에 국토교통부 등 정부에서 갑을에게 비교적 평등하게 적용할 수 있는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놓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소규모 시공을 하시는 분들 중 이렇게 표준 계약서를 쓰고 특수조건을 달기 꺼려하시는 분들이 종종 보인다. 무언가 갑이 계약적으로 옭아매려는 것 같아 보이나. 하지만 이렇게 계약을 하기 전에 서면으로 서로의 스탠스를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할 수 있다.
"그냥 믿고 하는 거지 뭐"
이런 말이 횡횡할수록 그 사회는 신뢰도가 낮은 사회일 확률이 높다.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 있겠지만 십여 년 전 내가 처음 국내에서 공사를 할 때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도급계약서에 없는 항목들을 담당공무원이나 원청회사 직원들이 지시한다고 하도급 회사에서 만든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는 공사용 가설계단이 될 수도 있고, 보호덮개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았다면, 하도급 회사 자체적으로 필요 유무를 판단해서 만들던지, 아니면 추가 공사금액을 주면서 시켜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말로 지시한 것들이 나중에 돼서는 눈덩이처럼 금액이 불어나 서로 이견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도급 회사 입장에서는 원청이 시켜서 설치한 것이니 돈을 달라고 하고, 원청 입장에선 아니 공사를 하면서 그게 필요하니까 알아서 설치한 것 아닙니까 하는 식의 갈등이다. 미연에 이러한 사항 하나하나 수백 장의 문서로 만들던지, 공문이나 이메일로 지시를 했다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 텐데 말로 했으니 말싸움밖에 안된다. 그리고 서로 하는 말이 이거다.
"그냥 믿고 했는데 뒤통수 맞았다"
해외에서 공사를 하며 가장 깜짝 놀랐던 사실은 그 수천 페이지의 계약서는 계약서이고, 서로 교신한 이메일 수천통을 인트라넷에 저장해 놓지를 않나, 발주자던 하도급자던 서면 지시 없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상기 공사용 작업 계단이 없으면 아무리 발주자나 원청업체에서 설치하라고 지시한다 하더라도 하도급자가 생각하기에 공사에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설치하지 않는다. 그래도 꼭 설치하라고 지시를 하면 하도급자는 서면 지시를 요청한다. 그것도 아니면 구두지시에 의해 설치하겠다고 이메일을 쓰며 말미에는 꼭 이런 말을 붙이곤 한다.
"As per your request"
물론 나의 단편적인 경험으로 한 사회를 재단하긴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분명 한국사회에서는 구구절절 계약서 쓰고 그것에 첨부물을 덕지덕지 붙은 것을 싫어하는 분들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서두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렇게 무언가 계약을 하기 전에 서로의 입장을 문서화하고 이해해 가는 과정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나중에 뒤통수를 맞았다느니, 믿었다느니 이런 말 보다 중요한 것은 명료한 문서이다. 신뢰사회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선결조건, 나는 이 문서의 생활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