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주말,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걷기 좋은 동네
서울은 역사가 깊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높은 빌딩 숲의 메트로폴리스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하지만 곳곳에 찾아보면 예전 기억을 간직하고 소소한 매력을 보여주는 곳도 꽤 많이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장소가 '서촌'입니다. 외국인 친구가 서울에 꼭 가봐야 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서촌을 추천합니다. 쉼, 예술, 역사, 사람 냄새, 식도락, 이 모든 것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곳이 서촌이기 때문이지요. 그럼 한번 서촌에 대해 알아봅시다.
‘서촌’은 인왕산을 배경으로 경복궁의 서쪽을 말합니다. 3호선 경복궁역 1,2번 출구로 나오면 걸어 갈 수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 종로구 효자동, 통인동, 청운동 등의 일대를 말합니다. 흔히 경복궁 동쪽에 위치한 북촌과 함께 한옥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경복궁 좌우측에 위치한 서촌과 북촌이 왜 서촌과 동촌이 아닌지는 아래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사대문 및 성곽에 에워 싸였던 조선시대엔 인왕산 앞에 위치한 서촌지역이 서울의 서쪽이었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지금의 북촌지역이 서울의 북쪽이었습니다. 역사 지리적 탐색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왜 서촌이 매력적인지 주제별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서촌의 하늘에는 전깃줄이 덕지덕지 엉켜 있습니다. 이십여 년 전부터 신도시에 살았던 필자는 이 전깃줄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담벼락에는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담쟁이도 곳곳에 보이지요. 배산임수 지형이었던 한성이라는 도시라 그런지 전깃줄 뒤로 보이는 인왕산도 푸근한 인상을 주곤 합니다. 이런 서촌 골목을 걷다 보면 내 마음도 차분해지고, 요즘같이 물기 빠진 은행잎들이 거리를 빼곡하게 가득한 날엔 숨겨왔던 감수성도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연인과 함께 걸어도, 가족과 함께 걸어도, 아무렴 혼자 걸어도 행복한 그런 길이 서촌엔 있습니다.
물론 북촌에도 좋은 미술관들이 많이 있지만, 서촌에도 소소한 매력의 미술관이나 잡화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출발한 대림미술관에는 지금 북유럽 패션 디자이너인 헨릭 빕스코브;Henrik vibskov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린다 매카트니의 전시가 이루어졌던 곳도 이 미술관이었습니다. 관람요금도 성인기준 5천 원 수준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예술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유 속의 여운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박노수 미술관을 들려 볼 것을 권합니다. 1938년 건립한 이층집으로 서촌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박노수 화백께서 실제 거주하셨던 가옥이며, 화선지에 그려진 수묵 담채화를 보다 보면 숨 가쁘게 지내온 나의 일상이 잠시 쉼을 찾는 듯한 기분도 들게 합니다.
이밖에 서촌에서는 골목골목마다 있는 소소한 잡화점에서 몇천 원짜리 귀여운 수제 아이템을 얻는 행운도 즐길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부터 근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서촌에는 다양한 역사적 인물들이 많이 거주하였습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 겸재 정선, 안평대군 등이 조선시대에 거주하였고, 근대에는 시인 이상, 윤동주, 박노수, 홍난파 등의 예술가들이 거주하였습니다. 다행히 서울시에서 이 분들의 생가를 잘 보존하여 걷다 보면 반가운 조그마한 박물관들이 꽤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많은 분들의 유적을 돌아다니며 조선 및 근대의 향기를 느껴보는 것도 서촌의 매력입니다.
문인들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단어가 한 가지 있다면 음식이겠죠. 서촌에는 상기 언급한 골목, 유적지, 미술관 외에도 밤새워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주점거리도 있습니다. TV 요리 관련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음식점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크지 않은 중소 음식점이라 식사시간엔 긴 줄을 서야 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맛집을 소개하자면, 매운 짜장이 일품인 중화요리 ‘영화루’, 튀김만두 및 피 냉면의 환상적인 조화를 보여주는 ‘북촌 손만두’ 등을 추천합니다. 이 외에도 즉석에서 해물을 늘어놓고 찌는 ‘서촌 계단 집’, 찰진 족발과 감자탕을 같이 먹을 수 있는 ‘할매집’ 등은 삼삼오오 마음 맞는 친구나 직장동료들과 같이 가서 이야기하기 좋은 곳입니다.
이처럼 쉼과 예술, 역사와 사람 냄새, 게다가 식도락까지 느낄 수 있는 서촌. 이번 주말 나들이 장소로, 데이트 장소로,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는 장소로 추천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