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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벤하운 Apr 20. 2017

[서평] 가치관의 탄생

가치관의 탄생, 이언 모리스 지음, 이재경 옮김, 반니


최근 들어 읽는 책들은 대부분 외국 학자들이 저술한 교양서이다. 학자들이 쓴 책을 선호하는 까닭은 그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에 있다. 사람은 제한된 경험으로 인해 누구나 자신의 그 편견과 단견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경향성은 짙어지게 되고, 자칫하면 무리한 자기만의 공상으로 사고를 이어가기 쉽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주석이나 참고문헌을 통한 자기 지식에 대한 피드백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친한 선배가 책을 쓰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문의를 받았다. 뭐 내가 책을 써본 사람은 아니지만, 종종 인터넷 언론에 글을 기고했었고 연구기관에도 글을 쓴 것을 본 선배가 가볍게 물어본 것이다. 물론 그 선배는 뭐 대단한 베스트셀러를 목표로 책을 쓴다는 건 아니었고, 단지 자기 분야에서 무언가 친절한 설명서와 같은 것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경향은 상당히 중요하다 생각하는데, 어떠한 분야에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깊이 경험을 한 분들이 이렇게 저술을 통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 뒤 따라오는 후배들에게 종종 상당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가 조언해준 바는 그러하다. 글쓰기가 각 잡고 쓰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그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을 찾고 기재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나도 평소 페북에는 그냥 나만의 생각을 줄줄 읊어대지만, 이게 각 잡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 상당히 스트레스풀한 일이더라. 그러니까 내가 언급한 숫자나 팩트에 대해 적절한 출처를 찾아야 하는데, 그 출처 또한 가급적 신뢰도 있는 언론 혹은 조사기관이어야 글의 신뢰성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쓰신 논문이나 통계청의 자료들, OECD나 IMF 등의 데이터, 이코노미스트나 ENR 등의 자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예전에 이런저런 집히는 책들을 읽을 때는 간간히 블로그 주소를 각주 달고 쓴 책도 보았는데, 이쯤 되면 그냥 조용히 그런 책들은 손에서 떼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앞서 지루하게 언급한 주석과 참고문헌이 가득한 교양서이다. 사실 책을 관통하는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꽤 심플한 편인데, 그 방대한 참고문헌과 논평 및 반론 등 때문에 책은 조금 두꺼워지게 된다. 저자가 전하고 싶은 바만 보자면, 전체 오백여 페이지 중 이백 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여기서 논평도 상당히 인상적인 전개 방식인데, 이언 모리스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스탠퍼드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학자이다. 이쯤 되면 그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가르치는 권위를 바탕으로 고압적이거나 주관적 세계를 일방적으로 전할 것만 같지만, 책을 읽어보면 그건 또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에는 일백 페이지 이상을 논평으로 할애하는데, 이 논평은 이언 모리스의 논리에 대해 문학박사, 역사학자, 철학박사, 소설가, 등의 다양한 전문가들이 하는 것인데, 그냥 다른 책에 있는 의례적인 호평이 아닌, 그야말로 설전 수준의 논평을 한다. 모리슨 교수의 논리의 허점, 혹은 일반화 등을 지적하며, 행간에 보이지 않던 허점을 여과 없이 드러나게 만든다. 더욱 흥미로운 지점은 이 논평에 대한 반론에 있는데, 모리스 교수는 이 모든 논평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도 이러한 말을 한다. 


“나의 견해는 언제나 옳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세계적인 역사학자도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감에 있어 허점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그 방대하고 거대한 인류의 역사를 단 이백 페이지로 일반화한다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역사를 바탕으로 인류의 패턴, 혹은 경향성을 발견해야 한다. 그러한 추측과 탐구를 통한 결론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재의 우리를 잘 이해할 수 있고, 미래를 조금 더듬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러한 자신의 논리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비평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일 것이다.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비평이나 비난에 자신의 단점을 하나둘씩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세운 논리에 대해 언제나 옳다는 주관 있는 모습은, 학자는 물론 어느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면 누구나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나의 의견은 이러하다. 아니라고? 그럼 말고 뭐. 이런 수준의 태도는 전문가라 하기엔 지나치게 무책임한 것이기 때문이다.


뭐 비록 내가 학자는 아니지만, 일을 하면서도 이러한 전개는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내가 무언가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다 보면, 기술적으로나 계약적으로나 다른 유관팀에서는 끊임없이 단점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물론 그러한 노력은 리스크 매니지먼트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다. 내가 그러한 지적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이고 재검토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코멘트 하나하나에 휘둘려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처음 내가 수립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플랜 자체를 뒤흔드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럴 땐 그들이 지적한 사항 하나하나를 반박해 나가며, 어느 정도 “나의 견해는 언제나 옳다.”수준의 완벽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서론이 지나치게 길었다. 이제 이언 모리스 교수의 이야기를 조금 들여다보도록 하자. 모리스 교수는 이야기의 시작을 35년 전 그리스의 고고학 발굴 현장으로 가져간다. 그 딱딱해 보이는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에피소드가 시작하는 건 아니고, 난데없이 길을 지나가는 게오르기오스 씨에서 이야기는 파생된다. 이 게오르기오스 노인은 그리스의 아시로스마을이란 농촌의 필부였는데, 그는 아내와 농촌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냥 혼자 걷고, 그 옆의 이 노인은 당나귀를 타고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상식으로는 당나귀가 한 필밖에 없다면 아내를 태우던지, 그냥 짐만 당나귀에게 전가하고 둘이 손잡고 걸어가는 것이 맞을 것인데, 이 노인은 그냥 혼자 타고 가고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모리스 교수 일행이 노인에게 왜 부인은 당나귀를 타고 가지 않냐고 물어보니, 노인은 그저 “부인은 당나귀가 없다.”라는 말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모리스 교수의 처음 맛본 만고불멸의 인류학적 경험, 다른 말로는 문화충격이라 한다.


간단히 이야기해 보자면, 35년 전 영국 런던과 그리스 아시로스마을, 그 선진국의 도시와 후진국의 농촌은 문명 자체가 상이하여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 가치체계를 크게 세 개로 구분한다. 이는 수렵채집 가치관, 농경 가치관, 화석연료 가치관이다. 하나하나 기록을 위해 살펴보자면,


“(수렵채집) 가치관은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주요 생산수단으로 삼은 사회와 결부된 가치관이다. 수렵채집인은 위계가 없지는 않지만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에 상당히 너그럽다.

(농경) 가치관은 주로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러서 생활하는 사회와 결부된다. 농경민은 평등보다 위계를 중시하고, 폭력에 덜 관대하다.

(화석연료) 가치관은 석탄, 천연가스, 석유의 형태로 화석화된 죽은 식물의 에너지를 추출해서 살아있는 동식물의 에너지를 증강하는 사회와 결부되는 가치관이다. 화석연료 이용자는 아직 불평등하지만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p.25 “


사실 책은 이 세 개의 가치관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예시와 디테일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모리스 교수의 논지는 이러하다.


“첫째, 절대 보편의 완벽한 인간 가치 체계를 주장하는 도덕철학 이론은 모두 시간 낭비라는 뜻이고, 둘째, 우리가 오늘날 금과옥조로 받드는 가치관도 머지않은 미래에 골동품이나 폐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p.26”


이는 나에게 상당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20세기 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라지는 지역감정이었다 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든 작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내 시각에 있어선 세대 간 갈등이 가장 큰 문제점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대 간 갈등은, 농경사회 기반의 사고를 하는 어르신들과 화석연료 기반의 사고를 하는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가치관의 차이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회사에서 간혹 이야길 해보면, 60년대 태어난 분들만 하더라도 시골에서 전기도 없는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분들이 종종 보인다. 이게 50년대나 40년대로 가자면 그 농경 가치관의 색채는 조금씩 더 짙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그 시절엔 평등보단 위계를 중시했으며 폭력에 덜 관대하던 시절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농경사회가 기반이었던 중세 봉건사회나 20세기 이전 시대는 전쟁에 이기지 못하는 부족이나 국가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부강한 국가를 이루기 위해선 왕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위계가 필요했으며, 그러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나라는 역사 속에서 이름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대는 그러하지 않다. 폭력이라는 제로섬 게임에 대한 인식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전쟁도 세계전쟁을 두 번 치르고 나서는 가급적 시도하려 하지 않고, 하더라도 국지전 수준에서 머무른다. 영토의 확장보다는 경제력의 증강이 중요시되며, 동티모르나 지부티와 같은 약소국 가도 국제사회의 중재를 통해 독립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도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이런 사회에서 유년기 및 아동기, 청년기를 보내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농경사회 가치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화석연료 또한 신재생에너지로 언젠가는 넘어가게 될 터인데, 그러한 미래의 포스트-화석연료 가치관은 어떻게 전개될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그 긴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 보자면, 수렵 사회의 기간은 현생인류 관점에서 대략 20만 년가량 진행되었다. 그리고 농경사회는 수메르인의 역사로 보자면 대략 1만 년가량 진행되었고, 화석연료는 비단 1백 년이 조금 넘는 역사일 뿐이다.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급진적 용어는 그다지 좋아라 하지 않지만, 이러한 일련의 변화는 시기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지만, 점점 더 급변한다고 볼 수는 있다. 그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하는 우리. 조금씩 그 과거를 돌이켜 보며, 어쩌면 다르게 사고할 수밖에 없는 가치관의 탄생을 이해해봐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책은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며 고민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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